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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부터 거의 200년에 걸쳐 교황의 독려와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성지를 차지하기 위해 서유럽 군대가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수차례 일으킨 전쟁이다. 일부 학자는 7세기부터 15세기까지 자기 신앙을 위하여 일어난 모든 충돌을 다 포함하기도 한다. 심지어 2011년 911 테러 당시 미국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십자군'으로 언급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다.
일부 아랍(종교 관계없이 아랍 지역 출신) 학자들은 '정치적이건, 군사적이건, 석유를 무기로 삼건, 서구 세계에 맞서는 모든 행위는 그동안의 공격에 대한 이슬람의 당연한 복수'로 간주하여도 무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이슬람인들의 피해 의식이 깊고 그 뿌리는 십자군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많은 전투와 충돌로 점철된 십자군 전쟁에 대한 유럽인들의 시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서는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기독교 교회가 대중의 무지와 미신을 선동하여 벌인 전쟁이라고 비판한다. 볼테르 Voltaire 는 비이성적인 맹신,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망, 교황청의 선동과 거기에 넘어간 무지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에드워드 기번 Edward Gibbon 은 신앙이 다르다고 성전을 벌인다면, 상대방도 똑같은 이유로 기독교도들을 공격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세기에 들어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로 등장한 낭만주의 학자들은 민족주의 정서와 함께, 야만과 무지를 상대하는 기독교의 투쟁으로 본다. 심지어 야만적인 이슬람 세계를 문명과 진보의 세계로 이끌어 내었다고 이집트를 점령한 프랑스 왕국과 나폴레옹의 공헌을 높이 사기도 한다. 십자군의 영웅적인 서사시가 대중의 인기를 끌고, 해외식민지 열풍과 함께 긍정적인 평가가 잇따른다.
십자군 전쟁 동안 활발해진 쌍방 간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발전 등의 장점도 있지만, 그 전쟁이 저지른 살륙과 서로에게 남긴 상처와 원한을 고려하면 장점이 오히려 궁색해진다. 이교도에 대한 성전이라고 시작하였으나, 기독교 내부도 분열되고, 서로 배신자라고 낙인 찍고, 4차 십자군의 비잔티움 제국의 점령으로 동.서 기독교 간의 분열과 반목까지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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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십자군 전쟁이 역사가들에게 늘 관심을 받는 이유는,
십자군 전사 중에는 부랑자나 전리품만 노리는 뜨내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사들은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순례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처분하여 무기를 장만하고 기나긴 행진에 기꺼이 함께 한다. 이들은 예수 부활 이후 최대의 종교적 사건으로 보았을 것이다. 전쟁에 참여한 전사 대부분은 고향 집으로 돌아 오지 못하지만, 이 전쟁은 중세 유럽 시대의 엄청난 활력과 긴장감을 보여준다. 십자군 전쟁은 중세가 '신앙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징표이다.
종교적 이상과 현실적 행동을 서로 일치시키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십자군 전쟁의 주요 인물 중에는 서로 비교되는 사례들이 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 (사자심장 왕 the Lionheart) 는 포로들의 몸값 지불이 약속보다 늦어진다고 2,700 여명의 살라딘 병사 포로들을 학살한다. 물론 성질 급한 그는 수천명의 포로를 끌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학살의 보복으로 적장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자기 부하 병사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과격한 결정이다.
반면 시칠리아 출신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여러 번 독촉 끝에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장수와 10년 동안 평화와 중립을 지키면서 서로의 성지를 존중하고 방해하지 않기로 무장해제 협정을 맺는다. 이는 다른 십자군에게는 배신행위로 보일 수도 있지만 무고한 희생을 막는 현실적인 성과이기도 하다.
클레르보 수도원장 성 베르나르 St. Bernard de Clairvaux 는 십자군의 성전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수도사와 전사의 이중적인 입장에 혼란스러워 하는 템플 기사단을 격려하고 회칙도 만들어 주고 사명감도 다시 불러 일으켜준다. 곳곳을 순방하며 성전 참여를 독려한다. 적을 죽이면 그리스도의 영광이고 내가 쓰러지면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그의 설득은 대단히 호전적이다.
반면 성 프란체스코 St. Francesco 는 이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성전을 위하여 전사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 이집트에서 술탄을 만나 기독교를 설득한다. 물론 실패하지만, 칼 대신 말 - 설교와 설득 - 을 통한 평화적인 선교 정신을 실천한다. 이를 이어 받은 작은 형제회 Order of Friars Minor 는 선교와 봉사 활동을 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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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중세 서유럽인들은 이슬람 세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기독교 서유럽인들은 이슬람 세계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큰 혼돈 속에 있었다. 무슬림(=이슬람교 교인)의 건전한 생활 태도를 칭찬하는 일부 주장도 있었지만, 무슬림은 다신교를 믿고 우상숭배자이고 음란하고, 무함마드는 사탄이고 이단교주이고 난봉꾼이라는 속설이 서유럽인들에게 지배적이었다.
이슬람에 대한 지식 결여 상태는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 악의적인 왜곡과 심각한 오해로 더 심해지지만, 진지한 접근과 이성적 판단도 함께 싹트기 시작한다.
12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이슬람 학문의 가치를 인정하는 풍조가 조금씩 나타난다. 이슬람의 마비센나(이븐 신나)가 기독교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언급되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전달한 학자 아베로에스(이븐 루쉬드) 를 연구하는 모임도 생긴다. 단테는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 부패한 교황을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이교도 무슬림인 살라딘, 아비센나, 아베로에스들을 기독교 세례는 받지 못했으나 선량한 영혼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적 태도는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 서유럽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무지함과 고의적인 편견 뒤에 숨어서 십자군 전쟁의 자기도취와 상대방에 대한 맹렬한 분노를 내뿜는다. 이는 성전의 명분과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다신교, 우상숭배, 패륜과 음란으로 뒤집어 씌우는 본능적인 혐오라고 볼 수 있다. 서유럽의 문학 작품에도 이러한 왜곡된 편견이 자주 등장하는 데, 이는 대중들이 열광하는 이미지에 의도적으로 편승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이슬람에 대하여 더 정확히 알려고 하는 노력도 있다. 에스파냐의 무어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접근한 수도원장 피에르는 곧 자신의 무식함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들의 코란 Quran을 라틴어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러한 친절한 모습들이 이교도인 무슬림을 바로 받아들이는 관용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안다는 것과 공감한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이슬람에 박식한 사람들이 이슬람을 더 강하게 거부하는 현상이 생긴다. 기독교 교리와 공통 부분도 많고 심지어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더욱 이슬람을 인정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다.
결국 종말론적인 시각도 나온다. 종말론자들은 계시록을 내세우며 이슬람의 술탄은 적그리스도 Antichrist 의 우두머리이고 그들이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에 대한 서유럽인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 간의 복잡한 관계로의 경로를 짐작하게 하고, 한편 기독교 사회의 지식인 속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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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유럽 바로 알기, 이혜령 공저, 2021
다음은 유럽의 중세도시의 모습을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