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효(阿孝)’
《삼국사기》〈남해왕 조〉에 있는 기사다.
“왕 5년(서기 8년)봄 정월에 왕이 탈해(脫解)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맏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탈해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때 나이 62세였다. 성은 석(昔)씨이고, 왕비는‘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아효’는 신라 제2대 남해(南解)차차웅의 딸이자 박혁거세 거서간의 손녀로서 전혀 굴러온 돌인 석탈해에게 공주일 때 시집가서 나중에 탈해이사금의 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더 상세히 석탈해와 아효 사이에는 아들 구추(仇鄒)가 있었다. 석탈해는 서기 80년에 죽었다. 아효는 순장했다고 하여 석탈해와 같이 묻혔다고 한다. 아들 구추는 왕이 되지 못했으며, 유리(儒理)-파사(婆娑)-지미(祗麽)-일성(逸聖)-아달라(阿達羅)로 이어지는 이들은 박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다. 9대째 가서 탈해와‘아효’의 손자인 벌휴(伐休)가 왕이 되었고, 10,11,12대까지 이어지다, 13대에는 김알지(金閼智)후손인 미추(味鄒)가 14.15.16대는 다시 석씨 후손이 왕위를 이었으니, 탈해와‘아효’의 후손이 길게 왕위를 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신라는 왕이라는 명칭을 6세기 초 법흥왕 대 와서 썼으며, 거서간·차차웅에 이어 3대부터 16대까지는 이사금으로, 그후는 마립간으로 불렸다. 신라의 국명은 22대 지증왕 4년(서기 503)에야 정식 국호가 되었고, 그전은 사라·서로·계림·서라벌 등으로 불렀으며 이때부터 왕이라고 칭했다.
가야의 시조이자 김해김씨 시조인 김수로는 김해허씨 시조 허황옥과의 사이에 10남 2녀를 두었다. 허황옥은 2명의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었고, 아유타국에서 데려온 신하들 딸들을 수로왕의 뒤를 이은 왕들의 왕비가 되게 하였다. 또 김수로왕은 158세, 허황옥은 157세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마치 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철의 제국 가야의 첫사랑, 아효」라는 책은 소설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배상열’작가의 야심작으로, 그는 1963년 경북 달성에서 태어나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다 우리 역사에 빠져서 역사서와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로 조선 시대를 중심으로 교양서인 『난중일기』『조선비화』『왕자의 눈물』과 역사소설인 『동이』『풍운』『북벌영웅 이징옥』『이순신 최후의 결전』『이순신 두 번 죽다』『반역, 패자의 슬픈 낙인』등을 발표했으며, 현재는 서울창동에 있는 ‘도봉어린이문화정보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역사서 집필도 하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소설 「… 아효」에 대해, “우리가 최고(最古)의 역사서라고 믿는 『삼국사기』『삼국유사』도 따지고 보면 소설과 같다. 주요 왕들 대부분이 알이나 그에 비근한 신화적 장치를 이용해 태어나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예사로 펼치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이 소설은 석탈해와 아효를 위한 소설이 아니다. 김수로와 허황옥은 물론 아니다. 김수로의 생모이자 가야의 산신으로 추앙된 정견모주의 비중도 결코 그들에 못지않다. 아직 채굴되지 않은 역사에 입구를 내밀었을 따름이니, 겸허하게 독자들의 배심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소설 「…아효」는 《삼국유사》가락국기 중에서 ‘석탈해 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탈해는 신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라 2대 왕인 남해왕의 딸 아효공주와 결혼하고,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 문헌 속의 김수로와 석탈해 간의 대립 장면에서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했다. 철의 제국으로 군림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첫사랑이 바로 석탈해의 아내가 된 아효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세 남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잊혀진 가야제국의 참다운 의미로 시대의 편견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 의리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김수로의 영웅적인 면보다는 인간적인 면을 다루었으며,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첫사랑을 잊지 못하지만,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 더욱 가슴이 아픈 김수로에게 허황옥은 무엇인지도 말하려 한다. 왕이라는 권력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있었지만, 사랑하는 이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떠나보내야 했던 김수로의 인간적인 면을 느낄 수 있게도 한다. 또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인 석탈해의 삶을 통해서는 진정한 영웅이란 어떤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으며, 소설을 통해 가야국의 참 의미뿐 아니라, 우리 고대의 역사를 다시 조망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소설 「… 아효」에는 ‘아효’라는 한 여인이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어 적국인 가야의 힘을 빌리거나 배우고자 신라를 떠난 그 여인, 가야의 적국인 신라 공주의 신분으로 가야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인생을 둘러싼 두 남자의 영웅신화와 인간적인 사랑 앞에 김수로와 석탈해가 택하는 운명의 방식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가야인의 참모습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또 인도에서 건너와 최초의 국제결혼을 한 김수로와 허황옥, 모국을 떠나 새로운 불타를 창조한 허황옥과 석탈해의 부인이 된 아효에 관한 이야기는 영웅 김수로가 아닌 그를 위해 존재했던 많은 주변인물에 관해 역사적으로 재해석한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신의 아들을 낳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불사를 수밖에 없었던 가야의 어머니 정견모주, 아유타에서 운명처럼 가야로 떠나온 허황옥, 완하국 왕자였지만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석탈해, 그리고 신라의 공주였지만 신분을 포기하고 삶의 의미와 사랑을 찾으려 했던 아효, 그들의 절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설로 되살아난다.
❍ 신라왕위 계보
1대 | 박혁거세 거서간(赫居世) | 거서간,거슬한 |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61년) | 신라 건국자 최초의 박씨 군주 |
2대 | 남해 차차웅(南解) | 차차웅,자충 | 4년 ~ 24년 (21년) | 박혁거세의 아들 |
3대 | 유리 이사금(儒理) | 노례왕(弩礼왕) | 24년 ~ 57년 (33년) | 남해의 장남 |
4대 | 탈해 이사금(脫解) | 동악대왕(東岳大王) | 57년 ~ 80년 (24년) | 최초 석씨 군주, 남해차차웅의 사위 |
5대 | 파사 이사금(婆娑) | 80년 ~ 112년 (33년) | 유리이사금의 차남 | |
6대 | 지마 이사금(祇摩) | 112년 ~ 134년 (22년) | 파사왕의 아들 | |
7대 | 일성 이사금(逸聖) | 134년 ~ 154년 (21년) | 유리왕의 장남 또는 조카 지마이사금의 백부 또는 당숙 | |
8대 | 아달라 이사금 (阿達羅) | 154년 ~ 184년 (30년) | 박씨,일성이사금의 장남 | |
석씨이사금조: 8대 172년 | ||||
9대 | 벌휴 이사금(伐休) | 184년 ~ 196년 (12년) | ||
10대 | 내해 이사금(奈解) | 196년 ~ 230년 (34년) | ||
11대 | 조분 이사금(助賁) | 230년 ~ 247년 (17년) | ||
12대 | 첨해 이사금(沾解) | 참해왕(詀解王) | 247년 ~ 262년 (14년) | |
13대 | 미추 이사금(味鄒) | 시조대왕(始祖大王) | 262년 ~ 283년 (22년) | 최초의 김씨 군주. 김알지의 후손 |
14대 | 유례 이사금(儒禮) | 세리지왕(世里智王) | 283년 ~ 298년 (12년) | |
15대 | 기림 이사금(基臨) | 기립왕(基立王) | 298년 ~ 310년 (12년) | |
16대 | 흘해 이사금(訖解) | 310년 ~ 356년 (47년) | 마지막 석씨 이사금.[7] | |
김씨마립간조: 6대 159년 | ||||
17대 | 내물 마립간(奈勿) | 356년 ~ 402년 (47년) | 《삼국유사》에는 마립간 《삼국사기》에는 이사금 | |
18대 | 실성 마립간(實聖) | 실주왕(實主王) | 402년 ~ 417년 (16년) | |
19대 | 눌지 마립간(訥祗) | 내지왕(內只王) | 417년 ~ 458년 (41년) | |
20대 | 자비 마립간(慈悲) | 458년 ~ 479년 (21년) | ||
21대 | 소지 마립간(炤知) | 479년 ~ 500년 (21년) | 이두에 비처(毗處) 마립간 | |
22대 | 지증왕(智證) | 지도로갈문왕 (智度路葛文王) | 500년 ~ 514년 (14년) | 지증 마립간이었다가 503년 국왕 칭호 사용 |
<신라 중고> | ||||
김씨 성골 왕조: 6대 140년 | ||||
23대 | 법흥왕(法興) | 성법흥대왕 (聖法興大王) | 514년 ~ 540년 (36년) | 지증왕의 장남 |
24대 | 진흥왕(眞興) | 진흥태왕 (眞興太王) | 540년 ~ 576년 (36년) | 법흥왕의 외손자 겸 조카 |
25대 | 진지왕(眞智) | 진지대왕 (眞智大王) | 576년 ~ 579년 (4년) | 진흥왕의 차남, 장남은 금륜태자 |
26대 | 진평왕(眞平) | 진평대왕 (眞平大王) | 579년 ~ 632년 (54년) | 진흥왕의 손자, 진지왕의 조카 |
27대 | 선덕여왕(善德) | 선덕대왕 (善德大王) | 632년 ~ 647년 (15년) | 진진지진평왕의 장녀 |
28대 | 진덕여왕(眞德) | 진덕대왕 (眞德大王) | 647년 ~ 654년 (8년) | 진흥왕의 증손녀, 선덕여왕의 사촌 |
❍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80년, 재위: 57년~80년)
신라의 제4대 이사금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서기 8년에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고,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57년 유리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다파나국(多婆那國)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나보냈다. 가락국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또한, 가야의 역사를 다룬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용성국(龍城國) 출신인 탈해가 가야에 먼저 도래하여 김수로왕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 패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왜국의 동북쪽으로 1천리 먼 곳에서 왔다고 하며 북방 신화가 강하게 보이는 것을 보아 현재 함경도, 연해주 또는 우산국(울릉도)출신이라는 추측설과 캄차카반도 또는 인도에서 왔다는 추측 설 그리고 자신을 신성시하기 위해 동해 북쪽 멀리에서 왔다고 하며 용궁 전설을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 역사에 기록된 도이의 입구에서 보이듯이 고려인과 여진족 해적이 일본 큐슈 지방을 침략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던 연해주와 중국 동북 지방의 부족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부에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 왜국은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 큐슈(九州)북부 에 있다고 보는데, 큐슈 북부에 있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1천리가 연해주의 우수리강이 있기 때문이다.
석탈해의 출신지인 다파나국과 삼국유사에 기록된 용성국은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학자들은 석탈해가 동해를 거쳐 토함산으로 오면서 철기라는 새로운 문명을 들고 왔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 한편, 인도 타밀인으로 촐라국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타파나(Tapana)로 보고 허황옥 신화처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인도 불교를 실크로드를 통해 한반도에 전파한 것을 신화로 나타냈다는 설이 있다.
서기 24년, 남해차차웅이 죽자 아들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57년, 유리이사금의 남해왕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즉위 이듬해인 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고 음력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탈해이사금은 즉위 초에 외교에 힘을 기울여 59년 왜와 수교하였으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孟召)가 복암성(覆巖城)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러나 탈해이사금 대에 신라와 백제는 계속 전시 상태였는데, 63년 음력 10월 백제의 다루왕이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땅을 개척하고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64년 음력 8월에는 백제가 와산성(蛙山城)을, 음력 10월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 명을 내어 쫓았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한 뒤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66년, 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67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貴戚)으로써 나라 안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 음력 2월에 순정(順貞)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70년에 다시금 백제의 침공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73년 왜인이 목출도(木出島)를 침범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했다. 74년에는 백제군이 변방을 노략, 탈해가 병사를 보내 격퇴했다. 75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10월 백제가 와산성을 다시 공격, 함락되었으나 이듬해 음력 9월 회복하고 백제인 2백 명을 모두 죽였다.
이와 같이 탈해이사금 치세 때, 신라와 백제가 서로 2백 명 정도의 적은 군사로 연혁(沿革)도 전하지 않는 와산(蛙山), 봉산(烽山)등지를 거의 해마다 빼앗고 빼앗기곤 하였다는 것이 삼국사기 기록이나, 신라는 당초 경주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이고, 백제는 온조왕(溫祚王) 당년에 벌써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차지하였으니 신라와 똑같이 해마다 2백 명 정도의 군사를 내었다는 것에 의문이 있다. 또 두 나라가 간혹 화호(和好)한 일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늘 백제가 먼저 신라에 향하여 화의를 빌었다고 하였는데, 백제가 신라보다 몇갑절 되는 큰 나라로 늘 먼저 굴복하였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가라(加羅) 6나라와 사벌(沙伐)·감문(甘文) 등 완충국(緩衝國)이 있었는데, 백제가 가라 등과는 한 번의 충돌도 기록이 없고 도리어 신라를 침범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대개 신라가 백제를 원망함이 심하였으므로 신라는 백제가 망한 뒤에 그와 관계된 사적을 많이 고치거나 혹은 위조하였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남사》(南史)·《북사》(北史) 등에 보인 기록을 보면 신라가 처음에 백제의 결제를 받았다하였으니 이것이 도리어 믿을 만한 기록일 것이라는 것이 신채호의 주장이다.
77년 음력 8월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고 하나, 공격전이었는지 방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99년에는 장군 거도를 파견하여 현재의 울산 울주구, 부산 동래구에 해당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합하였고, 80년 가을 음력 8월에 죽어 성북쪽의 양정구(壤井丘)에 장사지냈고, 탈해를 모시는 숭신전(崇信殿)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남쪽 탈해왕릉 앞으로 옮겨졌다. 사후 9대 왕 벌휴이사금이 즉위하였으나 연대 차이가 심하여 그의 손자 여부는 불확실하다.
탈해이사금의 설화는 신라 제4대 왕으로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원래 칭호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다. 성은 석(昔)이다.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 현재 영일(迎日) 지역)에서 고기잡이 할머니 아진의선이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석탈해를 요약하면,
8년(남해왕 5)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 대보(大輔)에 올라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 보았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선왕(先王)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제를 자주 공격했으며, 일본과는 화친했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77년 황산진(黃山津)에서 가야(伽耶)와 싸워 크게 이겼다. 능은 양정(壤井, 경주 북쪽)에 있다.
❍ 김수로왕(金首露王, 42∼199)
금관가야라고도 하는 김해 가락국(駕洛國.혹은 伽耶國)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수로왕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내용이 가장 자세하다. 수로왕의 탄생과 가락국의 건국에 관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해 지역에서 9간이 사람들을 이끌고 살고 있었는데,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년) 북쪽 구지(龜旨)에서 하늘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려, 그 소리가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부르니 하늘에서 자줏빛 줄에 묶인 금상자가 내려왔다. 금상자 안에는 황금알 6개가 있었는데, 다음날 여섯 알은 여섯 남자아이로 변해 있었다. 이에 이들을 높여 공경하였으며, 그중 한 명인 수로(首露)가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었으며, 나머지 다섯 아들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왕이 즉위한 후, 탈해가 와서 왕위를 빼앗고자 하였으나, 신통력 대결을 통해 왕위를 굳게 지켰다. 48년에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으며, 이후 왕비와 함께 선정을 베풀다 189년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내용에서 드러나듯이, 가락국기는 건국 시조로서 수로왕의 신이한 탄생 과정과 그의 신통력, 하늘이 맺어준 왕비에 관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어 사실로 믿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또한 가락국기 자체도 고려 문종대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전부 신뢰할 수는 없다. 다만 9간의 무리가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자 하늘에서 금빛 알 6개가 내려오고, 이 알이 남자아이로 변하자 9간이 이들 중 한 명을 추대하여 수로왕으로 삼았다는 줄거리에는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수로왕보다 9간의 이름과 활동이 먼저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수로왕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김해지역의 유력 세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은 수로왕이 9간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 이주민 계열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9간들의 추대에 의해 수로가 왕이 되었으므로 국가 형성에 있어 9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