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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 / 왜 벽일까? (사38:1-8)
군대에서 저녁에 돈까스가 나왔는데 일인당 2개씩이 배급되었습니다. 다들 환호하는 중에 대신 돈가스 소스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식병이 실수로 소스 대신 돈까스만 두 박스를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이에 병사들이 불평하기 시작하자 고참이 한 마디 했습니다. ‘군소리 하지 말고 먹어. 지금쯤 어느 부대 애들은 아마도 소스만 두 개씩 먹고 있을테니까.’
한 쪽만 보니 불평하던 일도 다른 쪽까지 보고나니 감사할 일이더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린 한 쪽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쪽 편도 늘 고려해야 합니다. 매사에 그렇겠지만 특히 믿음에 있어서는 더 더욱 그러합니다. 다른 쪽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3.1절입니다. 당시 친일파를 제외한 우리 민족 모두는, 특히 독립군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일제의 수탈과 강제 징용 및 정신대 등과 731부대에서 행해진 생체 실험 등은 지옥 그 자체와도 같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미군에 의해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망하고 우리나라는 독립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을까요? 일제가 언제 망할지를, 우리나라가 어떻게 독립할지를.....
군대에 막 입대한 신병들에게 고참들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꾸로 매달려도 시간은 간다.’이고, 둘째는 ‘국방부 시계는 느린 것 같아도 멈추지는 않는다.’입니다.
‘지금을 견디라.’는 교훈입니다. 군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설사 괴롭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제대하는 날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 이렇게 얘길 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그런데 시간이 가고, 이 또한 지나가는 것은 좋은데, ‘그 다음’이 문제가 됩니다. 이 또한 지나갔는데, 그 다음이 산 넘어 산이라면요? 호랑이를 피하려다 여우를 만난다면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꼭 믿어야 할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문을 닫으실 때면 반드시 다른 문을 열어 놓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삶에 문제가 주어질 때에 하나님은 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 안에서 ‘이 문제 또한 지나가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길이 막힐 때면 하나님은 다른 길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린 믿음으로 내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보면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말로 시작 됩니다.
‘그때에’라는 말은 원문에는 ‘그러한 일들이 있을 때에’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 본문에서는 ‘뜻밖의 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다윗과 솔로몬 이후 영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매우 암울한 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왕들은 하나같이 사악했고 백성들은 우상에 빠져 살았는데, 이런 와중에 히스기야가 왕으로 등극했고,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조상들이 세운 우상을 파괴하는 일을 했으며, 황폐해진 성전을 수축하고, 하나님 전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특히 앗수르의 산헤립 장군이 보낸 선전포고문을 들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여 18만 5천명 적군을 격퇴시키는 놀라운 승리의 기적을 이끌어낸 왕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이 회복되었고, 나라는 엄청난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제야 좀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으려니 하는 바로 그 때!
‘이때’가 바로 본문 1절에서 언급된 ‘그때’인 것입니다.
주경가들에 의하면 당시 히스기야의 나이는 39세로 추정된다 했는데,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예고되었습니다. 어의는 물론 하나님의 사자인 이사야마저도 찾아와서 전하는 메시지가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고생 고생하다가 이제사 인생이 좀 풀리는 사람을 향해 우린 ‘이젠 꽃길만 걸으라.’는 축하와 덕담을 건냅니다.
실제로 천신만고 끝에 태산을 넘는 순간, 시원한 내리막길에 꽃길만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를 보세요, 우상과의 힘든 싸움을 이겨냈고, 강대국과의 목숨 건 싸움에서 승리했는데, 정작 엉뚱하게도 질병으로 인해 죽게 된 것입니다.
기대했던 꽃길 대신 또 다른 가시밭 길, 황무지가 앞을 가로막고 섰는 것. 이게 인생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전하는 ‘그 때에’라는 이 한마디에는 이렇듯 인생의 슬픔과 기가 막힘과 분노와 절망이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걸까요?
왜 믿으려고 애를 쓰며 사는데 계속 힘들고 어렵고 문제만 생기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도 이젠 좀 편하게, 부요하게, 건강하게 살게 해 주시면 안 되는 건가요?
묻습니다. 이 시간까지 살아오시면서 여러분에게서의 ‘그때에’는 언제였습니까? ‘그때에’ 어떤 일들이었는지요?
예기치 못한 문제에 휘말린 히스기야의 모습은 오늘, 상처투성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번, 두 번, 그러기를 여러 번 겪다보니 이젠 믿으면서도 불안하고 기도하면서도 개운치가 않게 됩니다. 또 어떤 일이 닥칠지가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에 따른 반응도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한 부류는 결국 믿음이 식고 기도가 중단됩니다. 그렇다고 안 믿겠다거나 기도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믿음의 열정과 기도할 의욕을 잃어버린 채, 어느 복음성가 가사처럼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하며 살아들 갑니다.
반면 다른 한 부류는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상황을 표현할 말로 소위 담판이라 해도 좋고, 애걸이라 해도 좋습니다. 마치 여리고성에서의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이 성에서 패배해야만 했던 여호수아가 그랬듯이, 우린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를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라고.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청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믿음의 사람에게는 대신 채워지는 것 없이 잃어버리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컵 안에 물이 줄어들면 대신 그 자리에 공기가 채워지듯이 성도의 빈자리, 빈 그릇, 빈손은 하나님이 채워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젠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다!’가 여러분의 믿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세요!’가 여러분의 기도되시기를 빕니다.
다시 히스기야를 보세요. ‘너는 죽을 것이다. 유언이나 준비하라.’니요? 이런 상황이 저와 여러분의 상황이라면 우린 어땠을까요?
그런데 이런 충격과 낙심되는 상황에서 ‘그때에’ 히스기야는 어떻게 반응했던가요?
2절 말씀을 보세요.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필 벽일까요?
첫째, 벽을 향하였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는 등을 돌리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의지하던 선지자 이사야조차 뒤로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여 돌아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시면 무엇을, 어떻게 기도했다고 했습니까?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 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2절과 3절을 보면 ‘여호와께 기도하여’ 라는 말과 ‘심히 통곡하니’ 라는 말이 동격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도는 통곡이다!’
그렇다고 우는 게 기도라는 말은 아닙니다. 원문에서 ‘통곡’에 해당하는 말은 ‘베키’로, 그냥 ‘울었다.’는 뜻도 있지만 ‘비통해하다.’는 의미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도의 정의가 내려집니다. ‘기도는 치열함이다.’라고.
이미 성경에는 치열하게 기도를 한 사람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6번에 걸쳐 탄원을 했습니다.
한나 역시 자식을 낳기 위해 치열한 기도를 했습니다. 주시면 감사하고 안 주시면 할 수 없구요가 아닌, 반드시 아들을 주셔야 한다며 남들 보기에 미친 듯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음으로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세상에서의 고통과 가난과 괴롬과 아픔이 어떠할지를 잘 알기에 그분들은 결코 물러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 역시도 그래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기도할 때면 내가 왜 응답을 받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응답 받지 못하면 이 땅에서 받아야 할 고통과 괴롬이 과거에 어떠했으며, 지금은 어떠한지를, 또 앞으로 어떠할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기에 기도에 응답받지 못하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현실의 고통과 수고와 괴롬이 어떠할지를 새삼 되새기면서, 그렇기에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통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해 주셔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나를 이기게 하지 말고, 나의 기도가 문제를 이기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에 마음이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군중들로 인해 저 멀리 떨어져 계신 예수님을 보며 여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예수님을 놓치면 나의 남은 평생은 혈루증에 시달리며 끝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내 고통은 오늘로 끝날 것입니다.’
여인은 믿었고, 믿은 대로 행동 했습니다. 그리고 나았습니다.
이런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이런 소원이 여러분의 기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통곡하며 올린 기도, 치열하게 드린 기도가 히스기야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가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그리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네 수한을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보호하리라.’고.
이처럼 본문은 치열한 기도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뜻밖의 환난을 당하는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는 ‘그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왜 벽일까요?
벽에는 문이 없습니다. 벽은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벽은 인생의 막다른 길을 상징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히스기야의 앞을 막아선 것도 이런 벽이었습니다. 그것도 절망의 벽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 벽을 향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믿음이 없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똑같은 햇빛을 받아도 진흙은 굳어지지만 초콜릿은 녹아 흐물흐물해 지고, 똑같은 햇빛을 받지만 산 나무는 더욱 싱그럽게 자라지만 죽은 나무는 바싹 말라버린다고 했던 말을...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문제에 끌려 다니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내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 될까요?
일전에 영화로도 나왔습니다만, 죤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크리스천’이란 사람이 ‘소망’이라는 친구와 함께 천성을 향해 가던 중에 ‘절망’이라고 하는 거인을 만나 감옥에 갇흰 채 무서운 매질을 당했습니다. 거의 초주검이 됐을 즈음 절망이 와서 독약이 든 잔을 내밀며 ‘고통을 끝내려면 마시고 죽으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거절하자 절망은 ‘날이 밝는 대로 뒷마당에 끌어내어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날 밤 크리스천은 오늘이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하며 자살하려고까지 합니다. ‘그때에’ 소망이 만류하며 말합니다. ‘당신에게는 성안에 있는 자물쇠는 어느 것이나 열수 있다는 보장을 받은 언약의 열쇠가 있지 않습니까?’
그랬습니다. ‘언약의 열쇠’를 가졌음에도 너무 낙심하고 절망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둘 사람은 언약의 열쇠로 감옥을 열고 절망의 성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열쇠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이미 그런 열쇠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도들에게 있는 언약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기도가 만사를 해결하는 열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막힌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고난 중에 있다면 ‘크리스천’인 우리가 할 일이란, 성령께서 주시는 소망의 말씀에 대해 우리 모두는 열린 귀가 되고, 열릴 눈이 되고,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믿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믿음만 있다면 예수님께서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약속하신 것들이 내게도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이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으세요.
빌립보서 4장 7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이십니까? 그렇다면 절망의 벽이 아무리 높고, 고난의 벽이 아무리 두껍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에게는, 또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무너져라!’고 외치는 함성과 함께 여리고 성이 무너졌듯이 그렇게 우리를 막아선 모든 벽 앞에서도 벽들이 무너지고 허물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벽일까요?
주경가들에 의하면 그 벽은 성전 쪽을 향한 벽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형편과 심정이라면 히스기야의 믿음으로는 당장에라도 성전으로 달려가 울부짖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편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질병이 그를 성전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히스기야는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떻게요? 마음으로, 믿음으로, 그리고 기도로.....
벽이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히스기야의 믿음은 그를 벽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눈물을 보셨다니요?
그렇습니다. 히스기야는 벽 너머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모했지만, 벽 너머에 계신 줄로만 알았던 하나님 역시 벽을 넘어 벽 안쪽의 히스기야가 있는 자리로 와 계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28:16을 보면 광야를 헤매다 돌 배게 베고 자던 야곱이 깨어나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러나 이젠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갈 수 없어도 하나님은 이미 내게 와 계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져야 그게 진짜 믿음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져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팽이를 돌리다 보면 중심이 흔들리는 팽이는 오래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왜 우리 인생이 흔들리고 뒤뚱거리다 넘어질까요? 믿음의 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연을 날려 보면 연줄이 끊어지면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은 바람이 부는 대로 사방팔방으로 나대다가는 땅에 곤두박질을 치게 됩니다.
그래요. 우리 인생이 그토록 힘들고 때론 불만스러웠던 이유도 예수님과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말씀의 끈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축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인생이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더는 삶이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해 히스기야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절망 앞에 섰을 때, 인생의 모든 가능성과 문이 닫혀있을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런 히스기야를 향해 하나님도 사랑과 기적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살게 해 달라는 하나의 기도만 했을 뿐인데도 하나님은 두 가지 축복에 하나의 증거까지 더해 주셨습니다.
첫째,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둘째,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셋째,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증거로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더 이상은 내 인생에 길이 없다 하지 마세요. 혹 그런 상황을 만나거나 그런 형편이 닥쳤다면 오늘 본문에 나온 히스기야를 생각하세요. 길이 막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세 번째 축복을 보세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미 앞으로 진행된 해 그림자를 10도나 뒤로 돌리셨습니다. 천문학에서 해 그림자 10도라 함은 대략 40분 정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하나를 위해 지구를 거꾸로 되돌리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이 말인즉 하나님은 당시 세상을 히스기야 중심으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정과 직장과 세상에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게 해 주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 해결의 길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믿으세요.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불가능은 가능해 집니다. 고난은 변해 기쁨이 됩니다. 내가 문제를 일으켰을지라도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앞에 있는 벽은 어떤 것입니까?
이제껏 여러분이 소망하고 소원했던 것들은 무엇입니까?
벽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으세요. 동시에 벽 안쪽으로 내게 찾아와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그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그리되면 그 다음에 있을 일들은 하나님의 축복뿐인 것을 믿고 인생의 벽 앞에서 히스기야처럼 그렇게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오늘은 교회에서 모이지 않고 각자 있는 처소에서 예배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과 심정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부터, 그리고 모든 환난으로부터 여러분을 지키고,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