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글 100호를 찬찬히 읽다 무릎이 탁 쳐지는 글을 보았습니다. 미래의 언어 규범은 어떤 형태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 글쓴이의 소신과 관련 기관의 견해들을 담은 내용입니다. 우리 말글을 다루는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쓴이 고길섶 선생은 1990년대 초반 이오덕 선생과 말글의 사회성에 대해 열띤 논쟁을 했던 분이지요. 당시 이오덕 선생은 외래말, 고상한 말을 무분별하게 생산하는 지식인은 우리말 창조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했고, 고길섶 선생은 시대적 변화를 따르지 않고 언어의 불변성을 고집하는 입장은 언어의 생명력을 꺾는 일이라고 반박했지요. 고길섶 선행의 진보적인 언어관을 여기 소개합니다. 이런 글을 접하다 보니 이번 말과글이 참으로 알찬 내용으로 채워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당시 이오덕과 고길섶 선생의 논쟁 내용은 자료를 확보하는 대로 이곳에 올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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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언어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하자
글쓴이: 고길섶, 문화비평가, 언어연구가
1. 새로운 문화환경의 변화와 언어정책
2003년 8월 18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언어정책 60년 평가와 언어정책 개혁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언어정책 토론회가 열렸다.
언어정책 토론회를 가지면서 언어정책 개혁과제들을 제시하게 된 계기는 2003년 들어 문화관광부가 내놓았던 ‘국어발전종합계획’ 및 ‘국어기본법’ 제정의 추진에 있었다. 우리는 이 안들을 검토하면서 기존 국어정책의 역사를 차지해온 억압․규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읽어내었고, ‘국어기본법안’에 대해서는 성명을 내어 비판의 입장을 취하였다.
더 이상 국어정책이 ‘올바른 국어’론이나 규범주의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더군다나 규제 위주의 법령 제정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어정책과도 우리와의 대화에서 규범주의를 위한 국어기본법안이 아님을 설명하고 국어정책 추진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만들기 위함임을 강조하였다.
이런 설명은 우리가 비판하고자 했던 취지하고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우리는 언어정책에 대해 적극적 개입을 하기로 하고 ‘언어정책 개혁’을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한 것이다.
2004년 6월 국회에 제출한 ‘국어기본법안’은 ‘올바른 국어’론이나 규범주의 논리가 거의 삭제되었다. 나는 발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어문정책․국어정책은 과도할 정도로 존재해 왔다. 우리말 도로찾기 정책, 문맹퇴치 정책, 어문규정(한글맞춤법, 표준어규정, 외래어표기법,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정책, 한글전용 정책, 국어순화 정책, 국어과교육 정책, 국어사전 편찬 정책 등. 그것은 민족국가의 형성과 관련하여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 호출용으로서의 ‘어문정책’ ‘국어정책’은 존재해 왔으나 ‘언중(言衆)’을 위한 ‘언어정책’은 존재해 오지 않았다. 또한 자발적 시민참여 및 민주주의의 진전과 인터넷 시대의 도래 등 언어 사용 주체성의 형성과 그 환경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가 촉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개념의 어문정책․국어정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과 내용을 갖는 언어정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이라는 요구 속에서 ‘올바른 국어’ 및 어문규범 논리가 지배적 정책기조로 일관되어 왔는데,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꾀해야 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이것을 일단 ‘개혁적 언어정책’이라고 명명한다.”
“우리의 어문정책은 어문규범의 논리를 ‘올바른 국어’라는 미명하에 언어사용의 윤리성으로 주입해 왔으며 또한 그 장치들을 만들어 오는 데 초점을 두어 왔다. 이것은 언어에 본성적으로 내재한 표현 및 소통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행위라는 성격을 배제 및 억압하고 언어를 ‘국민’이라는 코드 즉 ‘국어’라는 코드로만 획일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우리 말글을 책임지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국어’라는 코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다양성과 차이의 경험들을 통해서이다. 이제 언어정책은 획일화된 어문규범의 논리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언중들의 문화적 다양성과 감수성의 차이에 기반한 창의적인 언어의 생성, 표현, 소통 능력들에 봉사하는 것으로 계획되고 수행되어야 한다.
요컨대 개혁적 언어정책이란 근본적 차원에서 언어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그것은 국어 계획자들이 내놓는 어문규범 획일화 혹은 ‘올바른 국어’ 논리 중심에서 언어 사용자들의 자유로운 언어시장 윤리 중심으로의 이행을 함축한다.”
요컨대 최근 10여 년 동안 문화환경은 급속하게 변해 왔는데 국어정책은 제자리였고, 문화정책도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데 국어정책만 제자리에 있으려 한 것이었으니, 그를 벗어나 시대의 흐름에 맞게 언어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전통적으로 사용해온 ‘국어정책’ ‘어문정책’ 용어를 ‘어문정책’으로 바꾸는 것도 그 하나이다).
2. 변화되고 있는 문화관광부의 언어정책
문화관광부는 지난 6월 ‘창의 한국 - 문화비전’을 새로운 문화정책의 방향으로 내놓았는데, 그 안에는 국어정책도 포함하여 ‘새 언어문화의 형성’이라는 꼭지로 언어정책의 변화를 예고하였다. 언어정책의 전환을 주장해 왔던 나로서는 크게 관심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새 언어문화의 형성’은 기존 국어정책 및 언어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보수적인 어문규범 운용, 언어 자원의 확충 소홀, 지역어(방언) 존립 위기, 지속적인 영어공용화론 대두, 국어사용 능력 부진, 언어환경 변화에 따른 언어정책 변화 미흡, 국어훼손 환경에 대해 지나친 보수주의 사고 지배, 국어 유산 정리 및 활용 부족.”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기존 어문규범 운용을 보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며, 언어환경 변화와 지역어(방언)에 대해 적극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어문규범이 환경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여 규범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기면서 국민의 언어생활에 불편을 초래.
- 어문규범의 보수성으로 인해 규범적인 태도와 현실언어의 태도가 거리가 있어 국민의 언어생활에 불편을 초래.
- 어문규범이 국민 언어생활의 편리함과 문화유산의 근간으로서 우리 언어의 보전․발전에 기여해 나가는 큰 틀의 언어정책에 장애로 작용할 경우 우리의 언어생활은 규범과 현실의 충돌로 인한 혼란이 계속될 것이므로 언어현실에 대한 조사를 토대로 현실에 맞게 보완해 나갈 필요가 있음.
나. 새로운 어휘와 다양한 언어표현을 발굴하지 못함으로써 지식 창출에 필요한 풍부한 언어가 적고, 국어학 이외의 부문에 포괄적인 활용 가치를 높여주지 못하고 있음.
- 기존의 국어정책에서 문학 및 번역․통역 등 국어학 이외의 부문을 포괄하고 있지 못해 폭넓은 연계가 부족함.
- 언어자원을 활용하여 각종 창조적 활동(문학, 음악, 무용, 문화행사 등)의 계기를 만들어 주는 기능 미흡.
다. 국민의 국어생활과 함께하는 살아 있는 어문정책으로의 전환 시급.
- 국민의 언어 사용 실태를 정기적으로 파악하고, 언어문화의 다양성 제고 차원에서 지역어를 보존․발전시켜 나가며, 정보화․세계화에 따라 새로이 생성, 유통되고 있는 말들에 대한 자료집 또는 사전을 편찬해 나감으로써 국민들의 언어 실상을 정책에 반영해 나가야 함.
이어서 문화관광부는 비전 및 목표를 다음과 같이 두었다. “‘규범주의적 무질서’에서 ‘질서 있는 다원주의’로의 언어정책 틀 전환, 문화적 창의의 기반인 ‘어휘’ 등 언어자원의 확충, 국민의 언어문화 개선, 국어 문화유산의 정비와 축적, 지역어의 활용촉진, 범민족적 모국어 중심축 형성 및 국제적 활용성 확대, 언어처리의 정보화.”
문화관광부의 언어정책 변화 조짐은 여전히 문제점이 있는 것과는 별도로 정책변화의 틀을 잡는 초기조건과 상황으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새로운 제도로서 ‘어문규범 영향평가 제도 도입’을 위한 시도는 지금까지 관념적이고 강박관념에 젖어 있던 통념을 깨고 현실적인 언어시장에 기반하여 실제적인 언어문화 자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3. 정책전환 실천을 위한 장애와 조건들
그런데 언어정책을 전환하자는 게 도대체 뭔가. 아주 간단히 생각하면 된다. 우리말의 다양한 변이들과 창조적 생성들을 억압․거세하지 말고 자유롭고 풍부하게 하여 한국어의 문화자원으로 확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어의 제국주의적 확산에 대항하는 우리말의 경쟁력 확보방안이 될 수 있다. 사라져 가는 우리말을 걱정하고 판치는 외국말들을 경계하느라 동원되는 ‘올바른 국어’론이나 규범주의 이데올로기는 되레 우리말을 더 왜소하고 숨막히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아햏햏’이라는 인터넷 신조어를 쓰면 좀 어떤가. ‘아햏햏’은 의미의 모호성과 다양한 사용방식 때문에 그 말 사용의 창조적․철학적 가능성의 길이 엿보인다. 이런 말들이 자꾸 생겨야 어휘력과 언어적 감수성이 커져 우리말의 경쟁력이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오세요’ 대신에 ‘오셩’을 쓰면 좀 어떤가. 긍정적이고 역동적으로 생각하자.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국어 계획자들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언어 사용자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국어 계획자들에 의한 규범적 논리가 우리들의 언어생활을 규정짓는 게 아니라 언어사용자들 스스로가 언어시장의 자율적 언어윤리로 언어생활을 창출하도록 해야 한다.
문화관광부의 정책변화 조짐은 이런 맥락에서 긍정적이다. 실제로 문화관광부도 새로운 언어
문화환경을 좇아가지 못하는 언어적 보수주의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문화관광부는 ‘새 언어문화 형성’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국어 훼손 현상을 국민윤리의식과 국어능력 저하로 비약하거나 공적 영역에서의 바른 국어생활 강조로 창의적 언어활동을 저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맞는 말이다. 새로 제정할 국어기본법안이 ‘어문규범 영향평가 제도’의 시행을 명시한 것은 언어정책의 새로운 변화 및 방향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한글맞춤법 규정, 표준어 규정, 외래어표기법 규정 등 어문규정에 대해 영향평가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문규범 영향평가 제도 도입에 대해서는 현재 연구중인데, 어문규범과 언어현실의 차이․괴리․부적절성 등에 대해 문화적 전략으로 모색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당한 반발이 있을 거라는 데 있다. ‘올바른 국어’론자들이나 규범주의자 집단이 크게 반발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인데, 사실 그들은 이미 굳어진 ‘국어’에 대한 강박관념에 젖어 있기 때문에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중들이 더 이상 그들의 논리에 따라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낡은 국어관에 찌들어 있는 그들 집단이 아니라 풍부한 언어생활을 창출하며 우리말의 경쟁력과 문화자산력을 키우는 언중들이다.
물론 언중들 가운데도 낡은 국어관으로 찌든 사람들이 많다.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언어정책의 변화는 문화의 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임을 생각할 때 무엇이 더 우리의 힘인지를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창조적 언어 사용의 활성화가 언어 경쟁력이고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