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소장
이명우
파란시선 0156
2025년 2월 2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42쪽
ISBN 979-11-91897-99-9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내 급여는 작년과 똑같다
[관리소장]은 이명우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지출명세서」 「관리소장」 「이티」 등 52편이 실려 있다.
이명우 시인은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났고, 201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 [관리소장]을 썼다.
최근 인간이라는 범주와 영역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것을 벗어난 세계의 모습을 새롭게 재구성해 보기 위한 진지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시노하라 마사타케는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정리를 하면서 진실한 세계에 이르기 위한 중요한 단서로 모든 지나간 것들이 남긴 ‘흔적’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흔적이야말로 확실성의 유일한 표식이라는 것이다. 시 「각질의 힘」을 비롯해서 이명우 시인의 시집 [관리소장]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제의 공간이지만 오히려 어떤 흔적도 허용하지 않는 도시의 ‘관리소장’으로 살아가는 시인이 역설적으로 이 같은 ‘흔적’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도시인’이라는 존재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이다.
도시의 기능이 문제없이 돌아가도록 만들지만 정작 그 뒤에 가려져 있던 ‘관리소장’으로서 이명우 시인이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핵심은 바로 도시가 거부한 것들의 흔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직장인으로서의 그는 다른 사람들의 “욕설을 넙죽넙죽 받아들”이거나(「욕설의 한 연구」), “변덕이 심한 날씨”처럼 시시때때로 바뀌는 “상사의 지시 사항”을 말없이 따를 수밖에 없다(「변곡점」). 수직적인 구조와 계약으로 맺어진 종속 관계를 통해서만이 자본은 축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생활인의 삶 가운데에서도 그는 자신을 포함해 도시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들에 끊임없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중앙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처럼 현실에서의 쓸모는 이미 멈춘 채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각자 나이를 먹지 않는다」). 역사적인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 유물들은 현실에서라면 결국 도시가 지정해 둔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갇혀 있을 뿐이다. 시인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에 시선을 던짐으로써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삶의 흔적들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것들에 새겨져 있는 흔적을 더듬어 가는 시인은 도시의 소음 뒤로 감추어진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다니”는 것 또한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잠복기」). 「누가 저렇게 많은 소리를 허공에 매달아 놓았던가」나 「공황장애」, 「물의 길」 등 시집 [관리소장]에서 ‘소리’에 주목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명우 시인을 따라 도시의 모습 뒤에 감추어진 흔적들을 따라가 보는 일이 매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도시의 길을 따르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무엇보다도 목표를 거부하며 에둘러 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흔적을 남기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작은 숨결까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일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는 이미 늦은 채, 도시의 길에서는 벗어난 채로 말이다. (이상 남승원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그의 시는 허먼 멜빌의 명작 「필경사 바틀비」를 생각나게 한다. 현대사회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무리 속에서 얼마나 쓰임새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을 때 그는 내쳐진다. 그의 시에는 때로 무시되고 경멸당하며 불안한 하루를 견디는 소시민의 애환이 담겨 있다. 해서 성냥곽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이름 대신 101호, 205호 혹은 303호로 불리며 익명의 삶을 사는 현대인의 삶을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곳은 모든 것이 수입과 지출로 계산되는 자본의 시간 속이다. 화자는 그 속에서 아파트 관리소장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소시민의 모습은 쓸쓸하고 슬프다. 그는 단지 몇 명밖에 없는 최소 단위의 직장에서 관리소장이라는 직책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전체 직원이라야 손으로 꼽을 정도의 그 직장도 불화가 있고 갈등이 있고 상하의 위계질서가 있고 무엇보다 자본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는 말한다. 그곳은 모든 것이 수입과 지출로 계산되는 곳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내뱉는 말도 숨도 수입과 지출로 계산될 것이라고. 그는 또 말한다. 지출은 돈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오늘치의 말의 지출이 끝나”야 퇴근을 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라고. 고단하고 쓸쓸한 말들의 일터에서도 때로는 “오늘을 지출하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365일을 되감으면 내일의 할 일이 나”오는 날들이었다고 자신의 생을 정리하기도 한다.(「지출명세서」) 그날이 그날인 생은 사실 치욕과 오욕의 연속이었지만 그 속에서 재미와 보람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고.
그렇다. 저기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른 빌딩 속, 밤낮으로 환히 불 켜진 사무실에는 창백한 가장들이 상사의 눈치를 흘끔거리며, 자꾸 밀려나는 책상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보이지 않는 벼랑 끝에 아슬히 붙어 있을 것이다.
―이경림 시인
•― 시인의 말
관념이 빠져나갔던 몸에서 새싹이 하나씩 자라고 있다.
그렇게 시를 쓰는 내 모습이 낯설다.
•― 저자 소개
이명우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났다.
201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달동네 아코디언] [관리소장]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하루가 백내장에 들 때 – 11
지출명세서 – 14
각자 나이를 먹지 않는다 – 16
혼술 – 18
직업 – 20
블랙홀 – 22
공간 놀이 – 24
풀린 상자들 – 26
욕설의 한 연구 – 28
누가 겨울 강에 지붕을 씌워 놓았나 – 30
고무장갑 – 32
변곡점 – 33
누가 저렇게 많은 소리를 허공에 매달아 놓았던가 – 36
눈치 – 38
제2부
관리소장 – 43
군침 도는 자서전 – 46
소문들 – 48
나비 – 50
착란 – 52
히터펌프 – 53
굽은 허리는 예의를 풀지 않을 때 – 56
백내장 – 58
이티 – 60
상속 – 62
낙서의 여정 – 64
장롱은 오래된 기억을 배당받지 않는다 – 66
제3부
노예 계약 – 71
카트의 힘 – 74
수술대기실 – 76
반사경 – 78
사과 – 80
각질의 힘 – 82
풍경의 소란 – 84
차단기가 내려갔다 – 86
연장 근무 – 88
악어 지갑을 샀다 – 90
가오리 – 92
가면 – 94
제4부
불면증 – 99
공황장애 – 102
밤손님 – 104
소리들 – 106
공시(共示)적인 기호 – 108
잠복기 – 110
수저통 – 112
물의 길 – 114
저 메뉴판이 나를 정리하고 있다 – 116
신령 모시기 – 118
공기 커튼 – 120
저울 – 122
허공의 주식(主食)은 소리다 – 124
씨족의 번식은 바람의 속도보다 빠르다 – 126
해설 남승원 허물어진 도시의 흔적들 – 127
•― 시집 속의 시 세 편
지출명세서
지출은 돈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치의 말의 지출이 끝나면 퇴근을 한다.
오늘을 지출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매주 월요일 회의 시간에는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화장실 청소가 잘되지 않았어요.
직원들과 유기적인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직원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요.
그것이 오늘의 지시 사항이 된다.
작년의 지시 사항과 올해의 지시 사항이 똑같다.
365일을 되감으면 내일의 할 일이 나온다.
내뱉은 말이 거절당하면 가난할 때도 있다.
내 급여는 작년과 똑같다.
5%의 인상안을 올렸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작년도 급여와 지금의 급여가 똑같아서 좋다?
그 급여 항목을 보고 오케이 사인을 한다.
이제 신문을 보면 제목만 읽어도 무슨 뜻인 줄 알게 되었다.
말하지 않아서 좋다.
오늘이나 작년이나 그날이 그날이어서 좋다.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이 밥을 먹는 동안 머리카락이 반백이 되었다.
또 변한 것이 있다면 날씨다.
시간당 100밀리 비가 쏟아진다는 것이다.
비바람이 우산을 뚫고 들어오면 내 마음도 끝없이 펄럭인다.
빗줄기가 파도치는 거리에는 가로등 하나가 나를 인도하고 있다.
말을 하지 않을수록 왜 나는 배가 고픈가.
날은 날마다 저물고
내가 잠자는 동안 시간은 밤새도록 어둠을 벗긴다.
나를 감출 곳은 어디에도 없다. ■
관리소장
그의 몸에 천둥이 들어 있을 줄 그는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그들에게 얻어먹고 자란 천둥소리가 그때 그의 몸속에서 요동쳤다고 한다.
벼락을 수십 번 맞고 익은 대추 알처럼 그때 그의 얼굴은 붉게 타고 있었다고 한다.
직원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흥분된 목소리는 그의 몸이 스펀지처럼 다 빨아들였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의 팔다리는 덜덜덜 떨면서 그들을 향해 온몸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바람이나 공기나 눈에 보이지 않듯이
그의 소리는 아무리 요란해도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소리는 한 번도 변하지 않고 관례처럼 내려온 것이라 한다.
그들은 늘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관리사무소 급여는 내가 내는 관리비로 받잖아!
도무지 소장이 관리비를 얼마나 해 처먹은 거야!
계단 석재 공사비를 얼마나 부풀려서 해 먹었는지 알 수 없잖아!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천둥소리가
어느 날부터 그의 몸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한다.
그 소리는 그의 몸을 빠져나오려고 구멍이란 구멍을 다 찾아다니다가 이리 부딪고 저리 자빠지며 요란을 떨었다. 어느 날은 태풍에 자동차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마치 쓰나미가 지나가는 것처럼, 그때마다 그는 그 천둥소리를 홀로 맞섰다고 한다.
가끔 가쁜 숨을 쉬면서 그의 입에서 그들의 주장을 맞서는 소리가 나왔지만 그들의 소리를 막기에는 너무 힘이 없어 직원들조차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늘 죽을힘을 다해 그들을 막았지만
그들은 태풍을 조정하는 마술사처럼 그의 약점을 잘 다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는 낙엽처럼 바람 부는 대로 떠돌다가
돌에 나무에 부딪히다가 모서리에 숨어서
천둥이 잠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말했다. 자신의 몸에서 자라나는 천둥소리를 없애는 방법이 있다고.
사람이 죽으면 천둥소리도 사라진다고.
그러면 이생의 사표도 자동으로 수리된다고.
다만 두려운 것은 그 같은 관례가 계속되는 것이라고.
그의 몸은 천둥소리로 가득해 여러 번 사표를 제출했지만,
수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몸에서 자란 천둥소리를 막기에는
몸이 너무 늙었다고 중얼거렸다. ■
이티
세면대에 얼굴을 꺼내 놓는다.
물이 출렁거리면서 얼굴을 다 받아들이고 있다.
두 손이 비누를 칠하고 얼굴을 문지르고 있다.
두 손이 미끄러지다가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꺼내 놓는다.
두 손이 코를 꺼낸다.
두 손이 입을 꺼낸다.
두 손이 두 눈을 꺼낸다.
두 손이 얼굴을 만지니 손님과 주고받았던 웃음 하나가 나온다.
두 손이 얼굴을 만지니 우글거리던 주름이 앞다투어 나오고 있다.
두 손이 얼굴을 만지니 고성과 삿대가 나온다.
두 손이 얼굴을 만질수록 얼굴은 없고 뼈만 남아 있다.
세면대에 물이 떨어진 것들을 본다.
어제까지 생기지 않았던 반점이 툭 떨어져 있다.
목에서 검버섯 하나 자라고 있다.
저건 내 얼굴이 아니다.
저 물 안에 비밀이 숨겨져 있나.
저 눈꼬리에 저장했던 주름이 무슨 말을 하려다 멈춘 것일까.
저 속에 떨어진 표정이 왜 이글거리고 있을까.
또 얼굴 하나가 물 위로 떠오른다.
몰래 숨겨졌던 얼굴이
미끄러지다가 이리저리 펴지다가 다시 우글거린다.
세면대에 물을 내린다.
물이 회오리치면서 주름들을 다 지우고 있다.
얼굴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