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제의 모색과 협동조합의 과제
손 학 규
안녕하십니까?
동아시아미래재단과 서울시, 한겨레신문이 공동 주최하는 협동조합 대토론회에 참석해 주신 많은 내빈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 멀리 지방에서까지 어려운 걸음 해주신 동아시아미래재단 회원 여러분들께도 감사 말씀 올립니다. 특히 새로운 희망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열심히 뛰고 계시는 협동조합 지도자와 활동가 여러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아울러 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유신 시절 원주에서 수배생활을 하던 때부터 협동조합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뒤 제가 다시 협동조합에 주목한 것은 새로운 사회경제 대안 모델을 찾기 위해 전문가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협동조합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일반 기업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공동 소유가 가능한 소유 형태, 1인 1표주의에 입각한 민주적인 운영, 그리고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에의 높은 기여도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경제 모델로 일찍부터 주목 받아왔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지속가능성과 안정성의 측면에서 협동조합 모델이 일반 기업보다 더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이 입증되기도 했습니다.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정치적 민주화가 크게 진전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사회경제 분야에서의 민주주의 발전 속도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두 번의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사조의 확산 속에 경제적 양극화와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은 날로 심화되었습니다. 경제성장을 거듭해도 국민의 삶의 질은 정체되는 ‘이스털린의 역설’에 빠져들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 가운데 2011년 7월, 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었던 저는 이런 시대정신을 담아 당내 기구로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와 보편적 복지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여러 자문교수 및 전문가들과 함께 협동조합기본법안을 준비해 발의한 것도 똑같은 문제의식에서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경쟁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일반 기업과는 달리 자립과 공생을 추구하는 ‘협동 경제’의 영역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협동 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양식이야말로 수출 중심의, 고용 없는, 재벌만의 성장이라는 기존의 성장제일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대안 경제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협동조합이 가진 공동 소유적 성격과 민주적 운영 원리뿐 아니라, 매출액에 비해 고용 비율이 높고 지역경제와 내수 활성화에 기여가 크다는 점 등은 제가 추구하려는 경제민주화 정신에 잘 부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재벌개혁 등의 네거티브한 접근 뿐 아니라 협동조합과 같은 포지티브한 대안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야당 대표가 발의한 법안에 정부 여당까지도 뜻이 통하여 2011년 말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고 UN이 정한 협동조합의 해인 2012년에 12월 1일을 기하여 드디어 협동조합 기본법이 발효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만 해도 협동조합 활성화는 좀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상전벽해란 말을 협동조합기본법의 위력을 통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1년이 조금 지난 시기에 4천여 개의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우리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사업을 협동조합들이 벌여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직 협동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만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의 지혜가 합쳐져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이 화산처럼 분출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협동조합을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가슴 벅찬 미래와 희망을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네 번에 걸친 의정활동을 했습니다만, 협동조합기본법의 제정이야말로 저의 의정활동의 가장 큰 보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협동조합이 새로운 희망으로 온 국민에게 받아들여지게 된 이면에는 암울하고 어려운 우리나라의 현실이 있습니다.
갈수록 양극화로 인한 골은 깊어지고 있는데, 국민들에게서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는 복지제도는 거북이걸음처럼 너무 더디게 가고 있습니다.
대기업들은 정규직은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리면서 천문학적인 사내유보금을 쌓아 놓을 뿐 신규 투자는 꺼리고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역량이 뛰어나고 스펙이 화려한 우리의 청년들은 취업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창업기업이나 소상공인 창업은 대다수가 실패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정부는 복지예산을 늘린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존중받는 삶을 보장해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기초노령연금을 약속한 정부가 약속을 뒤집다보니 국민들은 이제 국민연금에 가입하는 것마저 손해가 될까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는 경제민주화를 소리 높여 공약했지만, 정부는 규제완화에 목을 매고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으로 돌아가면서 경제민주화는 온 데 간 데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오히려 협동조합의 토양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협동조합의 성장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사회와 경제를 엮어서 양극화된 세상을 바느질하려는 협동조합은 현재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협동조합은 상상력입니다. 더 큰 꿈과 더 큰 상상을 하면서 더 멀리 내다볼 때만이 현재 직면한 협동조합의 어려움들도 잘 해결되어 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나가는 협동조합의 큰 꿈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협동조합이 진정한 경제민주화를 만들 수 있는 풀뿌리조직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매일 매일 약속된 사업활동을 해 나가는 성실함과 조직력, 조합원과 함께 하는 정직함, 시장의 경쟁에서 이겨 내기 위한 지속적인 혁신이 가능한 협동조합만이 성공하는 협동조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협동조합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 뛰어난 지도력과 사회적 영향력,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실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이 많이 만들어지고 사회경
제적으로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할 때만이 안정적이고 실질적인 경제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저는 협동조합이 “인간의 얼굴을 한 지속성장 국가발전모델”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축이 될 것이고,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상생을 통한 성장이야말로 지속가능한 경제이며, 이를 위해 복지사회와 경제성장이 함께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복지사회와 경제성장의 두 축은 서로 상충하거나 경제와 사회를 나누는 이분법적 논리를 강화시킬 뿐이었습니다.
복지 사회와 경제성장을 중간에서 연결시켜주는 협동조합, 더 넓게는 사회적경제가 세 번째 축으로 정립될 때에만 불필요한 논쟁을 잠재우고 더 풍부한 국가 발전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올해 초 여·야당 대표가 국회연설에서 이구동성으로 사회적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새누리당은 사회적경제특별위원회, 민주당은 사회적경제정책협의회를 당내 기구로 만드는 등, 오랜만에 정치권이 합의를 이루고 구체적인 행동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의 협동조합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직까지 협동조합이 많은 제도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말을 거듭 듣게 됩니다. 국가발전 전략의 세 축 중 하나인 협동조합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국회와 정부, 지자체 등 정치권 전체가 보다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협동조합의 발전을 위해서는 협동조합의 특징을 감안한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조직들에게 장기저리의, 사업평가에 의한 적정 금리의 대출이 가능한 대출시스템이나 투자시스템을 만들어 내도록 정치권과 중앙정부, 지자체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협동조합은 자립과 자치, 자율의 가치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 정책과 제도를 활용할 수 있지만,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민간이 주도하여야 합니다. 협동조합 민간 지도자 여러분이 먼저 기획하고, 먼저 돈을 모으고, 앞선 성공 사례를 만들어 가면서 정부와 정치권에 당당하게 제도적 정비를 요구하십시오. 그런 뒤에 모자라는 자금에 대한 지원을 요구한다면 협동조합의 주도권이 유지되면서 동시에 국가와 함께 하는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1950년대의 최빈국에서 현재의 위치까지 한 세대 만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모든 나라의 발전 경로를 설계하는 데 우리나라는 종합 전과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단계를 지나, 전통적인 공동체 정신과 자원 결합의 노하우를 한데 묶는 협동조합이 새로운 국가발전 전략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다면 대한민국은 이점에서도 발전도상국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이미 협동조합들은 공정무역이나 개발도상국의 커뮤니티 육성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발전된 우리나라의 협동조합 생태계를 만들어 국제개발협력의 모델로 수출할 수 있다면 이 또한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의 붕괴 이후 전개될 새로운 세계경제질서를 구축해 가는데 의미있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가발전 전략의 당당한 한 축으로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고, 전 세계에 한국 협동조합의 모범사례가 울려 퍼지는 날이 오기를 상상하면서,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지도록 함께 꿈꾸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굳건하게 걸어 나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