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家'이란 집착執着의 뜻입니다 내려놓지 못하고 집착함입니다 무엇을 내려놓지 못할까요 나我를 내려놓지 못하고 남人을 내려놓지 못하고 중생衆生을 내려놓지 못하고 나이壽者를 내려놓지 못함입니다 중생을 내려놓지 못함에 따라 부처佛에 집착하여 내려놓지 못합니다 부처에 얽매어 열반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열반에 얽매인 삶이나 삶生과 죽음死에 얽매인 삶이나 얽매인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열반이란 삶과 죽음을 떠난 세계요 삶과 죽음이란 열반을 모르는 세계이지요 열반을 모르는 삶과 죽음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열반만 못하다거나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열반 세계가 열반에 이르지 못한 이른바 삶과 죽음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까요
나는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닙니다 무한한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수없이 출현하셨고 또한 출현하실 수많은 부처님들께서 오직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쓰셨습니다 역대조사와 천하종사도 예외는 아니고 지금 전국 수행도량에서 목숨 떼어놓고 수행하는 납자들도 오직 이 문제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난제難題를 해결하였나요 삶과 죽음의 문제가 잘 풀렸습니까 열반 경지에 오름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집이란 모음集의 뜻입니다 사성제四聖諦 중 집성제集聖諦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눌 줄 모르는 이른바 집착 때문입니다 새들隹이 옹기종기 나무木에 모이듯雧이 끊임없이 모으고 나눌 줄 모름 때문입니다 여기서 고통이 일어납니다
고통이란 본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이름씨名詞가 아닌 까닭입니다 고통은 형태를 지닌 이름씨가 아니라 집착으로 인해 느끼는 느낌일 따름이지요 고통과 마찬가지로 기쁨도 즐거움도 고정된 이름씨가 아닙니다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느낄 뿐입니다 마치 우리가 느끼는 행복처럼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모두 주관적일 뿐 객관적 명사가 아닙니다
집이란 매임縶의 뜻입니다 어딘가에 무엇인가에 얽매어 있음입니다 공간에 묶이고 시간에 묶이며 의지에 얽매이고 사물에 얽매이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얽매이며 철학과 역사에 얽매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집은 안주安住를 가리킵니다 인생에 안주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공간 속에서 영원히 움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집家을 나온다出는 것은 정체로부터의 이탈을 뜻합니다 따라서 출가자는 안주로부터의 이탈자며 영원히 꿈틀대고 움직이는 삶을 그 삶이 다하는 날까지 이어가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출가出家와 재가在家는 벗어남出이라는 움직씨와 머무름在이란 움직씨일 뿐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재가자는 끊임없이 이탈을 꿈꾸고 출가자는 늘 안주安住를 생각하곤 합니다
철길은 두 가닥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궤철로單軌鐵路monorail도 있다고요? 으레 모노레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로의 대표성은 두 가닥이지요 그리고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인 까닭에 특수성보다는 일반적인 예를 듭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놓고 어느 쪽이 소중하냐고 할 때마다 나는 곧잘 철로rail road에 견주곤 합니다 두 가닥 중에 어느 가닥이 중요하냐고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재가와 출가는 동일의 가치를 지닙니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같습니다 모습이 같으냐가 아니라 역할의 가치가 같다고 말씀드립니다 출가자가 없는 재가자라든가 재가자 없는 출가자는 역할에서 뒤뚱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범망경》<보살계본> 계율 가운데 그것도 48경구계輕垢戒가 아니고 10중대계重大戒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동등한 가치를 이미 설정하고 계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출가자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가 아니고 부처님과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삼보 가운데 승보에 관한 계율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든 길을 막고 물어보십시오 승보라고 할 때 누구를 먼저 들까요 으레 일반적으로 출가자를 먼저 꼽습니다 출가자를 먼저 꼽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순서를 앞에 둘 뿐입니다 순서를 앞에 둔다고 하여 반드시 가치를 위에 두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출가자를 앞에 두기는 하나 역할 면에서 궤를 달리한다 하여 출가 재가의 가치까지 달리하지는 않지요 마치 두 가닥으로 이루어진 철로에서 어느 한 쪽에 무게를 둘 수 없음과 같습니다 승가僧伽란 출가자만의 명사가 아닙니다 승가 속에는 재가자를 포함합니다 불자들 중에는 더러 그런 말을 하지요 "스님네는 삼보에 들어가잖아!" 그러니 높이 공경하고 받들어야 한다"고
두 가닥 철로에서 어느 한 가닥에 모든 무게를 집중시킨다면 그게 철로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요 무게 중심이 실린 가닥은 실린대로 실리지 않은 가닥은 실리지 않은 대로 균형을 이루지 못해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가자가 출가자로서 삭발에 방포원정方布圓頂의 모습을 한 채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 되겠는지요 재가자가 재가자의 모습으로서 출가자처럼 가정을 버리고 산중에 들어 홀로 걸어가는 게 맞는 일이겠는지요
이런 외형적인 모습을 떠나 출가자와 재가자는 동일 가치를 지닙니다 이들 두 부류의 역할이 다르다고 하여 가치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묶어 승가僧伽, 또는 승단僧團으로 말씀하셨지요 재가자가 출가자의 허물을 드러내도 안 되고 출가자가 재가자의 허물을 드러내도 안 됩니다 하물며 재가자가 재가자의 허물을 출가자가 출가자의 허물을 얘기할 수 있습니까
절에 처음 들어오면 배우는 텍스트가 보조국사 지눌의《계초심학인문》입니다 초심학인을 경계하는 글이지요 내용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집안 허물을 드러내지 말라"고요 한데 요즘은 '알권리'라는 미명하美名下에 무조건 까발리기부터 합니다 덮어줌이라는 미덕이 사라진 지 오래지요 사람들은 장점에 관심을 갖기보다 가십꺼리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가십꺼리가 되지 않도록 청정해야겠지요 불교 계율은 바라제목차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살생 횡령 사음 혹세무민을 네 가지 단두죄라 하여 중하게 다룹니다 그런데 한국불교 계율은 단 한 가지입니다 비구 250계 가운데 249가지 계율을 모두 깨트리더라도 눈도 꿈쩍 안 합니다 단 한 가지 사음계만 있을 뿐입니다 249가지 계율은 파계해도 파계가 아니고 오직 음계 하나 깨트림이 파계이지요
그렇다면 250가지 계율을 굳이 모두 다 받을 필요가 있겠는지요 비구니 348계를 다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대승보살계 10중대계와 48경구계를 애써 포살할 게 있을 것이며 애써 계를 줄 필요가 있을 것이며 애써 이들 계를 다 받을 필요가 있겠는지요 통일신라 시대의 원효스님이나 구한말 경허선사의 파계가 전체적일까요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음계 하나입니다 다른 계율이 얼마나 속상하겠는지요 "우리는 뭐 계율도 아니냐?"고 말입니다
여기《범망경》<보살계본> 십중대계에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도 계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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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10~14시 대비주기도 매주 토요일 18~21시 천자문 강좌
2. 곤지암 우리절 법회 매주 일요일 10:30~13:00 일요법회
3. BBS불교방송 법회 5월 9일 수요일 오후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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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곤지암 우리절 우담바라꽃입니다 앞으로 두 달 남짓이면 만 21년이 되는데 꽃은 그 모습 그대로 보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