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붙은 컵은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아
김정희
파란시선 0160∣2025년 6월 30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32쪽
ISBN 979-11-94799-05-4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사라지는 것은 시작하는 것이다
[지구에 붙은 컵은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아]는 김정희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새파란 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꽃 피는 밥」 「차가운 음식 속 부서지지 않는 뼈가 있어」 등 53편이 실려 있다.
김정희 시인은 시집 [벽이 먹어 버린 사내] [지구에 붙은 컵은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아]를 썼다.
인간의 조건에서 사랑과 신뢰와 희망은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삶은 더할 나위가 없는 행복의 형이상학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이 무너져도 희망이 있거나 희망이 없어도 사랑이 있다면 살아갈 만한 삶이 된다. 김정희의 시 세계에는 이와 같은 삶의 조건에 대한 질문이 내재되어 있으며 거듭 반복된다. 그리고 「꽃은 강철이 된다」라는 시편은 “누구와 울었을까/지나가는 얼굴들 사이/꽃, 서러움 등에 지고/달아오른, 심장으로 빛난다”라고 생의 의지를 다진다. 깊은 슬픔과 짙은 우울의 바다를 건너 “하지만 앞으로 가자/뛰지 않아도 돼/멀리 아닌 한 걸음이면 돼//기둥을 세우자”라고 말 건네면서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어둠 속에서 빛나는 강철/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는/강철이 될 거야”라고 다짐한다. 이러한 의지와 긍정으로 시인이 “누구도 보지 못할 사랑”을 발명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상 구모룡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김정희의 언어를 정원의 언어라고 불러 본다. 거기에는 큰키나무와 관목들과 풀들과 작은 꽃들의 향성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화려한 정원의 표면보다 어둑하지만 사려 깊이 정원의 이면을 들여다보느라 그녀의 언어에는 빛을 노래할 때조차 어둠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 정원은 간절하고 절실하게도 ‘혀 아래’에 있다. 좁고 축축한 곳에서 돋아나 본들 식물들은 색을 입지도 못하고 빛을 받지도 못하고 새와 벌을 불러들여 수정하지도 못하여 고독하게 굴절되고 마는 말들의 정원이라니! 그런 환경에서 태어난 식물들은 알비노의 언어로 발화하지만 밖을 뚫고 나오려고 애쓰지 않는다. 핼쑥하고 핏기가 없다. 밖으로 불쑥 이끌기에 세계라는 표면은 배려도 없고 우회도 없이 무분별한 햇볕을 쏘아 대는 곳이므로 시인의 노심초사가 손을 거두어들일 수 없다.
일인칭으로 감정이입하지 않는 그녀의 타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소수이고 상처가 있고 뭉툭하게 일반화하기에는 여리디여려서 세계에 노출되는 순간 그들의 목소리가 시들어 버릴까 봐 가만가만 얼굴을 맞대고 몸을 기울일 뿐 그 흔한 ‘처방전’을 함부로 내밀지 않는다. 어둠에게 가장 폭력적인 것이 빛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타자들은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에 있다. 그녀는 기울이고 듣는다. 듣고 진술한다. 그녀는 거리를 두지 않는다. 거리를 둘 수가 없다. 공감이라고 하지 않는다. 거리 없이 그녀의 언어는 마냥 축축하지 않다. 어떤 것은 새로 돋아나고 어떤 것은 스러지고 있어서 늘 가득해 보이는 정원의 성질을 잃지 않는다. 어둠의 생성성이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자기애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보란 듯이 배반하고 타자들과 동거할 공간을 나누어 주는 인류애가 그녀가 제시하는 빛이라면 빛일지도 모른다. 식물들이 빽빽한 틈으로 용케 찾아드는 그것처럼 그녀의 언어는 틈틈이 ‘해당화의 뜨거운 향을 좁은 틈으로 밀어 넣’으며 타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조말선 시인
•― 시인의 말
아직 사라지는 중
•― 저자 소개
김정희
시집 [벽이 먹어 버린 사내] [지구에 붙은 컵은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아]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혀 아래 정원 – 11
나의 낙원 – 12
닿지 않을 안개 나라 – 14
사라진 파도를 어디에서 찾을까 – 16
다가온 환영 – 18
떨리는 창문 – 20
컴팩트 – 21
리셋버튼을 누르면 – 22
물의 궁전 – 24
가시의 떨림 속 겨울이 부서지고 – 26
빈 얼굴에 가득한 돌멩이 – 27
점자책을 읽는 사내 – 28
플라스틱 정원의 지형도 – 30
제2부
접착 신드롬 – 35
깊숙한 방 – 36
지구에 붙은 컵은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아 – 38
인형 뽑기에서 건져 올린 네 얼굴 – 40
같은 얼굴 보이는 여기에 – 42
신호등 – 44
탄피 – 46
새파란 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 48
숨 비늘 – 50
만지작만지작 – 51
물결 경전을 읽는다 – 52
주전자 연기에서 나오는 말들이 – 54
꽃 피는 밥 – 56
박힌 구름 – 58
이불 속 바다는 물결치고 – 60
제3부
왕관을 위한 두 손 배롱나무 – 65
비밀의 입구는 출구입니다 – 66
잠든 나무 깨어나서 – 68
닿은 말 – 69
실을 타고, 처방전 – 70
댄스 댄스 댄스 – 72
칼날에 붙은 새순이 자라는 중 – 74
웃자, 날개가 돋았어 – 76
잠수함의 낮 시간 – 78
해당화 바람이 되다 – 80
꽃은 강철이 된다 – 82
정주 증명서 – 84
차가운 음식 속 부서지지 않는 뼈가 있어 – 86
제4부
떠다니는 섬이 실종되어 – 91
죽어 가는 신이 다시 죽으려 왕림하고 – 92
발톱이 돋고 날개가 돋아 – 94
등 뒤의 빈 곳 – 96
냉동된 봄날의 점프 – 98
빛나는 어둠 – 100
뭄베이 호텔 – 102
사냥꾼의 마지막 주문 – 103
무릎에서 딴 물든 사과 – 104
마조렐 블루, 서쪽으로 돌리는 얼굴 – 106
냉장고 문을 열면 꽃밭이 – 108
돌아가는 팔찌 – 109
해설 구모룡 애도의 시 쓰기 – 110
•― 시집 속의 시 세 편
새파란 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모조품에서 장승까지 진열한 컨테이너
눈빛 레이저를 발산하는 남자가 있다
하늘의 경계에 사는 사람 물끄러미
개에게
네모 세상을 관통하는 말을 뱉는다
“행복하구나”
“부끄러움으로 토굴에 가서 살고 싶다”
얼굴을 붉히는 그는 무엇이 부끄러웠을까
여행은
돌아올 곳에서 떠나는 법
지구를 담은 깡통에 담뱃불을 털고
사소한 별이 달려오는 밤
헛헛한 웃음이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짐승처럼 이름을 벗고 살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직장을 가졌고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오십을 넘긴 남자
깃털을 단 인디언 추장이 앉은 오토바이
바퀴에 발을 얹으면 완성되는 그림
시동 걸 엔진은 죽었고
우주 사막의 생명체로 남은 심장 하나가 시동을 건다
“내가 사라지면 외계인이 찾아올 거야”
숭숭 구멍 난 옷이 뱃속으로 빨려 간다
외계인의 도착을 알리는 별 하나 컨테이너에 닿으니
오늘 긴꼬리 유성이 춤추며 땅으로 박힌다
정상품이죠 ■
꽃 피는 밥
한 잎이라도 흩어진 꽃잎이라도 보고 싶어요
따르는 동생은 잘 돌봐줘야 한다는 약속은 지켰는데
하교 후 동생은 서둘러 저를 안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담배 연기를 삼켰다 뱉었다 하는 아버지
나도 흰 연기로 사라질 것 같아요
동생을 만나는 건 두렵지 않지만
선생님도 같이 간다면 동생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밥 앞에서 입을 닫았던 아이
썩어 가는 밥 위에 꽃잎 하나를 얹고 싶어 했던
찬마다 밥마다 피는 꽃
사라지지 않는 꽃들 조화이기를 바랄 뿐이라고
죽지 않는 꽃
꽃 없는 밥은 씹을 때마다 앞이 흐려지는 밥이었지
터미널에서 먹는 밥
먼지가 밥 위를 차지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그릇을 울렸어
모르던 형아들이 꽃 없는 밥을 줘요
한 입마다 떠나지 못한 향기가 묻었지
숱한 꽃들이 머릿속에서 터지듯 피었죠
사라지지 않는 향 끈적끈적한 기억으로 감도는 향기
그런 밥을 안 먹었다면 머릿속 꽃들은 피지 않았겠죠
집으로 가자는 사람은 없어요
여긴 꽃이 피지 않아 좋아요
또래보다 작은 아이 웃음은 깨어진 유리
넌 여기로도 집으로도 오지 않고
발밑에서 하늘 끝까지 이어진 빛으로 날아갔지
조팝꽃들이 하얗게 피어
네가 돌아오지 않는 날들을 덮었어 ■
차가운 음식 속 부서지지 않는 뼈가 있어
다시 살아날 때는
맞닿은 온기가 냉기를 밀어낼 듯
서로를 감싸는 체온이
부드럽게 뼈를 빚는다
파르메산 치즈를 골고루 뿌린다
가늘게 갈린 뼛가루
염증이 깃든 실패의 맛과
칼칼한 핫소스와 함께
차가운 음식을 섞자 흔들리는 몸통
혀는 잔해들을 엮어
찬 덩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건 새로운 것일까
조각난 기억이 녹아든 것일까
움직임 없는 창밖 풍경
희미한 불빛을 혀끝으로 우물거리자
어두워진 거리는 점점 엉켜
창 모서리 비스듬히 걸린 달빛도
빛의 결을 흩뜨리며 사라진다
마지막 남은 한 입
식탁 위 식은 조각
잔열은 천천히 사그라지며
지워진 흔적을 더듬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