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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지명 연구』
사실 부산에 살면서도 부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데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사는 화명동은 ‘화산 아래 명당’이라는 뜻이라고 화명지하철 역에 소개되어 있어서 알고 있지만, 다른 곳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부산의 지명 연구』이 책은 부산 토박이로 부산대를 나온 뒤에 부산대 교수로 재직 중인 이근열, 김인택 선생이 엮었다. 양이 좀 방대한 것은 제목에서 보듯 일반독자에게는 쉽게 접근이 어렵게 하는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산 지명의 연원, 구포와 동래, 만덕고개, 문현고개 어원, 지명해석 오류, 마을의 변이 양상, 지명 속 지역어와 전설 등으로 되어 있어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알게 해 주리라는 생각은 하게 된다.
“지명은 조상들의 고유한 인식의 출발점이자, 세계를 인지하는 그릇이다. 현재의 지명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우리말 지명이 한자로 바뀌고 스토리가 더해져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만덕고개는, 만 사람이 무리 지어 올라가야 도적을 피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지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고개를 넘기 위해 만 명이 모여야 한다면 고개를 넘으려면 여러 날을 기다려야만 가능할 것이므로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만’을 인지하기 쉬운 만(萬)으로 고정한 탓에 그 같은 전설을 만든 것으로 보이고, 이런 해석의 오류가 인터넷을 타고 더욱 강화되고 고정되어 정보와 인식의 오류를 확대하고 나아가 재해석될 위험에 처한다. 지명은 ‘언어와 문화의 화석’으로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조상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고결한 자본이다. 지명이 낡은 고전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 금정산 기슭에서 이근열, 김인택 – 책 머리말 일부다.
책의 저자인 이근열 교수가 참여하기도 한 『부산지명총람』(1995년,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발간)에는 부산의 구·군별 인문지리 정보를 집대성한 여기에 동리별 연혁, 산천, 공공기관, 명승고적, 민속, 시장, 자연마을, 유적 등 4,526개 항목이 수록되고, 자연마을 659개와 산, 고개, 골, 언덕, 바위, 평야, 하천, 해안 등 산천 지명 2,195개가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지명들의 어원은 구전되어온 자료로 민속학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이 많아 국어연구 자료로는 검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지명에 관련된 어휘, 즉 밑말을 중심으로 논증을 시도하였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노포동은 ‘너른 나루’고갈산은 ‘고깔모양의 산’마비현은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한태는 ‘너른 터’ 고래뜰은 ‘넓은 들’ 화현은 ‘입구 마을’호현은 ‘첫 고개’ 가자골은 ‘가장(假葬)을 하던 골짜기’널박은 ‘너른 들’로 교정해야 한다고 이 교수는 지적한다.
◎ 톳고개, 만덕사(萬德寺)
톳고개는 토곡이라 불리는 고개, 만덕사는 만덕동에 있는 만덕사지를 말한다. 동래읍성의 인생문(人生門)은 입성문(入城門)이며, 톳고개는 동래성으로 또는 수영성으로 가는 고개다. ‘흙고개’라는 말에서 토현(土峴)이란 말이 온 것이다. 또한 기비현(岐毗峴)을 만덕고개 어원이라고 하나, 만덕고개는 기비현보다 후대의 지명이다. 만덕고개가 만덕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원래는 ‘맏등고개’로, 높은 등성이 고개라는 뜻이며, 기비현은 기비골에 있는 고개로, 기비는 ‘깊다’는 뜻에서 솝, 즉 ‘속’의 의미로 해석된다. 기비현은 지금의 만덕사(지)를 이르는 기비사보다 오래된 지명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유일하게 실려있는 고개가 만덕고개로서 그만큼 역사적으로 요충지로 본 것이다. 김해평야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낙동강 하구의 해산물, 소금 등의 집산지인 구포로 통하는 최단거리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만덕고개는 동래에서 3㎞, 구포에서 5㎞로 20리나 되는 비탈길로서 금정산맥 북동부 상계봉과 백양산 사이의 안부로 해발 290m인데, 구덕령이 220m인 것에 비하면 부산에서는 가장 높은 고개에 해당한다. 부산의 중심이었던 동래에서 가깝고 양산과도 가까운 전략지 요충지였던 만덕고개는 기비사, 기비현보다는 늦게 불린 지명이며, 맏등, 즉 ‘가장 높은 등성이’에서 만등〉맛등〉만덕으로 변화한 것이다.
민덕사지 당간지주
◎ 富山과 釜山
‘釜山’이란 지명은 부산이란 산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부산에는 ‘부산포, 부산진’으로 부르는 곳은 있어도, 부산이라 불리는 산은 없다. 부산에 사는 사람도 부산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엉뚱한 곳을 지적하기도 한다. 지금 금성고등학교 뒷산이 증산(甑山)인데, 이 시루산이 부산으로 바뀐 것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증산은 임란 이후 생긴 이름으로 부산과 관련이 없다.
부산이란 명칭은 『태종실록』(1402년, 태종2)에 등장하고, 『세종실록지리지』(1454)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다. 『성종실록』(1470년, 성종1)에도 나타나는데, 이때는 富山이란 명칭이 혼용되다가 『동국여지승람』(1481)이 완성된 15세기 말부터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되었다.
◎ 당감(堂甘)동, 감만(戡蠻)동
‘당감’과 ‘감만’이 부산의 지명과 관련 있다는 설도 있으며, 당감은 당리(堂里)와 감물리(甘物里)가 합쳐서 1914년부터 부른 지명으로, 여기서 감은 변화된 형이고, 물은 산을 지칭한 것으로 ‘가마뫼(釜山)’라는 것이지만, 감물리는 ‘큰마을’이란 뜻이므로, 부산의 의미와는 관련이 없다. 백양산 아래 부족국가이던 거칠산국이 신라 17대 내물왕 때 신라에 병합되어 거칠산군이 되고 대증현을 설치했다. 757년(경덕왕 16)에 거칠산군은 동래군으로, 대증현은 동평현(東平縣)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부산이란 지명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신라시대에 대증현이 존재했다는 것은 신라 경덕왕 이전에 증(甑), 즉 시루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것이므로, 이도 부산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감만동은 감만이(戡蠻夷)로, 가마이(可摩伊), 가마니(可摩尼)로 기록되어 전하는데, 가마포를 음차하면 감만이 된다. 가마포, 가마는 ‘큰, 너른’을 의미하고, 가마포는 큰포구를 말한다. 따라서 큰포구라면 감포(甘浦)나 부포(釜浦) 등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있으나, 부산(釜山)으로 바뀔 가능성은 없다. 감만포 뒤 흥곡산 남쪽 끝을 적기(赤崎)라고 부르는데, 이곳 암반이 오랜 풍화작용으로 붉은 띠를 띠고 있기 때문으로, ‘감만이’는 부산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부산에 부산이란 산은 없고, 부산 어딘가가 가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 구덕산과 꽃마을
구덕산(九德山, 舊德山)은 서구 서대신동과 북구 학장동 사이에 있는 산(562m)으로, 고저기(古底岐), 구지지(久至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아홉 九와 옛 舊로 나타나는 것은 원래부터 구덕이 아니라, 음차한 것임을 말해 준다. 德은 ‘언덕, 둔덕’의 땅이름으로, 갈림길을 뜻하는 기(岐)가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갈림길이나 통로가 땅이름의 요소로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저나 구지는 ‘곶’이나, ‘궂’의 한자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곶과 궂은 해안이나 평야에 육지나 산이 뻗어 나온 곳을 의미하지만, 땅이름으로는 구지, 꼬지, 곶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입구를 뜻하는 구(口)의 대응 표기로 반도의 의미가 아닌, 입구의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곶덕, 궂덕’이 ‘고지기’와 ‘구지기’로 음차 되어 구덕으로 표기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구덕산 아래에 ‘구덕령’이라는 고개가 있으며, 통로로 사용된 완만한 구릉이다. 이곳은 대신동과 학장, 나아가 구포까지 연결되는 교통로이다. 부산과 김해, 밀양을 연결하는 통로다. 학장 쪽에는 매립 흔적이 없지만, 예전에는 학장동까지 낙동강 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구덕의 입구 혹은 통로’라는 의미로 구덕령이라 불렸고, 이것이 구덕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고개 위에는 꽃마을이 있는데, 한국전쟁 후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꽃을 재배하고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구덕령에 주막이 있었다는 것과 밖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다면, 이전부터 마을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고 전에는 많은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피란민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마을이 커졌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피란민들이 원래 마을 이름을 없애고 새로 만들었을 가능성은 적으며, 꽃마을이란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도 적다. 꽃은 곶과 유사한 발음으로 ‘곶마을’에서 된소리로, ‘꽃마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구덕산은 ‘입구의 언덕이 있는 산’, 꽃마을은 ‘곶마을’이 된소리로 변한 것이라는 것이다.
◎ 구포(龜浦)
구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덕천동을 가로지르는 德川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 김해 대동면과 연결하는 나루터가 있어서 낙동강 3대 나루터 중 한 곳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구포는 감동진(甘同津), 감동나루, 구복포(龜伏浦)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금정산에서 발원한 德川이 낙동강과 합류하여 퇴적층을 만든 곳으로 고대부터 문화가 발달한 곳이며, 양산과 동래로 가는 길목이어서 군사적·경제적 중요 요충지다. ‘구포’라는 지명은 강 건너 금관가야 건국설화에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구지가(龜旨歌)와 연관되어서 구포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가장 오래된 구포라는 지명은 신라 시대에 구법(九法) 혹은 구법(仇法)이라 부른 것인데, 이들 구는 훈차가 아닌 음차일 가능성이 크다. 구는 ‘크다’의 ‘크’에 대응된 표기로서 원래 지명이 구법포에서 구복포로 변화되고, 다시 2음절인 구포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구복포는 ‘물이 크게 나뉘는 곳’혹은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강 유역을 ‘어귀’나 ‘어구’라고 하기도 하고, 두물머리라 하기도 하는데, 두물머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 이내(二川), 이포(二浦) 등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귀천(龜川)은 발음상 구천(舊川) 또는 구천(九川)이 되고, 구(龜)는 강물의 합류 지점 특성을 반영한 지명이다. 甘同+浦의 甘은 ‘맛이 좋다. 맛이 달라’라는 뜻이고, 지명으로 쓰일 경우는 감천(甘泉)과 같이 수식어로 쓰이는 경우 이외에는 음차로 보아야 한다. 同은‘한가지, 같다’는 뜻이고 ‘갇’의 훈차 표기로 감동포는 ‘크게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 나루’를 의미한다. 구복포에 대응한 표기다.
따라서 구포는 감동포, 구법포, 구복포 등 여러 지명으로 불렸고, 신라시대 城인 의성(義城)이 있었으며, 하천인 덕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단순히 ‘거북이’라는 한자음으로만 해석하면 다양성은 물론 지명과 지물의 상관성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구법포, 즉 큰물이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 나루터로, 감동포 역시 큰 갈래가 위치한 나루로 그 어원이 같다. 다시 말해 구법포의 2음절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두물머리인 이포(二浦)에서 귀포(龜浦)로, 이것이 거북龜으로 바뀌어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법포와 감동포는 두 물이 만나는 곳, 혹은 갈라지는 곳에 위치한 ‘큰 나루’라는 뜻이다.
◎ 동래(東萊)
‘동래’라는 지명은 고대로부터 있었지만, 그 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동래는 원래 가야지역이었으나, 신라에 병합되는 과정에 우시산국,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등 여러 국명이 나타나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동래읍성은 고려 우왕 13년(1387) 원수 박위가 축성했으며, 임란으로 성이 크게 무너져 1731년(영조7)에 동래부사 정인섭이 안락동, 명장동까지 확장하고 동서남북 4대문을 쌓아 지금의 동래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전에는 동래읍성이 해운포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수영강 하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수영동과 망미동, 통합병원 일대와 옛 수영비행장 일대를 말한다.
장산국의 다른 이름 내산국에서 장산=내산 → 거칠산→ 동래로 변화한 것이라는 것인데, 장산은 해운대에 있고 내산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또 동래는 ‘독로’라는 음에서 동네 → 동래로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동쪽(동해)내산에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 삼신산의 약칭이라는 주장도 있다. 『동국여지승람』「동래현조」에 “옛 장산국이다. (혹은 내산국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점유하고 거칠산군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했다. 독로(瀆盧)라는 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변진조」에 있는 국명으로 정확히 어딘지 비정이 어렵고, 최남선은 거제를 독로라고 하기도 했다.
산 이름은 중요 지명의 표상이고, 지명이 곧 산 이름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보편적 인식의 산물이다. 그런데 고대 지명 중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 이름이 후대에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발되거나 옮겨간 것이 아닌데도 위치가 비정되지 않는 이유는 구체적 장소를 지정하지 않거나, 고유어인 지명을 음차하거나 훈차하는 과정에 다른 지명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지역에 따라 동쪽에 치우친 강 ‘낙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강 하구에 세 개의 섬이 만들어졌다고 하여 ‘삼차수’라 불리기도, 황산 앞에 있다고 하여 ‘황산강’으로 불리기도 했다. 물금 부근으로 알려진 황산강은 낙동강의 일부를 말하지만, 정확한 산 이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산이름의 취치와 지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황산에는 황산잔도라는 험로가 있는데, 과거길에 오르던 한잔 걸친 선비들이 부지지수로 빠져 죽었다고 하기도 하는 곳이다. 또 신라 시대에는 신라와 가야의 접전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물물교환을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하여 물금(勿禁)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말이 있는 곳으로, 조선정조 때 황산찰방을 지낸 조석목(趙奭穆)은 물금 뒷산 오봉산을 황산으로 비정하기도 했다.
◎ 황령·불태령·불웅령
황령산은 원래 산 이름이 아니다. 추상적으로 ‘큰산, 큰고개’라는 뜻이었다. 황령으로 표기된 것은 구체적으로 산의 명칭이 아니라 령(嶺)이란 의미였다. 황령산을 중심으로 한 큰령은 황령을 포함하여 배산, 금련산, 행정산 등 여러 산을 의미한다. 황령산이 구체적으로 지명을 얻자 다른 산도 구체적인 지명을 얻고, 거칠산, 즉 큰산이란 의미는 사라진 것이다. 불태령은 만덕에서 초읍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불터’가 보이는 령이라는 말이다. 불터란 절터, 즉 만덕사와 병풍사가 보이는 곳이란 뜻이다. 불터를 한자로 옮기면서 불태(佛態)가 되었는데, 態가 곰웅(熊)자와 유사해 혼란이 일자 불웅령으로 부른 것이다.
‘만덕고개’라고 불리기 전에 이 고개를 ‘기비현’, 즉 기비고개라고 불렀는데, ‘기비골’인 골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만덕사지에서 ‘기비사(祈毗寺)’라고 적힌 기와가 나와 만덕사보다 기비사가, 만덕고개보다 기비현이 먼저라는 것이다. 기비(其比), 사비(射比), 기비(祈毗) 등 다양한 한자로 표기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원래부터 특정 한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고유어 지명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기비골은 골짜기 지형에서 연유한 지명이며, 기비사는 기비골에서 연유한 지명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비골은 만덕동에서 덕천, 화명, 구포까지 펼쳐진 넓은 지역으로 보는 연구도 있어서 기비골은 고대의 기비국에서 연유한 이름이고, 기비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문현(門峴)
문현동의 문현은 지게(門)와 고개(峴)에서 온 말이다. 문현동이라 부르고 나서, ‘문현고개’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은 잘못된 추정이고, 문현고개 이전에 ‘지게골’과 ‘지개고개’가 있었다. 문현은 문현동에서 대연동으로 넘어갈 때, 고개가 높고 산이 양쪽으로 겹쳐 있어서 마치 집밖에서 ‘지게문(문풍지가 두껍게 달린 외짝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는 형세’라는 데서 ‘지게문고개’를 한자로 적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래 산 지역민들은 지개골의 골짜기 형태가 마치 ‘집게’와 같다고 하여 ‘넓고 아늑한 집게 모양’에서 지개골이 연유했다고 하기도 한다.
문헌에 문현이라 지명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32년(순조32)에 간행된 『동래부읍지』로 이전까지 문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고유의 자연 지명을 당시 관리가 한자로 옮기면서 ‘문현’이라고 쓴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지게골고개’에서 비롯된 문현은 문 너머, 문 너매, 문넘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들 모두가 고개를 의미한다. 결국 문현은 ‘찌께골, 찍게골, 찝게골’등으로 불리던 지명이 어원 의식이 약해져 유사한 어감의 ‘지게’로 대체한 형태다. 따라서 지게의 의미는 ‘문고개’의 의미와 문(門)으로 고정된 것이다. 그러나 넓고 아늑하게 파인 집게 모양의 고개에서 연유했다는 것도 확인되므로 정확한 지명 어원이 밝혀지기는 어렵다.
1937년 동래향교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에 의하면 동래읍에는 복천·수안동 등 18개 동이 있었고, 서면(西面)에는 범전리(凡田里), 연지리(蓮池里), 초읍리(草邑里), 부암리(釜巖里), 당감리(堂甘里), 가야리(伽耶里), 개금리(開琴里), 양정리(楊亭里), 부전리(釜田里), 전포리(田浦里), 문현리(門峴里), 대연리(大淵里), 용호리(龍胡里), 용당(龍塘), 감만리(戡蠻里), 우암리(牛巖里)등 16개 동리가 있어 지금의 부산진, 연제, 남구와 수영구를 아우르고 있고, 구포면(龜浦面)에는 구포리(龜浦里), 덕천리(德川里), 만덕리(萬德里), 금성리(金城里), 화명리(華明里), 금곡리(金谷里)등 6개가, 북면(北面)에는 부곡리, 구서리 등 8개 동리가, 사상면에는 주례, 덕포 등 9개 동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류두동(柳斗洞)이 있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사하면에는 하단, 신평동 등 9개 동리가 있었는데 지금과 거의 변함이 없다.
◎ 부산의 강·산·고개
낙동강은 낙양(洛陽)의 동쪽, 즉 ‘상주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지만, 지역에 따라 대저도(大渚島)를 중심으로 세 갈래 물줄기가 흘러 ‘삼차강’이라고 하기도 하였고, 양산 물금 앞을 ‘황산강’, 가야진사 근처에서는 ‘용당강’이라고 부른다. 또 내 고향 남지에서는 기강(歧江,혹은 거룬강)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금강을 낙화암 근처에서 백마강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금정산도 지역에 따라 선암산, 백양산, 화산, 상계봉, 고당봉 등 다양하게 불린다. 이는 산맥을 중심으로 명명하지 않고 특정한 위치와 지역에 따라 불린 특성 때문이다.
부산은 금정산이 서쪽에 위치하고, 동쪽으로 황령산과 장산까지 길게 둘러싸인 곳이라서 경계를 이루는 고개가 많다. 동래와 구포를 이어주는 만덕고개, 양산과 동래를 이어주는 사배야고개, 대신동에서 구포로 넘어가는 구덕고개, 대신동에서 괴정을 넘는 대티고개, 충무동과 감천을 이어주는 가치고개, 전포동에서 대연동을 잇는 ‘못너미(모너미)’고개, 동래에서 부산을 잇는 마비현 등.
◎ 윤산(輪山)과 마안산(馬鞍山)
예전에는 동래읍성이 부산의 중심이었다. 동래의 주산 마안산은 산이 ‘말안장’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동래의 진산이 윤산(輪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마안산은 말안장을 닮지 않아 지형의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은 아니다. 또 윤산이란 ‘바퀴산’이라는 것으로 지형이 둥글다는 뜻이지만 그산은 둥글지도 않다. 그러나 바퀴는 ‘구르다’를 추론하는 말로 윤산, 구불산, 구월산 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바퀴의 고어가 ‘박회’, 바쾨→바키로 변한 것을 고려하면, 윤산은 마안산과 달리 ‘동래읍성 밖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마안산처럼 말의 안장을 연상하는 산은 아주 많다. 능선을 안부(鞍部)라고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말’은 ‘크다’는 의미와 ‘마을’이라는 말과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으므로 마안산은 ‘마을 안에 있는 산’즉 ‘말안산’이 되고 이것이 그대로 표기된 것이다. 마안산이 동래읍성 안에 있는 것이고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 인생문(人生門)
동래읍성에서 명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인생문’이란 문이 있고, 임란 때 여기를 넘어서 ‘피란 간 사람은 살아났다.’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는데, 인생문이 동래성의 성문은 확실하지만 공식적인 성문은 아니다. 또 임란 때 방비가 허술한 이 문으로 왜군이 쳐들어왔으며 전쟁 후에는 상여가 동래성 밖으로 나가는 문이었다고 한다. 사람을 살려낸 문이라면 활인문(活人門), 구명문(救命門), 구인문(救人門) 등 어순으로 표현되어야 맞을 것으로, ‘인생문’그 어원이 잘못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또 사자(死者)의 출입으로 ‘인생무상’에서 유래됐다고 하더라도, 인생문 이름은일반적 원칙에도 어긋난다. 이게 인생문 어원을 부정하는 이유다. 문과 연결된 명장동은 동래성과 관련된 중요한 장소로 동래성 북쪽에 위치해 무덤터인 ‘가장터, 생장터’가 있었으며, 성밖의 천민 거주지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자유롭게 성을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비공식 문이었는데, 인생문의 어감은 ‘입성문’일 가능성이 높고, 그것이 삶과 죽음에 관한 해석과 맞물려 입성문과 유사한 ‘인생문’으로 부른 것이라는 것이다. 동래성의 문루는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이 크게 중수하고 4대문의 이름을 정했는데, 동문은 지희루(志喜樓), 서문은 심성루(心成樓), 남문은 무우루(無憂樓), 북문은 암문으로 은일루(隱一樓)라고 했다.
◎ 부산지명총람
1995년부터 2002년까지 8년간 부산지역 종합지리서인 『부산지명총람』8권과 색인을 부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완성하였다. 여기에는 산천지명 2,195개와 자연마을 659개, 민속 281개 항목이 수록되어 있으며, 민속과 관련해서는 당산 지명이 가장 많다. 도심은 개발로 사라진 후이나 새롭게 편입된 기장군과 강서구는 고유의 산천 지명과 당산이 많이 남아 있고, 특히 해안 관련 지명은 이들 구·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참여한 향토사학자, 민속학자, 역사학자들이 역사·민속적인 면에 치중하여 채록한 것이어서 지명에 대한 언어적 접근은 부족한 상태로 보인다. 지명의 전설과 관련하여 어원을 밝힌 것도 있고, 음운에 따름으로써 원래의 의미와 전혀 달리 분석된 것도 있다. 지명이란 원래 그 지역 토박이들이 자신의 말로 명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당시 언어체계와 음운 체계를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고유어로 된 지명이 한자로 표기될 때 변이될 수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 배산(盃山), 노포동(老圃洞)
연제구 연산동의 배산은 잘매산, 잘미산, 절미산, 잘뫼산, 척산 등 다양한 지명으로 나타나는데 ‘옛 성터가 있던 산’이라는 기록에 비추면 ‘성산=잣뫼’로 해석된다. 잣뫼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 배산 혹은 척산(尺山)이 되고, 잣뫼가 음운현상으로 잘미 잘매 잘뫼 등 다양하게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노포동의 경우, 늙을 노, 농사 짓는 사람 포로 해석해 ‘농사를 잘 짓는 농부’혹은 ‘농사가 잘되는 마을’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토박이말을 한자로 옮겨 생긴 오류로 보인다.
지금은 노포동이 물이 없는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물가서 나루가 있었을 가능성이 점쳐지는데, 기록은 사천(絲川), 즉 지금의 수영강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 노포지역이라고 했다. 또한 1950년도까지 이곳은 습지로 퇴적층이 발달했는데 금정산과 천성산에서 내려온 물줄기로 습지가 생겼고, 그 수원으로 너른 땅이 생겼으므로 농사가 잘되는 곳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양산으로 들어가거나 넓은 사천(수영강)을 따라 동래로 가는 뱃길이 있었다는 것에서 ‘너른 나루’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포동에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군이 있다는 것을 볼 때 고대에는 이곳이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높기도 하다. 더구나 인근 철마면 입석마을의 선돌 유적이 수영강을 오르던 배들의 종착점이란 것을 알린 표석이라고 비견할 때, 결국 너른 교역의 중심지가 된다. 언어적으로는 너른이 ‘늘’혹은 ‘느르’일 가능성이고, ‘느르개/너르개’가 ‘넓은 나루’의 원래 뜻을 가질 수 있고 이것이 ‘늙/넑-’으로 인식되어 오래된 나루가 되어 결국 늙은이라는 말이 한자 노(老)로, 개는 포(圃)로 표기되어 오늘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노포는 ‘너른 나루’로 보는 것이다.
◎ 고갈산(枯渴山 또는 沽渴山)
지금은 봉래산(蓬萊山,394.6m)이라고 불리지만, 얼마 전까지도 이 산을 ‘고갈산’혹은 ‘고깔산’이라 불렸다. 봉래산은 1885년 절영도 첨사를 지낸 임익준이 붙인 것으로, ‘동해의 바다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봉래산은 조봉(祖峰)·자봉(子峰)·손봉(孫峰)의 세 봉우리로 된, 인위적으로 붙인 이름이므로 그 어원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고갈산이나 고깔산이라고 하면 문제가 된다. ‘목이 마른산’또는‘마른 도마뱀의 산, 물이 말라서 없어지는 산’이라고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용머리에 해당하는 용두산의 용이 물을 마시는 것을 끊기 위해 ‘고갈산’이라 명명했다고 알려지기도 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고갈산은 ‘고깔산’음차표기로서 고갈산의 한자 해석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은 오류다. 일제 강점기 지명을 정리한 『조선지지자료』에는 ‘고갈산’이란 이름이 없고, 봉래산으로 실려있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봉래산 속칭은 ‘고깔산’이었다. 그러나 3개 봉우리 모양은 고깔 모양이 아니다. 그래서 영도 사람들은 고깔산이 고갈산으로 변했다는데 의문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용두산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고깔 모양으로 보인다. 한때 고립된 지역, 유배지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돌아보면, 이곳에 부임한 관리들이 한탄할 정도였다면, 변방 고도임에 틀림이 없다. 고려시대 목마장이 있기는 했으나, 임란 후 공도(空島)정책으로 빈 섬이 된 적도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초량 쪽에서 속칭 ‘고깔산’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는 영도를 목도(牧島)라 부르고 목마산(牧馬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성덕왕조」에 왕이 김유신의 손자에게 절영도 명마 한 필을 주었다는 기록, 태종대가 태종무열왕이 활을 쏘던 장소라는 「동래부지」(1740년)의 기록 등으로 보아, 봉래산은 영도섬에 있는 큰 산이라는 이유로 영도산, 혹은 ‘목도산’이라고 하다가 목마산으로, 다시 봉래산으로 바뀌었고, 고깔산이 한자로 바뀌면서 고갈산이 된 것이다.
◎ 골, 산, 고개
우리말의 ‘골, 산, 고개’등은 자연물을 단일화한 것으로 그대로 부를 수 있기도 하나, 그것이 여럿이라면 변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피밭골, 뒷산, 야시고개’등으로 지명 특성을 고려하여 부른다. 자연물 자체가 지명이 되기도 하지만, 자연물의 특성을 가미하여 지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을의 고유어는 각단, 골, 실, 마실/모실, 말/몰, 동네 등으로 나타나는데 ‘각단’은 뜸과 같은 것으로 고유어다. ‘골’은 고을의 준말로 한자 동(洞)과 같다. ‘실’은 곡(谷)이란 뜻으로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실/모실’은 경상도 방언, ‘말/몰’은 마을 중에서 해안가, 강변에 접한 마을을 부를 때 쓰였다.
산은 메/뫼/미/모/무, 갓, 달, 배기, 먼데이/먼디이 등으로 불리는데 딧메, 동메 등으로 실제 한다. 고개는 고개 외에 재, 고재, 베기, 목, 매기, 티 등으로, 골은 걸, 골짝, 몰리, 골새이 등으로, 내(川)는 걸, 거랑/거렁으로 불렸으며, 우물은 새미, 샘으로, 바위는 방우, 방, 방구, 바우, 치, 뜸, 덤, 돌, 섬, 덜 등으로 불렸으며, ‘못’과 ‘들’은 고유어 그대로‘못, 들’으로 불렸다. 또 논은 논, 배미, 살, 도가리로, 소(沼)는 소, 쏘, 쑤, 송, 쏭, 웅디, 봇통으로 불렸다.
◎ 지명 전설
이 책의 마지막은 1)금정산 범어사 이름의 유래, 2)동래 관우묘, 3)청사포 망우송, 4)마하사 십육나한, 5)이정헌공의 혼령, 6)몰운대와 정운 장군, 7)스님이 죽어 순찰사가 된 이야기 8)동래부사 전생모자 전설, 9)만덕고개 빼빼영감, 10)금정산 모래고개의 전설, 11)장안 하근마을 왕비능 전설, 12)회동 회천마을 허장자 이야기, 13)선동 수내마을 부잣집 전설, 14)온천의 유래, 15)철마산 유래 16)개좌산 전설, 17)빈대로 폐사한 운봉사, 18)송정의 지명유래, 19)천마산 용굴 전설, 20)해운대 온천 개척담, 21)청사포 주변 산 이름 유래, 22)청사포 풍수지리설, 23)장산 춘천의 애기소, 24)시랑대와 제동당, 25)바다에 잠기지 않은 아홉산 간덤이 전설 등이 ‘부산의 지명 유래와 전설’로 소개하고 있는데, 청사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부산에서 유일하게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기도 한 곳이 청사포이고 보면 이야기가 많기도 하겠지만, 남아 있는 ‘망우송’과 천혜의 자연해안과 산 등으로 보아 이야기가 만들어질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미 듣거나 읽어본 이야기들이지만 한두 가지 소개하면, 해운대에서 울산으로 가는 14호 국도변, 장안사 입구에 기룡리 ‘하근마을’이라고 있다. 장안배 집하장 앞 작은 동산이 하나 있고 무덤이 다섯 개 있는데 ‘왕비능’이라 부른다. 다섯 개 무덤 중 입구 쪽 첫 무덤이 왕비능인데, 그 옛날 우시산국으로 불린 장산국이 신라에 망할 때 왕과 왕자들은 포로로 잡혀갔지만, 왕비는 아홉 공주를 데리고 산속으로 도망갔고 기룡리에 이르러 변복을 하고 걸식과 농사지으며 살았다. 세월이 흘러 왕비가 숨을 거두자 아홉 공주는 뿔뿔이 흩어졌으나, 철쭉 피는 3월 보름이면 어머니 무덤가에서 만났다. 그리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어머니 무덤을 만들고, 각자가 준비한 화전(花煎宵-꽃에 찹쌀가루를 발라 찌진 떡)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 후 해마다 마을 부녀자들이 이날에 모여 아홉 공주의 효심을 칭송하였다. 아름다운 축제가 몇 년 전까지도 1,500년을 이어져 왔다고 한다. 기룡리 주민들은 왕비능을 ‘딸아이 무덤’이라고 하는데, ‘화전놀이’로 고달픈 시집살이를 하소연하는 백일장도 열었다고 한다.
부산에도 송정이라는 지명이 여럿 있다. 해운대 송정, 강서구 송정 등, 해운대 송정은 한 70년 전만 해도 가라(加羅)라고 했다. 그런데 왜 송정이 되었을까.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송정이란 곳에는 발을 못 들여놓았다고 한다. 그것은 ‘조선에 가거던 송(松)자를 조심하라’는 자기들 말로 신의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에 여기저기서 그 내용을 알고는 김해에도, 울산에도 송정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기장 해동용궁사 남동쪽에 시랑대가 있고, 동북쪽에는 오랑대가 있다. ‘시랑대’바위에는 시랑대(侍郞臺)와 학사암(學士嵓)이라는 커다랗게 각자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전에는 ‘제동당(祭同堂)’이라는 각자도 있었다고 한다. 제동당은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 널찍한 바위였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 후 여기 바위가 구들장으로 쓰기 안성맞춤이자 사람들이 심지어 배로 실어 나르기도 했는데, 이때 깨어져 나갔다고 한다. 영조 때 기장 현감 권적이 썼다고 하는 시랑대, 가마귀 오(烏)자에 즐길 락(樂)자인 오락대가 변한 오랑대, 여기서 현감 등이 놀이하고 무제(舞祭-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