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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을 전범으로 처벌할 것인가? 아니면 이용할 것인가?
1945.9.2, 맥아더가 피해국가들(한국은 없었다)을 대신한 만년필을 바꿔 가며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자, 일본군과 국민들과 일왕은 모두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을 받을까 두려워 한다
9.11일 전범 체포령이 떨어지자, 1급 전범들은 자살하고 천 여명의 전범이 체포 되지만, 미수에 그친 수상 도조 히데끼는 살아서 재판을 받게 된다.
또, 각 국의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면서, "포로학대는 민족성이 나쁜 대만.조선인들 탓"이라는 일본장교들의 말에 속은 미군은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 되었던 300만명의 조선.대만 식민지 청년들을 약식재판으로 처벌하거나 처형하고, 수천만명의 민간인 학살은 재판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미국 국민과, 영국.소련.중국.호주는 일왕의 조속한 사형을 요구했지만, 재판의 수장이었던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자신에게 치욕적인 참패를 안겨 주었던 필리핀 주둔 사령관 '야마시따'에 대한 복수에만 관심을 두고 '총살 시켜 달라'는 그의 요구를 묵살하고 교수형을 시킨다.
그 후, 미군 포로학살에 대한 "독살,익사,목을 베든 모두 죽이라"는 일본 전쟁부 차관의 결정적인 증거 문서가 나왔는데, 어쩐 일인지 연합국측 재판에 제출 되지 않아, "일왕이 이 문서를 아는가?"를 심문할 수도 없게 된다.
더욱,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 온 많은 미군포로들에게는 "일본군이 너희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서, 언론 인터뷰나, 기록을 하거나, 다른 이들이나, 가족들에게도 얘기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내려진다.1945.9.5
맥아더의 전범재판 원칙은 "일왕을 증언하게 하거나, 관여 시키지 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45.9.27일 일왕은 맥아더가 있는 GHQ를 제 발로 찾아 극비의 타협을 얻고 목숨을 건진다.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의 일왕 처형 지시를 묵살하고, 일왕의 권위를 수호하는 관대한 지배자로 "큰 눈의 천황"으로 불리우며 일본국민의 존경을 받기 시작했고, 일본의 미군기지화 작업을 확대하고, 맥아더의 이러한 압박에 트루먼 대통령은 일왕의 불기소 방침을 허락, 전쟁 책임을 도조 히데끼로만 국한하기로 한다
그래서, 점령11개월만에 진행된 전범재판에서, 검사의 진주만 공습 질의에 "나는 일왕의 지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실수한 도조 히데끼에게, 치밀한 각본을 준비시켜서 [ 변호사:개전의 결정은 일왕의 명령인가?/ 도조: 아니다/ 변:개전 결정은 당신이 한 것인가?/ 도조: 그렇다~고 하자, 변:그렇게 답하면 안된다. 혼자 책임지는 것은 좋지만 모두가 납득되게 말하라. 다시 묻겠다. 진주만 공습 하기 전에 일왕이 알 권리가 있나?/ 도조: 작전계획은 알리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없다] 이후 일왕에 대한 전쟁연루나 증거는 없게 되고 도조는 홀로 책임을 지고 처형된다
한편, 전범으로 처벌된 조선 청년들은 이승만이 친일부역자라며 입국을 막아서 일본에 남을수 밖에 없었고, 처형된 청년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었고, 일왕은 神적 지위를 포기하고, '인간선언'을 강요 당한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6.25가 일어나자, 맥아더는 한국지리에 밝은 숨어 다니던 일제 장교들을, 면죄를 조건으로 GHQ에 소집해서 인천.원산 상륙작전을 기획하고 소해(기뢰제거)부대로 참전시켜, 일본군은 또 다시 한반도에 상륙해서 미군 수비 역할을 맡게 되고, 이 희생을 빌미로 정치적 독립을 얻고, 미군 군수물자 보급으로 인해 모든 전범기업들과 전범세력이 기사회생하고, 제 2의 경제대국으로 부활하여, '사사가와 재단(일본재단)'을 설립, 막대한 로비 자금을 모아, 미 의회와 싱크탱크에 뿌리고, 한국 친일파들을 확보하게 된다.
미국은 법정의나 평화보다, 권력을 위해서는 자국민 인권도 보호하지 않는 나라이며, 일본은 전쟁차관을 전범기업들이 부풀려 사기치면서 한국 기업을 종속시키고, 떡값으로 한국의 정부를 부패 시키면서 친일파로 장악하게 저격하면서 국민을 분열시켜, 국력을 약화 시키고, 늘 한국 경제를 파괴하고 침략 기회를 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