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자비>
소승과 대승의 구별은 붓다의 가르침을 깊이 있게 고찰한다면 별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남방불교 스님들은 소승이라는 말조차 모릅니다. 북방불교인 우리에게 북전北傳대장경이
있다면, 남방불교인 그들에게는 남전南傳대장경이 존재합니다. 남전대장경도 한역으로
완역되었습니다.
성문聲聞과 독각獨覺이라는 소승의 개념은 중국, 한국, 일본 불교 등에만 있습니다. 대승은
소승을 폄하하는 이유로 ‘혼자 깨닫고 끝’,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베트남의 스님들이 한국의 스님들보다 이타적이지 않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 왜 대승사상의 핵심이 이타적 자비에 있다고 강조를 해 왔던 것일까요?
붓다와 연각이 연기緣起를 깨달은 것은 같은데, 어째서 후대에 연각이 폄하를 받는가라는
의문도 듭니다. 그래서 자비와 수행의 단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최초의 경집인 『숫타니파타』를 보아도, 자신의 마음을 잘 쓰는 방법(사실 불교는 용심用心을
잘해 안심安心을 얻는 종교라 해도 됩니다)을 설하시며, 항상 남을 배려하고 남의 아픔을
함께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붓다께서 법을 설하신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이타행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본생담 등에서 전생의 붓다가 짐승으로 태어났을 때도 짐승의 몸을 기꺼이 보시했다는 말들은
다 대승의 논사들이 보살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 낸 것이고, 전생의 업과 공덕의 개념,
붓다는 여러 생에 거쳐 수행을 했다 그래서 특별하다, 이런 내용들도 다 목적을 위해 설정된
설화說話들입니다. 업과 공덕의 문제는 선한 사람이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듯이, 그 인과因果
관계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수행의 시작을 이타적 행위로 무조건 단정할 수만도 없습니다. 출가 자체가 이타행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보살은 이타利他를 우선하고 자리自利는 스스로 따라오게 한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보살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마음입니다. 붓다마저도
실은 자신의 생·노·병·사를 해결하려고 출가를 한 것 이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는 그 법을 우리에게 ‘줄까 말까’ 고민도 하셨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이타와 자비는 무작정 발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주는 것이 안 주려고 움켜잡는 것보다 내 마음이 더 편하다, 이 정도는
뼈저리게 느껴야 이타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비심? 좋습니다.
자비심을 낸 후 그 많은 중생들의 수준에 맞추어 그 실천 방법은 어떻게 선택해야 하며,
명백한 악惡조차도 악이라 생각하지 않는 중생에게는 어떤 자비심을 내야 합니까?
참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수행의 깊이는 이타행의 실천으로 판단해도 전혀 틀리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이 어떤 실제적 이타행으로, 허기를 면하는 것이
하루하루의 과제인 중생을 위한 자비의 실천으로 감동과 희망을 주었습니까? 현실 속의
중생 중에는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말씀’보다는 한 끼의 ‘밥’이 더 절실한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실제적 측면에서 보면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해 볼 수는 있습니다.
수행자 역시 개인에 따라 욕망의 제어가 잘 되는 부분과 잘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는 최고였지만(다른 수행자와 비교해서 이것이 이미지 효과인지
실제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실은 역사 이래 가장 중생들에게 실질적 이익을 회향시킬
수 있는 수행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듯이 모든 사람들을 자비로써
감싸주는 일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성철 스님은 수행의 깊이는 있었지만 자기주장이
지나쳐 돈頓·점漸의 논쟁과 간화선을 수행하며 밀교식 다라니 수행을 병행하는 문제점을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법정 스님이나 성철 스님 같은 출가자이고, 그분들 못지 않은 훌륭한 스님들을
보아왔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한국을 대표하는(실은 많은 이들이 기억해 주는) 두 수행자의
공과功過를 냉정히 깨달음과 이타행의 실천인 자비심이라는 프리즘으로 조명해 보자는
것입니다.
바른 수행에 접어들면 이타행은 내 문제이지 남의 문제가 아닌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느 정도 제어되면 ‘이런, 저 가엾은 중생들을 이렇게 하면 단박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데’
이런 마음이 솟구쳐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이것이 수행의 첫 번째 완성인 ‘보시바라밀’인 것입니다.
붓다 시대에는 평생을 숲 속에서 명상 등 자기 자신만의 수행에만 빠져 있는 수행자들이
더 많았던 것같이 보이기는 합니다. 더욱 바라문들은 자비를 우선시 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자비적 이타행의 실천 개념인 ‘바라밀波羅蜜’을 만들어 낸 쪽도 대승이지만
말입니다.
다만, 이름이 대승이라고 무조건 이타행에서 소승을 앞선 수행을 한다는 오만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타행을 적극적으로 베풀 만한 객관적 위치에 오른 스님들이, 오직
말로만 하는 이타행인 법문에서 그치는 현실이 무척 아쉽다는 말입니다.
세간 중생들의 고통은 모두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인격을 유지하며 살기에는
해결해야 할 기본적인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수행자라면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스님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아쉬움이 많습니다. 스님들이 그 명성을
아직도 개인의 이익이나,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하고 있는 듯한 현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실어주는 그 신뢰를 고달픈 중생들에게 자비 회향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