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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 교수의 《知의 最前線》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서재에 있는 책들 거의 모두가 시체 안치소의 관(棺)들과 다름없다고 한다. 실시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인터넷 공간이 최전선이라면 서점이나 도서관의 책들은 전투가 끝난 지 오래된 戰士의 기록일 뿐이다. 우리 조상들이 조랑말을 타고 달리던 만주 벌판의 그 말. 말하는 말과 달리는 말…
이어령 교수 서재의 책상은 달리는 말로 보인다. 다리가 여럿 달린 것만 다를 뿐이다. 그는 책상을 선실(船室)이라고 한다. 서재는 바다다. 그는 여기서 세계 각국의 지식을 잡아 올린다. 이를테면 원양어업을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배와 함께 침몰할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지금 뗏목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자본주의가 배와 함께 침몰할지 몰라서 뗏목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 헷갈려고 영 어지럽다.”
“내가 방문한 이어령 교수의 서재는 광활한 초원도, 더 넓은 바다도 아니었다. 곳곳에서 총성이 터지고 적의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하늘을 가르는 미사일 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지의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되는 최전선이었다.”
《知의 最前線》이라는 책의 또 다른 저자 정형모 기자와 이어령 교수가 책머리에서 나눈 대화다. 정 기자는 EBS-TV의 〈에니토피아〉라는 프로그램을 자우림의 김윤아와 함께 진행하기도 하고, ‘영화진흥위원회 자문위원’‘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전문위원’을 역임하고, 2007년부터 2년간 중앙일보 문화부장, 2009년부터 《중앙선데이》《S메거진》편집인으로, 현재는 ‘한-러언론사회분과간사’로 활동 중이다.
나는 지금 우리 시대 마지막? 석학(碩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어령 교수가 띄우는 지식의 뗏목에 타 보려고 한다.(이미 탔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뗏목이라는 것이 구시대의 유산이다. 뗏목, 낡고 오래된 유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또 책은 2016년에 출간되었으니 벌써 5년이 지났다. 그것으로 이어령 교수가 하고자 하는 말(言)에 뒷북을 치거나, 말(馬)의 뒷다리를 만지는 격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 타 보는 것보다는 타 보는 것이 낳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한다.
“이제는 아나로그 공간도, 디지털 공간도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거야. 우주의 벽이 사라지는 거지. 물건뿐이겠어? 모든 인터페이스가 바뀔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지. 이게 바로 디지로그 세상이야.”
이 교수가 말하는 디지로그 세상은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다. 발 내딛는 곳마다 온통 비옥한 땅이고,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디지로그 세상, 그곳에선 선진국도 후진국도 없다.
“재밌잖아. 우리가 일본을 제치고 중국이 우릴 제쳐.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아시아가 유럽과 미국을 제치는 거지. 지금까지 그 사람들 뒤통수만 보고 여기까지 온 거 아냐? 그런데 이젠 아시아 3국이 정보사회, IT기술, 모든 면에서 그들을 앞서고 있거든. 서양에서 아시아로 문명의 축이 바뀐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야.”
“유럽은 근대의 역사를 한 단계 한 단계씩 파충류처럼 기어서 올랐어. 일본은 원숭이처럼 그것을 흉내 내어 나무에 올라, 가지에서 가지로 근대의 숲을 뛰어넘어 오늘에 이르렀지. 한국은 토끼처럼 껑충껑충 달려 남이 100년, 200년 동안에 한 것을, 10년, 20년 만에 이뤄냈어. 그런데 중국은 어때? 그들은 캥거루야”
무슨 이야기인가 싶은데 통신 이야기라고 한다. 그레이엄 벨이 처음 전화를 발명했을 때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우리만 해도 전화가 처음 나왔을 때 청색전화, 백색전화 한 대 놓은 것이 로또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하늘의 별따기였던 때가 있었다. 새마을 노래와 함께 전화가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된 것이 바로 엊그제 애기다. 그런데 지금은 초딩도 휴대폰을 쓴다.
중국은 유선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무선으로 뛰어넘었다. 만약 14억 집집에서 동선(銅線)을 깔아 유선전화를 설치했더라면 구리는 동이 나고 아직도 공사 중일지도 모른다. 그런 단계를 밟지 않고 곧바로 와이파이, 무선 휴대전화로 입성한 것이다.
“캥거루 점핑 기술이 얼마나 좋아. 남들이 걷고 달리고 할 때 중국은 샛길로 도약해 그들을 앞질렀어. 손오공, 저팔계 같은 짓을 한 거야. 스킵 기술을 쓴 거지.”이 교수 말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난다.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할 덩사오핑(鄧小平)이 개방외교를 내세우며 부르짖은 것이 ‘도광양회(韜光養晦)’다. ‘빛이 퍼지지 않도록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것인데 이것이 만만치가 않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 2014년 시진평(習近平)이 중·불수교50년 기념식에서 ‘이제 사자가 깨어났다.’고 선언했다. 덩사오핑 이후 35년 동안 감추었던 국책(國責)의 자세를 뒤엎은 것이다.
덩사오핑은 “미국이라는 슈퍼파워에 대항하지 않는다. 내실을 기해 경제, 군사적인 성장을 이루자.”고 하였지만, 시진평은 ‘잠에서 깬 사자론’을 꺼낸 것이다. 그동안 지켜온 도광양회라는 외교 원칙을 바꾼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잠자는 토끼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련의 해체로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폐선을 사들여 초음속기 탑재가 가능한 항공모함을 개조한 중국,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이 ‘라오닝’호다.
“그깟 항공모함 하나 가지나마나 별거 아니야. 미국의 핵 항공모함은 11척이야. 라오닝호는 핵연료로 움직이는 게 아니거든. 초음속 비행기를 실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서너 대뿐. 그런데 나뭇잎 하나 지는 데서 천하의 가을을 보고, 제비 한 마리로 봄이 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미래로 가는 지도(地圖) 읽기 아니겠어? 항공모함에 집착하는 중국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동중국해를 에워싼 긴장감 바로 그거잖아. 이제 근해에서 원양으로 전략의 방향을 틀고 있는 거지. 사자가 눈을 뜨면서, 도광양회의 전략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하고 있는 거지.”역시 이 교수의 말이다.
‘아우타르키(Autarky)’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때 아이들도 알아들었던 생존 형태로서의 국가론이다. 국가는 자급자족을 위해 자원을 지배해야 한다는 경제 자족론으로,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구한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인구가 늘어 자기 땅만으로 자급자족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 생존권을 위해 남의 땅에 쳐들어가 안방을 차지해도 된다는 이론, 이런 논법 뒤에는 이미 일본이 한국을 먹고, 중국 땅에도 쳐들어가서 만주를 지배하는 아전인수의 생존권 논리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 이론이 19세기와 20세기 역사를 만든 거야. 이러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에서 시작한 지정학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
독일의 지정학 계보가 일본으로 역수입되면서 일본이 타이완을 지배하였을 때 타이완 총독부 민정장관이던 고토 산페이(後藤新平)는 유라시아 블록 구상의 선구자로 일본 정가에도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는 대륙정책은 독일과 손을 잡고, 유라시아가 하나 되어 해양 세력을 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시아는 일본이, 유럽은 독일이, 거기에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강력한 유라시아 세력권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래야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 이후에 떠오른 미국의 해양 세력과 맞설 수 있다고 했다.
“정 부장, 싸이 뮤직비디오 시청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25억 정도(2015.12 기준)로 중국 인구보다 많다고 들었어요.”
“칭기즈칸이 말을 타고 세계를 지배했지. 그런데 싸이는 말춤을 추고 25억의 마음을 움직인 거야. 말은 타지도 않았는데도. 한 개인이 세계를 움직여. 유튜브만 잘 이용하면 매니저, 자본이 필요 없이도 붐이 일어나. 유튜브 유저들이 말춤의 매니저고 홍보요원이고 관객인 거라고.”
이번에는 정 기자가 이 교수에게 질문했다.
“달려오는 대륙의 사자, 아니 껑충껑충 뛰는 캥거루, 어려운 도광양회 앞에서 ‘달려라. 토끼!’라고 외쳐봤자,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이 알아듣겠어요? 더구나 젊은 애들 한자에는 까막눈 아닌가요? 한자라는 만리장성이 가로막고 있어서 중국을 제대로 보거나 넘을 수가 없죠. 지금까지는 영어만 열심히 배우면 다 되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그래, 그러면 넘지 말고 눕혀”
넘지 말고 눕히라니. 이게 무슨 황당한 농담인가 싶었지만, 이 교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만리장성을 눕히면 큰 길이 되잖아. 거의 같은 시기에 돌로 중국인은 만리장성을 만들고, 로마인들은 로마가도를 만들었어. 성은 막고, 길은 뚫는 것으로 서로 모순되지만, 사실 같은 스케일의 토목술이었거든…”
이 교수가 말한다.
“갈릴레오가 언제 면책되고 무죄를 선고받았는지 알아? 1992년 10월의 일이야. 무려 360년이 걸린 거지.”
그리고 또 “세상의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거야. 그렇다고 역사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지. 비전이 천천히 오더라도 오늘 그것을 보여줘야 해.”
이 교수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은 관棺이라고 한다. 죽어버린 과거란 말이다. 지의 최전선은 예언하는 게 아니라 피투성이로 싸우는 것이다. 겁이 난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싸움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거대한 만리장성을 잘하면 때려눕힐 수 있다는 희망까지 버릴 수는 없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 될 것도 같다. 정 기자의 생각이다.
‘아시아’는 아카드 말인 ‘아슈(asu)’에서 온 것으로, 해가 뜨는 동쪽 땅을 의미한다. 그것을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렀는데 유럽의 반대에 있다는 뜻이다.
“아사달, 그게 바로 아슈 아니야? 조선, 아사달, 동이 트는 아침, 어때? 아시아의 어원을 찾으니 거기 바로 아사달이 있고, 우리 최초의 아침이 있잖아.”
6,000년 전, 점토에 쓰인 설형문자인 아슈가 아사달과 연결되는 신화 공간에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여기라고 생각하는 데서 가슴이 뛴다.
일본은 자기들이 해 뜨는 아침의 나라라고 우긴다. 쇼토쿠 다이시(聖德太子, 574∼622)가 중국에 보낸 국서에 일본이 자랑스럽게 인용하는 것이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께 안녕하신지 글을 보낸다. (日出處天子致書 日沒處天子無恙 - 隋書)’이다.
“일본이 해 뜨는 나라이고, 중국이 해지는 나라면 어디서 봐야 그렇게 되지? 누구를 중심으로 할 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바로 한국이야. 한국이라야 동쪽에 해 뜨는 일본이, 서쪽에 해지는 중국이 있거든.”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가운데 나라였던 적이 없다. 그리스에서 볼 때, 미국에서 볼 때도 한국은 없고, 같은 아시아인 중국과 일본에서 볼 때도 아시아 중심의 어디에도 한국은 없다.
서양은 네 방향으로 보지만, 동양은 중앙에 하나가 더 있다. 영어로는 센터, 그 중앙이 노란색으로 황제의 색이란다. 중국은 자기들의 시조가 황제라고 하면서 중앙에 있는 왕이 황제라고 한다. 동쪽에 청제, 남쪽은 홍제, 서쪽은 백제, 북쪽은 흑제다. 그리고 동쪽의 이민족을 동이, 남쪽은 남만, 서쪽은 서융이고, 북쪽은 북적이라고 했다.
“저희들이 한가운데 있으니 동서남북으로 오랑캐가 있는 거지. 동이든 서든 자랑할 게 없어. 한자 세대라고? ‘모르는 게 약이야.’한자로 보면 전부 버러지 아니면 짐승을 가르치는 글자로 남만(南蠻)은 벌레 충(蟲)이, 서융(西戎)은 개, 북적(北狄) 역시도 개를 뜻하는 견(犭)을 써. 그래도 동이(東夷)는 궁(弓)이라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그나마 사람으로 취급은 한 셈이지.”
언제쯤 종식될지 모를 만큼 문제가 되고 있는, 전염병 이것은 옛날에도 있었다. 그러나 옛날에는 풍토병이라고 하여 지역에서 끝났으나 인류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욕심을 내면서 전세계로 퍼졌고, 무역을 통해서 옮겨갔고 강병이라는 전쟁을 통해서 또 옮겨갔다.
‘페스트’야말로 부국강병이 불러온 비극이다. 원래 페스트는 히말라야 산록의 지방병이었다. 1252년 몽골 기병대가 운남에서 버마로 침공하던 그때 유라시아 초원에 살던 설치류에 감염되었고, 초원지대가 페스트균의 공급지로 바뀐 것이다. 이 병에 걸리면 피부가 까맣게 변해 죽는다고 해 흑사병으로 불렸고, 한때 유럽 인구의 4분의 1, 또는 3분의 1이 사망했다. 전 지구적 규모의 감염증 확산 원인은 13∼14세기 중반까지 몽골제국의 군사 원정과 지배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 후 파스퇴르가 전염병의 원인이 병균이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모든 질병 원인이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던 옛날의 미신과 고정관념을 한 방에 날려버린 거지. 그런데 과학자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과실을 저지르게 돼. 바이러스는 인간의 적으로 무조건 박멸해야 할 악마다. 그래서 하나도 남기지 말고 죽여야 무균의 낙원에서 청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병을 악마라고 생각한 우매한 미신이 이번에는 똑똑한 과학자의 머리로 옮아간 셈이지.”
각종 소독제,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 DDT와 같은 농약…,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이면 싹쓸이하는 청정 멸균 작전을 펴는 것인데, 정치인들이 부국강병을 내세워 자기 나라에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박멸하려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싶다.
인간이 그 싸움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은 마마손님이라고 불렀던 천연두뿐이라고 한다. 14세기 전세계 인구 세 사람 가운데 한사람 꼴인 2,000∼3,000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페스트를 비롯해, 20세 초에 만연한 스페인 독감은 감염자 5억 명 중, 사망자가 1억 명에 달한 펜데믹(대유행)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죽은 수보다도 감기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는데, 그건 분명히 전쟁 이상의 전쟁이었다. 《로빈슨 크로스》의 저자 대니엘 디포(1660∼1731)는 약 300년 전 《전염병 연대기》라는 소설을 통해 페스트가 유행한 당시의 런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돈 있는 귀족들은 런던을 떠나 안전한 피난처로 도피했고 감염된 집은 폐쇄하고 문 앞에 붉은 십자가를 그린 뒤 ‘주여 어여뻐 여기소서’라고 썼다. 그러나 런던시장이나 관료들은 오늘날과 같은 방역 기술이 없었음에도 놀라운 대처로 환자 보고를 의무화하고 환자가 발생한 집의 침구와 의류, 심지어 커턴 까지도 고온에 소독하지 않은 것은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또 환자를 격리시켰고, 일정 기간 감시토록 했으며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1주일 동안 관찰하며 집에 있도록 했다. 만약에 이를 어기면 즉시 투옥했다. 이런 엄격한 법 속에서도, 런던 인구의 5분의 1이 사망한 혼란 속에서도 식량 공급은 원활해 폭동이나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우리나라나 미국 같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자꾸 생각난다.
세상은 언어로 통하고, 어쩌면 모든 것의 근원이 언어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언어가 중요한지 모른다.
“우린 바이러스라고 그러지 그게 영어식이야. 일본사람들은 윌리스라고 라틴식으로 읽지. 똑같은 건데 200㎞ 떨어진 바다를 건너면 말이 달라. 암세포만을 공격하는 바이러스 하나 만드는데, 대략 1,000달러 정도가 들지만, 3D 프린터로 이 바이러스를 만들면 1달러 수준이면 돼. 생물학자들이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엔지니어가 바이러스를 찍어내는 세상이야. 그런데 암세포뿐이겠어? DNA를 조작해서 바이러스를 잡아먹는 바이러스를 만든다고 생각해봐.”
지금 세계는 전기자동차 붐이다. 전기자동차라면 ‘테슬라’를 떠올릴 만큼 이름이 알려져 있다. 니콜라 테슬라(1856∼1943)는 크로아티아 출신 천재 물리학자, 전기공학자, 발명가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에디슨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교류발전기를 만들었으나, 사사건건 에디슨과 부딪쳤다. 그런데 우리는 에디슨만 알고 니콜라 테슬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테슬라가 위대한 것은 전기줄이 깔리고 있을 무렵에 이미 무선시대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무선통신은 마르코니가 발명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테슬라가 2년 먼저고 오늘날의 리모컨 불루투스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 실리콘벨리에서 전기자동차를 만들면서 에디슨의 라이벌 이름을 딴 것은 시대를 앞서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테슬라 전기자동차는 벤츠나 토요타를 쫓아가지 않고, 그것을 넘어섰다(shift)는데 있다.
“배에서는 땅에서처럼 전신주를 세울 수 없어. 항해하는 배에서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유선통신이야. 그러니까 무선 기술은 해양 세력권의 꿈이었던 거지.”타이타닉의 침몰은 무선통신 시대의 개막과 극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한다.
“당시 타이타닉 호에는 무선 통신사가 네 명 있었어. 배가 빙산에 부딪히자 구조를 요청하는 무선을 쳤지만,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배의 통신사가 무선기를 끊고 자고 있었어. 그 녀석이 졸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을 구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인터넷 용어만 해도 거의 대부분이 해양 문화권에서 생긴 말들이다. 내비게이션이 바로 항해한다는 뜻이고, 블로그는 웹(web)과 로그의 합성어로 로그가 바로 배에서 통나무(log)를 던져서 속도를 잰 것을 기록한 항해일지다. 물론 대륙도 만만치는 않다. 컴퓨터를 시동하는 부팅은 부츠를 신는다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노마드(유목민)들의 생활 습관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을 바다로 보느냐, 초원으로 보느냐, 이것은 해양과 대륙이 맞서는 상징인 것이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말이나 마차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식민지 경영과 그 전쟁에 무기로 배를 사용했다.
“그게 거함이고 거포야. 거기서 생겨난 군대가 해병대야. 수 마일 바다 멀리에서 함포 사격으로 도시를 무인지경으로 만들고, 막강한 해군력으로 터키, 몽골 같은 육군들의 시대는 사라져 간 거지. 부케팔로스(말이름)를 타고 영토를 넓혀 갔던 알렉산드대왕도, 포병 출신인 나폴레옹도 다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어.”
그러나 이 교수는 앞으로의 세계는 해양과 대륙의 이항 대립이 아니라 그사이의 인터페이스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생각해봐. 대륙 세력은 전쟁으로, 해양 세력은 무역으로, 세계를 재패 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무역에 혁명을 일으킨 것은 거함도 거포도 아냐. 작은 알루미늄 상자야.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이름. 맬컴 맥린이 발명한 것. 우리가 지금 이 정도 살게 된 것도 바로 이 상자 덕분이지.”
육지와 바다의 수송시스템이 전혀 다른데 착안해 만든 컨테이너 박스, 트럭과 배, 육지와 바다 사이 인터베이스를 이 상자만으로 간단히 메울 수가 있었다. 육지와 바다를 없애버린 새로운 파워인 것이다. 컨테이너의 발명으로 세계적인 운송업체 ‘Sea Land’를 창업한 인물, 《포브스》가 20세기 후반 세계를 바꾼 15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한 그 인물. 고속도로나 항구에서 쉽게 보는 그것에 21세기가 담겨있다.
경주 불국사(佛國寺) 마당 좌우에는 나란히 석가탑과 다보탑이 서 있다. 둘 다 국보이고 귀중한 문화재다. 이 두 탑에 대해 이 교수는 말한다.
“두 탑을 보면 화랑의 모습과 정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석가탑은 직선적이고 극도로 절제되어 있는 단순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왼쪽에 위치한 다보탑은 곡선적이며 부드럽고 아주 장식적입니다. 나란히 있으면서도 비대칭적인 이 두 탑은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절묘한 조화의 세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오래전부터 이런 상태를 화이부동(和而不同) 또는 자타불이(自他不二)라고 불러왔습니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같지 않은 것을 조화롭게 한다. 그리고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좋든 싫든 중국을 상징하는 말에 만만디(慢慢地)와 차부다(差不多)라는 것이 것다. 덩사오핑이 흑묘론백묘론(黑猫論白猫論)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이거다 저것은 저거다’하고 끝까지 따지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대체로 ‘이거나 저거나 별반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다’‘천천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둘, 동양과 서양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우주의 질서든 숫자의 질서든, 말이든 글자든, 크게 나눠보면 이분법으로 양분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의해 사고하고 계산도 한다. 모든 문화, 문맹의 기본에는 이 이항 대립에서 생기는 차이가 있다. 가치관에 있어서도 Yes와 No라는 긍정과 부정으로, 육체는 영(靈)과 육(肉)으로,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나뉜다. 이러한 이분법이 삼분법이 되었건, 이진법이 삼진법, 혹은 십이진법이 되었건 결국 근본은 흑과 백의 이항 대립이다. 흑과 백이라는 양극이 있으니 회색도 생기는 게 아닌가? 더 까맣다와 더 희다는 가감이 있을 뿐, 기준은 역시 흑과 백이다.’보통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말이야. 사실 거기에는 양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해. 원자까지는 이분화 질서로 설명이 되는데, 양자역학에 들어가면 입자와 파장이 구분되지 않는 거야. 입자이면서도 파장이고, 파장이면서도 입자인 세계가 펼쳐져. 그게 양자의 세계지. 소위 슈뢰딩거(1887∼1961, 오스트리아 출신 물리학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고양이가 그거잖아. 슈뢰딩거의 실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고양이*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야.”
* 완전히 밀폐되고 불투명한 상자 안에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담긴 병이 들어있다. 청산가리가 담긴 병 위에는 망치가 있고 망치는 가이거 계수기와 연결되어 있다. 방사선이 감지되면 망치가 내리쳐져 청산가리 병이 깨지는 구조고, 결국 그 병이 깨지면 고양이는 중독되어 죽고 만다. 가이거 계수기 위에는 1시간에 50%의 확률로 핵붕괴로 알파선을 방사하는 우라늄 입자가 놓여있다.
이럴 경우 1시간이 지났을 때 고양이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실험자는 외부에 있기 때문에 관찰이나 간섭을 절대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대답을 해야 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1시간 후 고양이는 각각 절반의 확률로 생사가 결정된다. 1시간 이후 상자를 열기까지 당신은 결과를 알아볼 수단이 전혀 없으며 결국 1시간 이후 상자를 개봉할 때 고양이는 과연 어떻게 되어있느냐?" 라는 것. 슈뢰딩거는 이 실험을 주창하게 만든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상자를 열기 전까진 생과 사가 '중첩'되어 있다. 라고 답한다. 여기서 핵심은 '죽음이나 삶'이 아니라 '죽음과 삶'이라는 것이며, 상자를 열어 결과를 봄으로써 저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고 한다.
양자역학의 대표적인 예시로 에르빈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한 사고 실험으로 양자역학에 의하면 미시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 사건이 관측되기 전까지 확률적으로밖에 계산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상태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여전히 어렵고 이해가 잘되지 않지만, 양자 세계는 질서정연한 뉴턴 물리학과 전혀 다르게 구성된 세계라는 것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고양이 신세를 통해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파장도 아니고, 입자도 아니고, 선을 넘나드는 변덕스러운 양자 세계라는 것이다.
아직 꽤 많은 이야기가 남았는데,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새롭기도 하고 쌈박하기도 하지만, 400쪽이나 되는 양이 장황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매일같이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는 이 겨울에 소일거리라고 해봐야 책 읽기 아니면 트레킹이나 하고 자전거 타기나 하는 것이 고작이니 힘내서 더 다가가 보자.(2.17)
한국말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흑백의 경계를 넘어서는 애매하고 이상한 말들이 많다.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엇비슷’하다는 것이 그렇고, 서지도,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이 그렇다. 또 ‘거시기, 머시기’는 그런 탈경계를 나타내는 애매어(ambiguity)로, 소통의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는 곡예사 같은 언어다. 이미 알고 있으나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을 나타내는 주어가 ‘거시기’이고, 언어로 줄긋기 어려운 삶의 의미를 횡단하는 행위의 술어가 ‘머시기’다. 한국인, 특히 전라도에서 단지 이 두 마디만으로도 서로 복잡한 심정과 신기한 사건들을 교환하고 있다.
좌우합작보다는 싸우는 경우를 훨씬 더 많이 보아온 좌우대립은 프랑스 혁명 때부터 있어왔다. 그런데 우리는 좌우가 싸우다가도 ‘좌우지간에 말야’로 뜸을 들이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좌와 우 사이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한다. 너와 나 입장 사이에 싸움을 푸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잘하다와 못하다 사이에 ‘잘못하다’는 이상한 말이 있는 것이다. 극단적 이항 대립에서 벗어나 제3항의 거시기 머시기를 찾겠다는 생각이 말이나 논리로 꼭 찍어낼 수 없는 세상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찾는 것이야말로 창조적 삶이 아니겠느냐고 이 교수는 말한다.
‘초록은 동색’이라 하여 우리의 초록색은 파란색에 포함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초록과 파랑은 엄연히 다른 색이고, 그 뜻도 다르다. 무엇을 허락하고 패스하는 것이 초록색의 상징인데, 초록이 허락의 뜻으로 삼게 된 데는 서양에서 선박의 안전과 통과의 표시로 그 색을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기차와 자동차가 생겼을 때도 그대로 사용했다. 이제 이민카드는 그린카드로 통한다. 무엇을 허락하고 통과될 수 있는 사증으로, 그것을 그린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한중일에서는 초록(그린)이 아니라 청색이다. 신호등의 색은 분명 초록불인데도 파란불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지만, ‘나뭇잎 하나 지는 것에서 천하의 가을을 안다’는 동양문화에서 지의 최전선을 논한다면 그렇게 작은 것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물질 기술에서는 뒤졌지만, 사람의 마음을 끌고 감성을 자극하고 정을 울리는 소프트파워에서는 한국문화 자원도 결코 만만치 않다. 불고 있는 한류가 초원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세계를 이끌어온 산업과 금융자본의 주류 세력에서 빠져나와 공감하고, 기뻐하고, 인간의 따스한 정을 퍼뜨리는 미래의 초원 속으로 들어갈까 고민할 때다. 구글과 스탠포드에서 보듯이 미국 대학생들은 IP(지식 재산)전담 부서를 만들어 학생들이 특허를 얻도록 하고는 그 특허료로 학교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는 ‘반값 등록금’소리만 요란하다. 줄기세포도 그랬고 삼성과 애플의 특허분쟁에도 그랬지만, 특허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 정치인들, 대선후보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경우를 보기 힘들다.
“창조적 상상력으로 차별화한 제품을 만들어가야 해. 그렇게 하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 그 접촉면에서 인터페이스 혁명이 일어나야 해. 그를 통해 새로운 지적 재산의 강국이 돼야 해.”
신문은 하루만 지나면 구문이 된다. 이 교수의 디지로그도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퇴색한 신문과 함께 구문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디지로그라는 낯선 말에서 저 미래의 초원 냄새를 코로, 피부로 감각할 수 있다. 상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부정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외친 것은 의외로 시민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한국인이 그 철모르는 아이가 되자. 유럽 사람들 그리고 미국인들이 만들어 놓은 현대 문명 앞에서 주눅 들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어야 해. 그러려면 천진난만한 아이의 시선이 필요해. 발가벗은 것은 발가벗은 것이지. 문명은 거추장스럽고 물질과 돈뿐이야. 사람의 영혼과 눈빛은 점점 도시로부터 멀어져가지. 도시의 밤이 휘황찬란할수록 인간의 눈은 점점 그 빛을 잃어가.”
이 교수의 어조는 밝지도 어둡지도 기쁘지도 않다. 그런데도 그 한숨 속에 초원에서 불어오는 삽상*한 미풍이 느껴진다.
*삽상하다 :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마음이 아주 상쾌하다.
첫댓글 2022.2.26 이어령 교수가 향년 89세로 운명하셨다. 삼가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