오오
이소회
파란시선 0152
2024년 11월 3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07쪽
ISBN 979-11-91897-91-3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오늘은 몇 겹이니 너는 몇 번째 현실에 있니
[오오]는 이소회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잡식성 식물」 「익선아, 양배추식당에서 밥 먹자」 「드물고 귀한 것은 캄캄하게 온다」 등 47편이 실려 있다.
이소회 시인은 201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오오]를 썼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에 재직 중이다.
이소회 시인에게 세상 만물은 ‘씨앗’과 같은 형태로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사물이나 생명체 모두 그것의 본질이라 할 만한 것들을 내부 깊숙이 응축하고 있으며 내재된 그것들은 틈만 나면 불거져 나와 피어나고 부풀고 떠오른다. 하여 [오오]에는 피어나고 부풀고 떠오르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은 금세 다시 사그라들고 숨어 버리기도 하지만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언제든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비어져 나와 흔적을 남긴다. 씨앗들 속에는 “많은 낮과 밤”이 담겨 있고 “지나간 것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아침 책상에는 “폭설이 쏟아”지거나 “커다란 모감주나무가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뚜껑을 꼭꼭 잠그지 않으면/아침 책상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그것들은, 시인의 눈앞에 유독 자주 출몰한다.(「모감주 씨앗」) 언제든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인은 때때로 손을 뻗어 그것들의 주름을 펼친다.
이소회 시인의 시는 ‘머리’이거나 ‘가슴’이 아니라 ‘손끝’에서 피어난다. 존재론적 사유와 접속에의 열망이 깊이를 더해 차고 넘칠 때, 내부의 이야기가 손끝을 간지럽힐 때, 손을 뻗어 대상의 주름을 펼칠 때, ‘사이’에 낀 손이 파랗게 질리지 않도록 시인은 시를 쏟아 낸다. 쏟아진 언어가 때론 대답을 들려주고 때론 문을 열어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좀 더 시인과 함께 폐허 앞에 서 있을 수 있기를, “머리를 한껏 젖히고 별을” 바라볼 수 있기를(「오오」), 서로가 서로의 양분이 되어 내재성의 언어를 쏟아 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상 차성연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비를 맞는 순간, 소원탑 꼭대기가 까닥거리더니, 돌에 작은 심장과 노란 깃털이 생긴다. 돌은 눈을 떠서 딱새가 되고 딱새는 눈뜬 돌이 된다. 「눈뜬 돌」의 화자는 이 변화 속에서 돌과 딱새 사이에 있으면서도 없는 경계를, 실체는 없으나 작용은 활발한 침묵의 깊이를 읽는다. 「물구나무새 호흡법」에서는,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는 순간, 나무뿌리가 흔들리고 숲의 뿌리가 흔들리는 에너지의 파장을 읽는다. 새 한 마리에서 퍼져 나간 미세한 떨림이 여러 사물을 흔들며 지구로 우주로 확장되는 것을 감지한다. 그때 시는 의미를 고정하는 언어에서 벗어나 변화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품은 생명체가 된다.
이 시집을 읽으면 일상의 사물과 사건과 장면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운동과 마법적인 변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죽은 새를 나무 아래 묻어 줬더니, 이듬해, 가지마다 날개가 돋고 너무 많은 새가 열려서 나무는 공중으로 떠오른다. 껍질을 벗길 때마다 양배추는 구불구불한 미로가 되어 길을 헤매게 하고 썰어서 수북해지는 순간 부엌을 폭발시킨다. 메리고라운드가 빙빙 돌면 입구는 출구가 되고 그늘은 햇살이 되고 자동차 소음은 까마귀 떼 소리가 되고 할아버지는 깜순이가 된다. 트럭에 실려 가는 분홍 돼지들은 서로 등에 찍힌 붉은 도장의 향기를 맡다가, 온몸이 온 생이 통으로 꽃이 된다. 꽃잎이 되어 무더기로 지러 간다.
이 시집을 읽는 즐거움은 느낌에서 생동하는 신비를 체험하는 일이다. 그 느낌이 사소하고 평범한 사물과 일상에 닿는 순간에 일어나는 변화무쌍을 체험하는 일이다. 표제 시 「오오」는 그 즐거움을 압축하여 보여 준다. 옛 사진을 보면서 당신과 버스 안에서 음악을 듣고 영화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뜨듯한 국밥 속으로 빠져들 때, 종이 사진은 어깨를 맞댄 두 사람 “오오”가 된다. 동시에 그 순간의 마법에 놀라는 감탄사 “오오”가 된다. 그것은 생명 에너지가 깨어나는 순간의 즐거움이며, 만물과 더불어 운동하는 존재가 되는 즐거움이다.
―김기택 시인
•― 시인의 말
꽃잎 모두 흘러내리고
일제히 문 닫은 튤립 화단
소란하던 사람들 모두 떠난 자리
빽빽한 꽃대의 방향성으로 섰습니다.
이 작은 시간이 문을 닫으면
균형은 구근 쪽으로 고일 것입니다.
•― 저자 소개
이소회
201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오]를 썼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에 재직 중이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눈뜬 돌 – 11
물구나무새 호흡법 – 12
잡식성 식물 – 13
늑대들 – 14
On board – 16
오금이 걷다 – 18
홀수들 – 20
오오 – 21
반지하방의 데리다 – 22
저녁이 멀다 – 24
노크 – 26
민들레의 바깥 – 28
제2부
봄 눈사람 – 31
메리고라운드 – 32
꽃잎 – 33
없는 몸이 부풀어 오르는 – 34
연쇄 추돌 – 35
물고기 살해자 – 36
중층육면체 무한연속구조 – 38
눈먼 동굴 물고기 – 40
모감주 씨앗 – 42
안녕, 오늘 – 44
적막을 업고 – 46
율가(栗家) – 48
제3부
부푸는 등굣길 – 51
수야리, 여름의 집 – 52
수야리, 겨울의 집 – 53
사력 – 54
잠실 – 56
익선아, 양배추식당에서 밥 먹자 – 58
가고파랜드 – 60
크리스마스섬으로 – 62
다시, 종로 네거리 – 64
훅 – 66
드물고 귀한 것은 캄캄하게 온다 – 68
제4부
난간 없는 다리를 건너다 – 73
각자무치(角者無齒) – 74
당신과 나의 광대한 틈이 미세한 것으로 채워지다 – 76
수몰 지구 – 78
너머의 너머 – 80
얼굴 없는 안녕 – 82
돌림노래 – 84
오존주의보 – 85
손 – 86
산 79-1번지 – 88
파지 할머니의 신춘문예 당선기 – 90
토끼가 사라진 정원 – 92
해설 차성연 손끝에서 펼쳐지는, 폐허의 주름 – 95
•― 시집 속의 시 세 편
잡식성 식물
내가 아는 지상 가장 높은 곳
상한 우유를 들고 주인집 옥상에 올랐다
깊은 밤 안에는 푸른 화분들
뿌리 가까이 우유를 부어 주었다
검은 흙이 하얗게 부글거리다 이내 가라앉는다
주인이 박아 둔 달걀 껍데기를 식물들은 몇 달째 먹고 있다
우유를 흩뿌린 것 같은 은하수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젖을 먹고 자란 것들은 고향이 생겨서
그쪽으로 목이 꺾인다
길에서 주운 새를 나무 아래 묻어 준 적 있다
이듬해 가지마다 날개가 돋고
너무 많은 새가 열려 나무가 떠오르는 날도 있었다
반지하방 짤막한 하늘이 뜨는 시간
더듬이를 기억하는 다육이 창으로 바짝 붙는다
발목이 불러 주는 구름 노래 붉은 사과 속 우물이 깊고 자작나무 숲 짙어지면 가만가만
푸른 나무늘보 돋아난다 ■
익선아, 양배추식당에서 밥 먹자
양배추식당 간판이 좋아 들어갔는데 양배추 삶은 부드러운 요리가 나오더라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익선아, 요즘 나는 그런 이름이 좋아 식물가게라든가 그냥 중국집, 빵공장,
우리 어릴 적 놀던 골목골목 익선아, 꿈에서도 나는 그 길을 헤맨단다
아리랑슈퍼 앞 큰길에서 첫 골목 들어서면 금세 두 갈랫길 왼쪽으로 돌아가면 양손에 짐 든 사람 아슬아슬 지나가는 틈샛길 이어지는 계단 뒤로 또 다른 계단 오르고 오르면 난간 아래 보이는 집들, 옥상들, 굽이굽이 계단들, 한 사람씩 드나드는 좁은 문 너머 낮은 천장, 작은 방들 지나 쪽창이 덜컹, 빨래가 펄럭, 티비 소리 왕왕 다시 돌아 그 골목, 마구할멈 집, 한 사람 겨우 쭈그리는 화장실을 바깥에 두었지, 우리가 자주 드나들던 문, 할멈이 쫓아 나올 때마다 함께 소리 지르며 바지를 추어올리던 골목길 아리아리 아라리오 잘도 달아난다
양배추식당에서 양배추 밥 먹고, 익선아, 식물가게에서 푸른 식물 하나 사고 빵공장에서 그냥 빵을 사서 모두 자전거 바구니에 싣고 달리자, 하나의 선으로 달리면 길은 길이 되어 펼치고 바람은 바람으로 불고 나무는 나무로 흔들리겠지 내 다리는 부지런히 다리가 되자, 익선아, 아리아리 골목길을 펼쳐나 보자 ■
드물고 귀한 것은 캄캄하게 온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로 이끌었을까요
휘황한 아파트 불빛 벽으로 둘러싸인 움푹 꺼진 곳
도시가 갑자기 멈춘, 거대한 검은 구멍
화려한 압구정 거리에서 불현듯 만났던
우리 안의 폐허가 꼭 그랬을 겁니다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검은 구멍들 말입니다
환한 방으로 기어든 바퀴를 신문지 뭉치로 때려잡을 때
당신은 폐허 하나를 뭉개 버린 거였지요
비 온 뒤 천변을 걷다 만난 유난히 길고 느린 뱀 한 마리
그토록 생생한 폐허에 나는 얼마나 몸서리쳤던지요
내가 바로 너의 맨살이며 깊은 바닥이며 너의 기반이라고
변명의 기회도 없이 사라져 갑니다
당신과 나는 이제 거대한 폐허 앞에 섰습니다
빗방울 듣는 밤, 불빛 쪽으로만 돌던 발을 거두어 여기
두려운 어둠과 낯선 황막함, 불안한 공허에 떨며 섰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은 고양이, 또 다른 폐허로 건너갑니다
오랜 고요에는 풀이 무성합니다
흔들리는 불빛들 지우며 풀벌레 소리 높아집니다
어릴 적 만났던 깊은 그믐
구멍 하나 없던 밤
발끝에 새로 눈을 만들며 길고 느리게 걸어가던 밤
그 드물고 귀한 어둠이 비로소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 폐허 앞에 좀 더 서 있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