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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列子)
2500년 전쯤인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백 가지 학파가 있어서 그들을 ‘제가백가(諸子百家)’라고 한다. 그 제자백가 중에는 내가 아는 학파는 백은커녕 열도 못될 것 같다. 겨우 생각나는 인물이라야 공자(孔子), 맹자(孟子), 노자(老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순자(荀子), 관자(關中), 안자(晏嬰), 증자(曾子), 귀곡자(鬼谷子), 한비자(韓非子), 회남자(淮南子) 이런 정도 뿐이다. 주자(朱子)가 있긴 하지만 그는 송(宋)대의 인물로 제자백가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춘추전국시대에 189개 학파가 있었다고 하니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런 제자백가 중에서 오늘 한 사람을 새로 접하게 되었으니 그는 ‘열자(列子)’로 열자의 글 모음이 바로 《열자》다.
열자! 그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고, 그는 겸손했으며 소박하고 조용한 은자의 삶을 살았다.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하거나, 아는 척하거나 떠벌리지 않았다. 그는 정(鄭)나라 포(圃)지방에서 40년을 사는 동안 주위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으며 뛰어난 학식을 소유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라는 것은 몰랐다.
어느 해 정나라에 기근이 들자 열자는 이웃 위(衛)나라로 이사 가기로 작정했다.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스승이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꼭 떠나시겠다면 마지막으로 스승님을 기억할 말씀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무 대답이 없던 열자는 한참 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스승이신 호구자림(壺丘子林)께서는 말이 거의 없는 분이셨다. 그 분은 모든 것을 저절로 되도록 내버려 두라고만 말씀하셨네. 하지만 언젠가 나와 함께 공부하던 백혼무인(伯昏暓人)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옆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지금 들려주겠네.”라고 하고,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태어나지 않고 늘 현존하는 도道가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그 변화의 배후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道가 있다. 태어나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 도가 태어나는 것을 태어나게 하며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게 한다. 태어나는 것은 태어남을 피할 수 없고, 변화하는 것은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태어나고 변화하는 것들은 음양(陰陽)과 사시(四時)의 순환에 따라 한순간도 쉬지 않고 태어나고 변화한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도는 늘 자신의 상태에 머물면서 갔다가 되돌아옴을 반복할 뿐이다. 그것은 이런 움직임은 멈추지 않으며, 끝도 없다.”
여기서 보면 열자는 노자·장자와 같은 도가(道家) 사상을 추구한 인물임을 알 수 있고, 어쩌면 같은 스승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름이 열어구(列櫂寇)인 열자는 노자의 제자이었던 관윤자(關尹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도 하고, 당시 여러 제후와 관료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던 때에 오직 맑고 빈 마음으로 무위(無爲)자연과 도를 숭상하고 추구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열자》는 《노자》《장자》와 더불어서 도가의 3대 경전으로 꼽히기도 한다.
《열자》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열자가 제자들과 위나라로 가던 도중에 제자 백풍(百豊)이 풀숲에서 해골 하나를 발견하고는 쑥대를 뽑아 그것을 가리키자, 물끄러미 해골을 바라보던 열자가 말했다.
“저 해골의 주인은 알 것이다. 모름지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을 … 그렇다면 삶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죽음을 걱정할 필요도 없으리라. 모든 존재는 하나의 생명에서 나와 여러 형태로 삶과 죽음을 거듭하다가 다시 근원인 하나의 생명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열심히 일한 다음에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보고 흐뭇해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누구나 저 해골처럼 되고 만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는 백 년 안에 저 해골바가지처럼 변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살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또 죽었다고 잃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태어남과 죽음,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순환이고 현상일 뿐이다.
《열자》에는 공자와 관련한 이야기가 여럿 나오는데,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자공이 배우는 것이 모두 쓸데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승인 공자에게 잠시 쉬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쉴 수가 없는 법이다.”
자공이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공자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쉴 곳이 없겠느냐? 꼭 찾아야 한다면 쉴 곳이 있기는 하다. 저기 저 무덤을 보거라. 봉긋하게 쌓인 흙더미가 쉴 곳으로 적당해 보이지 않느냐? 바닥도 널찍한 것이 자네가 쉬기에는 안성맞춤인 것 같구나.”
자공이 스승의 말에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말했다.
“죽음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군요. 후회 없는 삶을 산 사람은 편안히 무덤에 묻혀 휴식을 취하고,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죽음에 굴복하고야 무덤에 묻히니 말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래 네가 그것을 알았구나.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을 즐거운 줄로만 알고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늙은 것을 한탄하기만 하고, 그것이 얼마나 편안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죽음을 피하려고만 하고 그것이 얼마나 평안한 쉼인 줄을 모른다.”
아마도 공자는 사람은 이생에서 무언가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공자와 관련한 이야기는 또 있다. 공자의 제자 안회(顏回)가 공자에게 여쭈었다.
“제가 얼마 전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넌 적이 있는데, 물살이 세서 배를 다루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공이 노 젓는 솜씨가 참으로 귀신같았으므로 쉽게 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공에게 당신의 노 젓는 법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는 누구라도 배울 수 있으며, 특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은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하더군요. 또 헤엄을 칠 줄 알고 잠수도 할 줄 아는 사람은 전에 배를 본 적이 없어도 금방 배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 까닭을 물었지만, 사공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사공이 말한 뜻을 대략 알 것 같기도 하나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스승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음, 자네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남이 쓴 글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실제로 몸으로 체득한 것은 없다는 점이 문제로군.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은 물의 성질을 이해하고 있다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물속에서 물의 성질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그는 자기가 물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지. 이렇게 물의 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배 다루는 법도 쉽게 배울 수 있다네. 또 잠수를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도 배 다루는 법을 쉽게 배울 수 있지. 그는 깊은 바다라도 땅처럼 느끼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하게 느낄 정도겠지. 그러니 배가 뒤집히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노를 저을 수 있지 않겠느냐?”
공자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아마 기왓장같이 별것 아닌 것을 걸고 게임을 하면 잘할 것이네. 하지만 허리띠에 붙은 금장식을 걸고 내기를 하면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큰돈을 걸었다면 마음이 오그라들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네. 그것은 자네 솜씨가 갑자기 없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외적인 상황의 영향으로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지. 외적인 상황으로 마음이 흔들리면 험한 물에서 배 다루는 일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네. 외적인 것을 중히 여기면 내면이 흔들리고 내면이 흔들리면 외적인 상황도 엉망진창이 되는 법이지.”
열자라는 이름은 그래도 들어본 것 같았는데, 죽자라고는 정말로 처음 듣는 이름이다. 죽자(粥子)가 말했다.
“그대가 힘으로 정복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면 그대는 언젠가는 그대보다 더 힘이 센 사람을 만나 그에게 굴복당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양보하고 물러나는 법을 배운다면 그대는 결코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늘 이기려고만 든다면 언젠가는 패하고 또 잃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경쟁하거나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면 패하거나 잃을 걱정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언제 힘을 써야 하고 언제 물러나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강한 것은 부드러움을 갖추고서야 완전해 질 수 있다. 강하기만 하다면 언젠가 부러진다. 노자도 말했다.
“강한 군사력에 의지하는 나라는 머지않아 멸망한다. 나무 역시 너무 강하면 꺾인다. 그래서 ‘딱딱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친구이고, 부드럽고 연한 것은 생명의 친구’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열자》에는 열자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와 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도 한기도 하는데, 열자는 사람이 깨어 있을 때는 여덟 가지 의식상태가 있고, 자는 동안에 꾸는 꿈에는 여섯 가지 양상이 있다고 하면서, 인간의 삶은 이 열네 가지 의식상태를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깨어 있을 때 의식상태는,
첫째, 대상을 자각하는 상태.
둘째, 자각한 대상에 반응하는 상태.
셋째, 반응하여 행위한 결과로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상태.
넷째, 반응하여 행위한 결과로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상태.
다섯째, 행위의 결과로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즐거움.
여섯째, 행위의 결과로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슬픔.
일곱째, 살아 있다는 자각.
여덟째, 죽음에 대한 의식.
이러한 여덟 가지 의식상태는 깨어 있는 동안, 육체가 외계와 접촉하는 가운데 형성된다고 했다. 그러면 꿈의 여섯 가지 양상이란 무엇인가?
첫째, 별로 특징이 없는 일반적인 꿈.
둘째, 경고하는 꿈.
셋째, 깨어 있을 때 곰곰이 생각하던 것에 대한 꿈.
넷째, 교훈적인 꿈.
다섯째, 행복한 꿈.
여섯째, 두려운 꿈.
이런 여섯 가지 꿈은 외계와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음이 쉬지 않고 활동하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것으로 언제 어떤 변화가 생기고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고 있으면 변화가 생겼을 때 당황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고 있으면, 사전에 준비할 수 있고 막상 그 일에 부딪쳤을 때 흥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꿈의 경우는 어떤가? 언제 어떤 꿈을 꾸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있으면 꿈을 꿀 때 흥분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쉬지 않고 작용하기 때문에 자면서도 꿈을 꾼다. 낮에 몸으로 외계의 사물과 접촉하며 생각했던 것들이 밤에 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서로 반응하기 때문에 마음에서 관념이 사라지면 고요해지고, 몸이 외계의 사물로부터 자극을 받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게 된다. 사람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낮에도, 밤에도 꿈을 꾼다. 그러나 마음을 비워 고요해진 사람은 깨어 있을 때는 완전히 깨어 망상에 빠지지 않고, 잠잘 때도 꿈을 꾸지 않고 완전한 휴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잠이 무엇인지 모르고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깨어 있는 것과 꿈꾸는 것에 대한 구별이 없고, 항상 잠만 자는 사람은 그가 꿈에서 본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깨어 있는 것과 꿈꾸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며, 어느 것이 정상일까? 주나라에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낮에는 재산을 관리하고 종들을 다스리느라 지칠 대로 지쳐 밤이 되면 곯아떨어졌으나, 매일 밤 꿈에서는 남의 집 종이 되어 숨도 제대로 들이지 못하고 바쁘게 일하는 꿈만 꾸었다. 잠꼬대도 하고 신음하다가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부자로 돌아왔다. 부자는 밤마다 시달리는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친구가 말했다. “자네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근방에서 자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해졌네. 자네는 보통 사람이 넘보지 못할 튼튼한 기반을 다졌네. 그런데 그런 악몽을 꾼다니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네. 세상의 모든 것은 스스로 균형을 잡는 것이라네. 행복과 불행도 예외가 아니어서 깨어 있을 때 행복한 사람이 잠잘 때도 행복을 바라면 안 되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네.”라고 충고했다.
부자는 친구의 충고를 듣고, 자신이 끝없이 욕심을 부렸고 종들을 너무 가혹하게 몰아댔음을 깨달았다. 부자는 그날부터 종들을 자비로 대하고 또 베풀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여유로운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자 밤마다 꿈에 남의 집 종이 되어 괴로움을 당하던 악몽은 더이상 꾸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데, 무엇에 쫓겨 도망가는 사슴을 만났다. 그는 작대기로 사슴을 때려잡았다. 뜻밖에 만난 행운을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갈 때 가져갈 생각으로 사슴을 구덩이에 넣고 풀로 감추었다. 그런데 나무를 하다가 그만 사슴을 감춰 놓은 장소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자 그는 자기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무꾼은 꿈을 꾼 모양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산에서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무꾼은 사슴을 잡았던 일이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계속 마음이 찜찜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으므로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사슴을 숨겨놓았던 곳과, 그 사슴을 가져간 사람과, 그 사람이 사는 곳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래서 아침에 꿈에서 보았던 사슴을 가져간 사람을 찾아갔다.
그 사람 집에 가보니 마당 한구석에 사슴이 있었다. 나무꾼은 자신이 잡은 사슴이라며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가 발견한 사슴이니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둘은 끝내 관청으로 가서 판결을 요구했다. 재판관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말했다.
“나무꾼이 사슴을 잡았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꿈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보니 꿈이 아니라 실제였다고 했네. 나무꾼의 말대로라면 사슴은 나무꾼의 것이네. 그런데 사슴을 가져간 저자는, 나무꾼이 사슴을 잡은 꿈을 꾼 것뿐이고 자기가 사슴을 발견한 것이 실제라고 주장했네. 그러면서 그의 아내도 그가 꿈에서 사슴을 잡은 꿈을 꾼 나무꾼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네. 만약 자네 아내의 말이 맞는다면 사슴을 잡은 나무꾼은 자네가 꾼 꿈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네. 그러면 그가 가져간 사슴은 남이 잡아 놓은 사슴이 아니라 그냥 그가 주운 것이 되지. 그러면 당연히 그의 것이 될 것이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 누구 말이 사실이고 누구 말이 사실이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네. 모름지기 꿈과 현실을 구별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네. 그러나 지금 사슴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을 반씩 나누어 갖도록 하게.”
이 이상한 재판 이야기를 들을 임금이 옆에 있던 재상에게 물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 이야기 전체가 재판관이 꾼 꿈은 아닐까요?”재상이 대답했다.
“저는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꿈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황제나 공자 같은 성인만이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실제라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황제나 공자가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실제인지 알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사슴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라고 한 재판관의 편결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기 막히지만 기막히다고만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책의 제4편은 아예 ‘중니’라고 하여 공자 편이다. 그래서 공자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공자의 사상이 회자 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그만큼 비판도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 공자가 가장 아끼는 제자 안회에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젊었을 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네. 그것이 하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믿었네. 《시경》과 《서경》같은 고전을 통해 학문과 기예를 익히고 시와 음악으로 나의 마음을 가다듬어 세상을 구제하려 했었지. 내가 나 하나를 바로잡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모범으로 삼아 자신을 바로잡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네. 또한 임금에게도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았네. 그러나 내가 공부를 마쳤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내 공부가 한 나라 당대에도 통하지 않는데 온 천하와 내세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나. 이제 나는 고전의 가르침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네. 그리고 마땅히 세상을 구제할 다른 방법도 알지 못한다네. 그래서 근심하며 슬퍼하는 것이라네.”
공자의 고백을 들은 안회는 말문이 막혔다. 스승이 자신에게 이런 답답한 속마음을 내비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안회는 더욱 진지한 자세로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공자가 계속 말했다.
“그러나 내가 터득한 바도 있네. 진정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행복이다. 만족이다. 하는 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네. 이 세상에는 즐거워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만족에 이르는 길이라네. 만약 이런 경지에 이른다면 고전과 시와 음악으로 세상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 그렇다면 그대가 세상을 변화시키든지 변화시키지 못하든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안회는 스승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깨달았다. 그는 두 손을 모아 큰절을 올리고 스승의 방에서 나왔다. 안회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도반인 자공이 와 있었다. 안회는 자공에게 스승의 말씀을 전해 주었다. 자공은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자공은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방에 처박혀 음식도 먹지 않고, 잠도 못 이루며 고민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안회가 스승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감을 가지라고 위로했다. 이후 자공은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않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자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는 순전히 열자의 판단이지만 내가 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열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기를 좋아했다. 스승인 호구자림이 놀러 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고 묻자 열자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서 놀러 다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도 자기들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줄 알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경치가 아니라 자연이 변화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다닙니다.”
그러자 호구자림이 말했다.
“너는 네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를 바가 없다. 네 말대로 다른 사람들은 경치를 구경하고 너는 변화하는 이치를 살핀다고 하자. 그렇지만 그들이나 너나 밖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느나? 밖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는 사람은 감각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늘 새로운 볼거리를 찾게 되지. 그러나 참된 만족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열자는 스승의 말을 듣고 나서 이후로 여기저기 구경 다니는 것을 그만 두었다. 열자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호구지림이 말했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특히 자기가 무엇을 보고 있다는 의식마저 없는 상태에서 즐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무엇을 본다는 생각 없이 보고, 무엇을 행한다는 생각 없이 행한다면 보고행하는 모든 일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 상태가 되면 보는 사람과, 보이는 대상인 경치가 구별되지 않고 하나의 체험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구경과 놀이의 극치다.”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누군가 죽으면 슬퍼한다. 그러나 양주(楊朱)는 달랐다. 친구 계량(季梁)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집을 바라보고 웃으며 노래 불렀다. 하지만 다른 친구인 수오(隨梧)가 죽었을 때는 슬퍼하고 통곡하며 울었다. 그것은 계량은 수명을 다하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수오는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요절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양주는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노자》《장자》《열자》를 도가의 3대 경전이라고 말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도는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열자가 말하는 도란 어떤 것일까. 현자 관윤의 입을 빌려 열자가 말했다. “자신의 일을 끝낸 다음 어떻게 물러나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하늘의 길(道)을 아는 사람이다.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행동이 물처럼 자연스러워지며 마음은 거울처럼 맑아진다. 그런 사람은 세상과 다투지 않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자연의 흐름(道)에 어긋나지 않는다. 도를 깨달은 현자는 알면서도 판단하지 않으며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억지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참된 앎이고 참된 힘이다. 시비선악(是非善惡)을 따지며, 욕심에 따라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도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무위경지(無爲境地)를 논하면서 세상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참으로 도를 체득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엇을 하되 하려는 욕망이 없이 한다.”
《열자》‘탕문(湯問)’편은 은나라의 탕임금이 질문하였다는 것으로, 며칠 전에 손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우주에 대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것과도 관계되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탕임금이 현자로 알려진 신하 하극(夏棘)에게 물었다.
“만물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오?”
하극이 대답했다.
“만약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어찌 지금 만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먼 후대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맞는 말이겠습니까?”
탕임금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만물이 선후가 없이 늘 있었다는 말이오?”
하극이 대답했다.
“만물의 시작과 끝이 언제인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의 시작이 다른 것의 끝이 되기도 하고, 다른 것의 끝이 또 다른 것의 시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첫 번째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탕임금이 또 물었다.
“그러면 우주는 끝이 있소?”
“모르겠습니다.”
“우주는 경계가 없이 무한하다는 말이오?”
집요한 탕임금의 질문에 하극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우주에 경계가 없다면 우주는 끝이 없이 무한할 것이고, 경계가 있다면 끝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경계가 있다면 그 경계밖에 또 무엇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천하 만물이 오고 감이 끝없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우주에 경계가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주에 경계가 없다면 우주는 무한할 것이고, 경계가 있다면 끝이 있을 것입니다.”지금도 어색하지 않은 묘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가 있다. ‘우매하고 어리석은 늙은이가 산을 옮기다’는 말로 우공이 살고 있는 곳은 워낙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밖으로 나가려면 큰 산 두 개를 둘러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날 마을 밖을 다녀온 우공이 가족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먼 길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산을 깎아서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아들과 손자들은 찬성했지만, 아내는 반대했다.
“당신 나이가 얼만데 저 큰 산을 옮길 힘이 있다고 그럽니까? 산에서 파낸 바위와 흙은 또 어떻게 하려고요.”
우공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힘을 합치면 못 할 것이 없다고 했다. 산에서 나온 흙은 발해만 바다에 버리면 된다고도 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산을 옮기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자 이웃에 사는 젊은 과부의 아들도 돕겠다고 왔다. 그러나 산은 쉽게 깎이지 않았다. 이것을 지켜본 마을의 지수(智璟-지혜로운 노인)라는 노인이 찾아와 말했다.
“당신은 사리를 분별할 만큼 나이를 먹었음에도 저 큰 산을 옮긴다니 그런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소? 마당에 난 풀 한 포기 뽑는 것도 힘겨울 텐데 어떻게 저 엄청난 산을 옮기겠다는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우공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한심하구려. 어떻게 그렇게 융통성이 없소? 산을 옮기다 내가 죽으면 내 아들과 손자들이 계속 옮길 것이고, 그 아이들이 죽으면 그 아이들의 자손이 계속 옮기면 되지 않겠소? 자손은 대를 이어서 계속 태어날 것이지만, 산은 더 늘어나지 않으니 언젠가는 평평해지지 않겠소?”지수 노인은 할 말을 잊었고, 사람들은 미친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지만 우공과 그의 아들과 손자와 이웃집 과부 아들은 묵묵히 산을 옮기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산지킴이 산신령이 당황해했다. 저렇게 하다가는 산이 없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산신령은 그 일을 옥황상제에게 보고했고 보고를 받은 옥황상제는 우공의 정성과 인내심에 감동해 그를 돕기로 하고 두 명의 거인을 내려보내 산 하나는 동쪽 끝으로, 다른 하나는 남쪽 끝으로 옮겨놓도록 했다. 사람들은 산이 없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ㅋㅋ
월(越)나라 동쪽에 첩목(輒木)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을 낳으면 산 채로 잡아먹었다. 그래야 다음에 태어날 아이가 튼튼하다고 믿었다. 또 그들은 할아버지가 죽으면 살아 있는 할머니를 등에 지고 가서 내다 버렸다. 할아버지가 죽어 귀신이 되었기 때문에 귀신과 함께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초나라 남쪽에는 염인(炎人)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부모가 죽으면 살이 다 썩어 없어질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가 나중에 뼈만 묻었다. 그래야만 효자라고 했다.
진(秦)나라 서쪽에는 의거(儀渠)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부모가 죽으면 장작을 쌓아 놓고 시체를 태웠다. 시체 타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면 죽은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화장을 해야만 효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백성들은 이런 것을 풍속이라고 한다. 억지로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본질에 따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인지라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옛날 팽조(彭祖)의 지혜는 요임금이나 순임금보다 못했지만, 그는 팔백 년이나 살았고, 공자의 제자 안연(顏淵)은 재주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났지만 겨우 서른두 살밖에 살지 못했으며, 공자의 덕망은 제후들보다 탁월했지만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처했고, 은나라 주왕(紂王)은 행실이 세 명의 어진 신하만도 못했지만 임금 자리를 보전했으며, 오(嗚)나라 계찰(季札)은 현자였지만 벼슬을 하지 못했고, 제나라 전항(田恒)은 오만방자하였지만 제나라를 차지했으며, 백이(伯夷)와 숙제(淑齊)는 어진 사람이었으나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고, 노나라 계(季)씨는 탐욕스러웠지만 청렴결백한 전금(展禽)보다 부유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 지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은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오래 사는데 어떤 사람은 요절해서 죽고, 성인은 궁하게 사는데 역적의 무리는 떵떵거리며 살고, 지혜로운 사람은 천대받고 어리석은 사람은 귀한 대접을 받고, 착한 사람은 가난한데 악한 사람은 부유하게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명이라는 것인가? 열자는 이를 ‘사람의 힘(인력)’과‘하늘의 힘(천명)’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천명이라고 변명처럼 대변했다.
“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나는 곧은 것은 곧은 대로 나아가게 하고, 굽은 것은 굽은 대로 놔둔다. 그래서 오래 살 사람은 오래 살고 일찍 죽을 사람은 일찍 죽으며, 출세할 사람은 출세하고 출세하지 못할 사람은 출세하지 못하고, 귀한 대접을 받을 사람은 귀한 대접을 받고 천한 대접을 받을 사람은 천한 대접을 받는다. 부유하고 가난한 것도 다 저절로 되는 것이다. 하늘이 꾸미는 일이 아니다.”
양주(楊朱)와 친구 계량(季梁)의 이야기는 앞서도 있었지만,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여럿 있다. 한번은 계량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자식들이 의사를 불러오겠다고 했다. 그때 병문안을 온 양주에게 계량이 말했다. “내 자식들이 이렇게 못났소. 노래나 한 곡 불러 저 아이들을 좀 깨우쳐 주시구려.”그래서 양주가 노래를 불렀다.
‘사람의 운명은 하늘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사람이 알 수 있으랴?
행운이 하늘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불행이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라네.
나인들 어찌 알고 그대인들 어찌 알랴!
의사인들 어찌 알고 무당인들 어찌 알랴!
그대들은 이런 이치 아는가?’
그러나 계량의 자식들은 이 노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결국 용하다는 의사를 셋이나 불러왔다. 교씨와 유씨, 노씨 성을 가진 의사였다. 교씨와 유씨는 계량의 병은 불규칙한 식사, 체질 때문이라고 하면서 손을 쓰면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씨는 달랐다. 그가 말했다.
“당신 병은 하늘이 내린 병도 아니고 당신이 잘못해서 생긴 것도 아니오. 당신이 이런 병을 앓는 것은 다 운명이오. 당신이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일이올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는 않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약이나 침으로 치료한다고 정해진 운명이 바뀌겠소? 그냥 자연에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이에 계량이 자식들에게 말했다. “이 의원은 하늘이 내리신 신의다. 잘 대접해서 보내 드려라.”그리고 얼마 뒤 계량의 병은 저절로 나았다.
우리 몸은 아낀다고 해서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고, 몸에 신경을 안 쓴다고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삶을 귀하게 여겨도 죽을 수 있고, 특별히 귀하게 여기지 않아도 죽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사실이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노자가 제자인 관윤에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재능이 없고 가난하다고 해서 하늘이 그를 미워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늘의 뜻을 누가 알겠는가?”
하늘의 뜻, 즉 운명으로 치부해 시비를 가리려고 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양주에게는 양포(陽布)라는 동생이 있었다. 양포가 형에게 물었다.
“나이도 말씨도 재능도 같은 쌍둥이 형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얼굴도 걸음걸이도 똑같아서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명은 부자이고 다른 한 명은 가난합니다. 그리고 한 명은 건강하게 오래 살았는데 다른 한 명은 병치레만 하다 일찍 죽었습니다. 한날한시에 같은 부모 밑에서 같은 재능을 갖고 태어났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양주가 대답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현인들이 대답을 했느니라. 그것을 설명해 줄 테니 잘 듣고 혼란에서 벗어나도록 해라. 비슷한 때에 비슷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두 사람의 삶이 천양지판으로 달라지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행복해하지도 않고 만족스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처럼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면서 하루 종일 뛰어다니면 자기들이 원하는 행복에 이르겠느냐? 무엇을 미친 듯이 하면 그 일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성공하고 행복한 일이 생기겠느냐?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으냐는 노력이나 재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 아우에게 양주가 말했다.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면 오래 살거나, 일찍 죽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없다. 자신의 본성 안에 머물면서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편안하다는 생각도 없고 위태롭다는 생각도 없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면서 오는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부터 벗어 나서 어디로 가겠느냐?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즐거워하겠다는 것이냐? 또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황제께서는 ‘깨달은 사람은 왜 사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가만히 있으면 죽은 것 같고 움직이면 기계처럼 움직일 뿐, 가만히 있는 까닭도 알지 못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까닭도 알지 못한다. 그냥 흐름뿐이다. 깨달은 사람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과 태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저절로 가만히 있다가 저절로 움직이고, 저절로 움직이다가 저절로 가만히 있는데, 누가 그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아직 ‘저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양주께서는 그건 ‘네 운명이니라.’라고 하지는 않을지?
삶과 죽음은 자연에 속하는 일이다. 사람은 오래 살기를 바라고 일찍 죽게 되면 하늘을 원망한다. 부유함과 가난함은 시간의 산물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원망하고 부유하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저절로 오고 저절로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삶과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부유하든 가난하든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를 예측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어날 일은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아무리 애써도 일어난다. 이것이 ‘운명’이다.
“사람은 백 년을 살기가 어렵다. 어쩌다 백 년을 산다하더라도 철없던 어린 시절과 정신이 혼미한 늙은 시절이 절반을 차지하게 될 것이고 또 잠자는 시간이 반이고, 깨어 있는 동안에도 흐지부지 지나가는 시간이 반이다. 나머지 시간 가운데 몸이 아프고 슬프고 괴로워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시간이 또 얼마이겠는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라. 마음속에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이 만족스러웠던 때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양주가 한 말이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먼 옛날 사람들은 삶이란 잠시 와 있는 것이고, 죽음이란 잠시 떠나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살았다.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즐겼다. 명예를 얻기 위해 본능적인 욕구를 억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앞서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다.”
내가 보기엔 옛사람들은 너무 허무맹랑하게 산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아닐까? 욕구에 따라 살았다는 말이 그렇다. 다음 말을 더 들어보자.
“만물이 살아 있을 때는 서로 다르지만, 죽으면 똑같아진다. 살아 있을 때에는 현명한 사람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있으며 귀한 사람도 있고, 천한 사람도 있지만 죽으면 똑같이 썩어 냄새를 풍기고 소멸돼 버린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명하고 어리석은 것, 귀하고 천한 것은 사람이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썩어서 냄새를 풍기고 소멸되는 것도 사람이 하고자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삶도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도 죽고자 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저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십 년을 살다 죽으나, 백 년을 살다 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다. 어진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도 죽고, 흉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 요임금과 순임금 같은 사람도 죽으면 썩어서 뼈만 남는다. 그러니‘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즐기도록 하라. 죽은 뒤를 걱정하여 이름을 남기려고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억제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양주의 입을 빌려서 열자가 한 말이다.
《열자》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다 옮길 수는 없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표상이 되는 이야기를 옮겨 보았다. 또 있다. 양주의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이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양주가 대답했다.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게 되어 있다. 아무리 영생불사하기를 원해도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 그러니 그걸 바라는 건 쓸데 없는 일이야.”라고.
이에 맹손양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삶과 죽음은 각기 자기의 길이 있다. 우리가 바라고 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을 귀하게 여긴다고 해서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을 아낀다고 해서 튼튼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살이란 기쁨과 슬픔, 얻음과 잃음, 전쟁과 평화, 평온과 어지러운 세상이 교차하는 것일 뿐으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니 무엇을 더 보자고 오래 살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빨리 죽은 것이 훨씬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빨리 죽으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야. 살아 있을 때는 삶을 받아들이면서 되어가는 대로 흘러가면 되고, 죽을 때가 되면 죽음을 받아들이고 미련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죽으면 되는 일이다. 삶과 죽음은 저절로 오는 것이야. 저절로 오는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오래 살려고 애쓰거나 빨리 죽으려고 할 필요가 없지.”
양주가 말했다.
“태고의 일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만 년 전에 있었던 일은 신화가 되고, 오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은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이 아니라 꿈처럼 느껴진다. 또 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은 더러 기억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기억되는 부분이 거의 없고, 백 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대부분 잊혀지고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본 것도 오십 년이 지난 뒤에는 기억하기 어렵다.
태고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거의 다 잊혀졌다. 그동안 많은 임금과 군주들이 세상에 왔다 갔다. 현자와 학식이 많은 사람, 바보천치와 친절한 사람, 잔인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이 왔다가 갔다.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모르고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무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기억이 조금 더 오래가고 빨리 사라지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허망한 것이 인생인 데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으며 괴롭게 살 이유가 무엇인가? 지나가면 잊힐 일시적인 것을 위해 지금 누릴 수 있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희생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후손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 죽은 뒤에 길이길이 이름이 남는다고 자기에게 좋은 것이 있겠는가? 그런 것이 죽어서 말라버린 뼈를 윤택하게 할 수 있는가?”너무 적나라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상 만물 중에 사람이 으뜸’이라고 하여, 우리는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나 사람은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다른 존재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온갖 슬픔과 괴로움, 분노와 두려움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지성이 뛰어남에도 안전하게 살기 위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과 음식, 의복과 도구, 무기들이 있어야 한다. 지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못 된다. 새는 날개와 깃털, 호랑이와 사자는 날카로운 잇발, 물고기는 아가미와 헤엄칠 능력을 갖고 있다. 어느 것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사람에게 지성이 주어진 것은 그것으로 삶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어그러뜨리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옛날 송나라에 어떤 농사꾼이 있었다. 그가 밭에서 일을 하는데, 따뜻한 햇볕이 등에 내리쬐었다. 그는 그 기분을 뭐하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따뜻한 햇볕이 등에 내리쬐는 맛을 모르고 있는 것 같구려. 내가 이 비밀을 임금님께 알려 드려야겠소. 그러면 큰 상을 내릴 것이 분명하오.”
이 말을 들은 이웃 사람들이 농부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는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하고 똑같군. 옛날에 산과 들에서 나는 열매나 풀뿌리를 먹고 사는 사람이 있었네. 그는 자기가 먹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인 줄 알고 그것들을 정성껏 장만해서 맛있는 음식이라며 마을의 큰 부자에게 진상했네. 그런데 부자가 그것을 먹어보니 쓰고 아리고 맛이 없었지. 게다가 배탈까지 나서 고생을 했다네. 부자는 엉터리 같은 놈이 자기를 놀린 것이라며, 그를 두들겨 패고는 쫓아냈다고 하네. 그런데 자네가 꼭 그 꼴이야!”
다시 《열자》로 돌아가 보자. 열자가 스승인 호구자림에게서 배우고 있을 때 스승이 말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배우려면, 먼저 그대의 행위가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그대의 그림자를 살펴보면 알 것이네.”
열자는 고개를 돌려가며 자기 그림자를 보았다. 자기가 몸을 구부리면 그림자도 굽고, 몸을 펴면 그림자도 곧게 폈다. 그림자는 스스로 형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반응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열자는 깨달았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만물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스승의 말에 따라 열자는 굽히고 펴는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외부의 상황변화에 따라 저절로 굽고 펴이게 놓아두는 것, 이것이 가장 올바른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의 논리를 믿는 엄회(嚴灰)라는 사람이 열자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도를 따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를 따르면 힘을 얻게 되나요? 재수가 좋아서 복권에 당첨되기만 해도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되면 힘이 생기는데, 구태여 도를 따라야 할까요?”
열자가 말했다.
“폭군과 독재자 가운데 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소. 그것은 그들이 부와 권세를 너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오.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고, 싸워 이긴 자가 패자를 억압하고 지배한다면 그것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 아니겠소? 그렇게 짐승처럼 행동하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지요.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위험하게 되어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열자가 또 말했다.
“기력이 왕성한 사람은 자기 힘을 믿고 교만해지기 쉽고, 육체가 강한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애쓰기 쉽다. 그런 사람들은 아직 도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도를 말하지 마라. 젊든, 나이가 들었든 성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를 말하지 마라.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설령 잠자코 듣는다고 할지라도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그에 따라 살지 못한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잘난 척 나서서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않고, 나이들고 경험이 많은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넘긴다.
명료한 인생관을 갖고 있으며, 기력이 왕성하고 감정이 안정되어 있는 사람을 찾아 그런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좋다.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도 자신이 뛰어나기보다 지혜롭고 뛰어난 사람을 찾아 잘 기용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춘추시대 말기에 살았다고 하는 열자의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략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역사가 있다. 『사기』에 따르면 열자는 정나라 재상이었던 자양(子陽)과 같은 시대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자양은 정나라 수공(繡公) 25년(기원전 398년)에 살해되었는데, 자양에 관한 고사다.
‘열자가 정나라에 살 때, 하루하루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했다. 보다 못한 그의 친구가 정나라 재상이던 자양에게 열자처럼 도가 높은 선비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선비를 홀대한다고 비난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를 도우라고 간청했다. 이에 자양은 열자에게 곡식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열자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열자의 아내가 가족을 굶겨 죽일 것이냐며 화를 냈지만 열자는 웃으며 타일렀다.
“재상은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말을 듣고 곡식을 보낸 것이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나에게 벌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오. 그래서 받지 않은 것이라오. 그래야 배부르지 않아도 안전하게 살 수 있지 않겠소?”
과연 얼마 뒤에 정나라에 반란이 일어났고, 갈피를 잡지 못한 자양은 끝내 자기가 섬기던 군주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다. 그는 이웃집 아이를 의심하고 다음 날 그 아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행동이 평소와는 달랐다. 아이가 도끼를 훔쳐 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지난 뒤에 자신의 집 덤불에서 도끼를 찾았다. 이웃집 아이를 의심한 것이 미안해 다시 아이를 유심히 관찰해보았는데, 아이를 의심할 만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부자가 되려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금을 훔쳐서 도망가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사람들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대낮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서 도둑질을 하다니 정신 나간 거 아냐?”
그러자 도둑이 말했다.
“내 눈에는 오직 금만 보였소.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소.”
이렇듯 대상을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혹은 집착이 강하면 멀건 대낮에도 구덩이에 빠지고 벽에 부딪히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튼 도가의 책이라면 왠지 서양의 ‘연금술’처럼 신비하고 난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열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억지로 꾸미지 말고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 도가의 가르침이다. 이 책은 시간 날 때 꺼내 한 페이지씩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난 철학이 담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유로움과 넉넉함 그리고 고요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는 생각이다. 새해 2022년 병인년에도 작년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 2022.1.6. 오전
처음 소개했던 ‘제자백가’중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인물이 더러 있다. 조나라 제후였던 간자(簡子), 양자(襄子)와 그리고 제자(齊子), 부자(富子), 호자(胡子), 오자(吳子) 등이 그들이다. 그들 이야기를 모두 소개할 수는 없겠고, 제자, 부자, 호자를 보도록 하자.
‘제자’라는 사람도 죽은 그 사람에게서 죽지 않는 술법을 배우고 싶어했다. 그는 죽지 않는 술법을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을 치며, 그것을 배울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철학자 ‘부자’는 제자가 한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제자가 배우려고 했던 것은 죽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죽었다. 이것은 그가 죽지 않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애기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왜 죽었겠는가? 그러니 그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런 사기꾼에게 배울 기회가 없어졌다고 한탄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열자의 스승이던 ‘호자’는 부자의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부자의 말은 옳지 않다. 세상에는 어떤 원리를 알고 있지만 그 원리를 자신의 삶에는 적용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원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원리를 삶에 적용시켜 사는 사람도 있다. 알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과 실천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위(衛)나라에 뛰어난 수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발견한 공식과 원리를 남기고 죽었지만 자식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원리를 탐구하던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것을 이용해 여러 문제를 풀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 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적용하는 법을 몰라서 죽었을지라도 그는 얼마든지 죽지 않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