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섶을 베다
천영애
파란시선 0161∣2025년 7월 15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10쪽
ISBN 979-11-94799-06-1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죽음 뒤에 남을 말을 벤다
[말의 섶을 베다]는 천영애 시인의 네 번째 신작 시집으로, 「말의 섶을 베다」 「그대의 핑경 소리」 「오다 셔럽다라」 등 50편이 실려 있다.
천영애 시인은 1968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고, 경북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 [무간을 건너다] [나무는 기다린다] [나는 너무 늦게야 왔다] [말의 섶을 베다], 산문집 [곡란골 일기] [사물의 무늬] [시간의 황야를 찾아서]를 썼다. 대구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지닌다. 비록 그것이 “죽음의 서막”으로 생각되더라도(「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이를 부정하기보다는 생의 당위로 긍정하는 편이 삶의 지향이란 측면에서 옳은 인식일 것이다. 결국 타자와 맺는 관계는 황폐하기만 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사랑이라는 정동에 의한 “환대의 의식이 다리를 놓”는 일일 테니 말이다(「그대의 핑경 소리」). 천영애 시인은 이러한 “사랑의 구조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존재의 모든 부분이 “당신에게로 향해 있”는 것이자 “당신에게로 끝없이 회귀하고 그리하여 내 몸의 지도”까지 “희미해지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각오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당신이라는 중력에 잡혀 평생 주위를 돌지만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을.(이상 「사랑의 구조에 관하여」) 타자와의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타자를 그 자체로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에 타자를 기입하는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서럽고 다정한” 것일 테다(「사랑한다 그리하여 존재한다」).
“그대가 있는 곳에 왜 나는 없는지” 묻는 시인은 “그대를 기다리느라 한생이 흘렀”고 그것이 “섧은 나날이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완전한 합일에 이르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의 상투적 의장을 거부하고 불가해한 타자성을 체현함으로써 “사랑의 비루함”을 감각하는 데로 나아가고자 함에 가깝다. [사랑 예찬]에서 언급한 바디우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등장하는 무대가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있는 곳에 왜 나는 없는지”라는 물음은 불가능한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맺기의 어려움과 사랑이 지닌 보편적 불가능성에의 난감 속에서도 “한생”을 흘려 버릴 각오를 다지는 실존의 추구에 가닿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유의지로 기다림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사랑한다 그리하여 존재한다”는 확신의 언술을 표명할 수 있는 것이다.(이상 「사랑한다 그리하여 존재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에서 외부의 그 어떤 폭력적 간섭에도 “가만가만 기척도 없이 바위를 파먹고 결딴내어 흙으로 만들어 버”리는 “지의류의 아름다운 포자낭”의 고요한 실천으로 형상화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상 이병국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죽음 뒤에 남을 말을 벤다”는 곡진한 문장이 세상 여기저기 떠돌고 있을 터인데(「말의 섶을 베다」), 이 또한 천영애 시집의 신체 일부라고 저장한다. 시인의 중언부언에 의하면 천영애는 말을 찾아내고 말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 말은 능동적으로 사유하면서, 쌓이고 반복하고 겹치고 깊어지거나 확장되기까지, 세계 운동의 거부할 수 없는 가역반응을 남기고 시인에게 돌아와 속삭인다. 말 없음을 포함하되 그 말은 가혹함의 영역까지 도달한다. 심지어 말들은 “거즛”이란 역설을 움켜쥔다(「ᄉᆞ랑 거즛말이」). 말과 침묵과 거즛의 종류는 풍화와 진화를 거쳐 예언의 입을 가진다. 온전히 발화하려는 말의 치열함은 세계/생활을 이해하고 공유하려는 시인에게 어느 통점에서 ‘사랑’으로 번안된다. 이 시집이 연가의 형태를 가지면서 사람/존재에 대한 끝없는 환대와 애도를 시도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 사랑은 천영애의 은유에 의하면 “페르시안 흠집” 같은 아름다움이면서 죽음에 저항하는 방식의 이름(들)이다. 약속이 자꾸 어긋나는 죽음은 살아 있음의 건너편(의식이 사라진)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식이 가능한)의 대자이기에, 천영애 시의 시작과 정체성은 분명하다. 천영애의 말을 다시 생(生)이라는 어휘로 변환 가능케 하는 설명이기도 하다. 천영애의 사랑과 생은 일별하면 김상용의 시조, 사르트르의 [구토], 향가인 「모죽지랑가」와 「풍요」, [만엽집], ‘귀얄무늬 청화백자’, ‘목곽분’, ‘일미진중함시방’, ‘주황얼룩무늬밤나방’ 등에게 연속성을 가진다. 이 매혹적인 질료들은 서로의 공감각에 헌신한다. 마찬가지로 말들의 자리라는 미학을 펼친 이 시집의 독특함은 빼곡한 “모스부호”이면서(「I AM」), 그 해독은 난해하지만 정결하고 어둡지만 드맑다.
친밀한 독자들이여, 천영애의 ‘말’과 ‘사랑’은 당신에게 도착해서 당신의 어떤 운명이 되려고 하는가, 하회를 기다린다.
―송재학 시인
•― 시인의 말
무성한 말의 그늘에서
풍화된 말을 생각한다
뜨겁고
얽히고
소멸하는
말들
•― 저자 소개
1968년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 [무간을 건너다] [나무는 기다린다] [나는 너무 늦게야 왔다] [말의 섶을 베다],
산문집 [곡란골 일기] [사물의 무늬] [시간의 황야를 찾아서]를 썼다.
대구문학상을 수상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말의 섶을 베다 – 11
사랑, 말 없음에 대하여 – 12
ᄉᆞ랑 거즛말이 – 14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 – 16
약속의 서 – 18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 20
잦아들다 – 22
그대의 핑경 소리 – 24
귀얄무늬 청화백자가 잠든 무덤에 – 26
오다 셔럽다라 – 28
사랑의 구조에 관하여 – 30
선재미술관의 마그리트 – 32
그리운 것 속에 묻혀 있다 – 33
셰이커 춤을 추는 날이면 우리도 뜨거워지리라 – 34
그리고 나는 가네 – 36
바라 우는 소리 – 38
사랑한다 그리하여 존재한다 – 40
제2부
초록의 목곽분에 대해 – 43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 44
절박한 환대 늙은 환멸 – 46
주황얼룩무늬밤나방의 치명적 통점 – 48
가만히 바라보는 것 – 50
다말이 다말 아래 앉아 있다 – 52
통점이 없는 뇌의 통증 – 54
I AM – 56
태백에서 – 58
점무늬병에 대한 변명 – 60
사막으로 가는 길 – 61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더옵기 – 62
무량공처 – 63
미간을 찡그리다 – 64
궁상각치우 – 66
고작 – 68
무제 – 70
거두절미 – 71
거처를 잃은 – 72
예언의 말, 시 – 73
제3부
섧은 자리 – 77
얼음경 – 78
비의 수작 – 80
배후습지 – 81
코발트블루의 말 – 82
최후를 견디는 법 – 84
베이다 – 85
귀래 – 86
환멸처럼 다시 – 87
사그락거리다 – 88
그만하면 – 89
우물과 동굴은 같은가 다른가―경산 코발트 광산의 기록 – 90
울음 우는 것들에게 묻는다 – 92
해설 이병국 우리가 무엇을 더 꿈꿀 수 있는가? – 94
•― 시집 속의 시 세 편
말의 섶을 베다
녹우당 은행나무 돌계단에 앉아 비버의 로자리오 소나타를 듣는다 해남의 바람이 비자나무를 흔들어 소리를 벤다 수백 년 돌계단이 몸으로 스며 허술했던 생을 돌이킨다 권태롭고 현기증 일던 생이 동백 열매처럼 부서진다 말들이 춥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달릴 때 사자가 낙타의 목을 할퀴었다 죽어야 끝나는 일이 많다 수천 년을 사는 암각화처럼 흔적을 새기는 일의 무서움을 안다 약속은 죽었어도 말은 살아 돌계단을 오른다 자꾸만 춥다 삶이 추위에 떠는 일이었고 비로소 생이 끝나는 지점을 알 것도 같다 음악은 잠긴 녹우당 문을 두드린다
이제 생의 백기를 들어야 할 때인가 열어 둔 유튜브에서 피가로의 결혼식이 열린다 도망갈 기회를 잃어버린 사자가 무섭게 낙타의 목을 물어뜯는다 까닭 없이 마음이 상하고 울음이 고인다 유리에 벤 몸이 가렵다 유리를 들어 말의 섶을 벤다 죽음 뒤에 남을 말을 벤다 ■
그대의 핑경 소리
오래전에 넘어진 적이 있다 그대의 핑경 소리에 은신처를 잃은 적이
발을 헛디딘 만어사 돌 틈에서 핑경 소리 울린다 소리가 청명하여 그리움이 짙어지니 당신 오시기에 좋은 날이다
환속의 핑경 소리 너풀거리며 당신이 올 것이다 외눈박이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날개의 떨림을 멈추면서 바위틈으로 숨어드는 물고기가 즈문 눈을 반짝이며 외줄을 탄다 고요한 소리의 너울이 장엄한 꽃살문을 두드린다 협문 외문짝이 열리고 그대는 바랜 시간의 무채색 꽃비로 오시니
은목서가 하루에 두 번씩 피었고 핑경 소리도 두 번씩 피었다 당신은 꽃이 지고 핑경마저 잠든 시간에 고즈넉이 스며들었다 환대의 의식이 다리를 놓았으나 변방을 돌던 당신은 만어사에서 한 마리 돌이 되었다 당신 오시기에 좋은 날이다
하늘 강의 위쪽에는 훌륭한 다리를 놓고
아래쪽에는 배를 띄워 두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치마를 적시지 않고 멈추는 일 없이 오시라고 이 아름다운 다리를 놓네
*하늘 강의 위쪽에는 ~ 이 아름다운 다리를 놓네: [만엽집]. ■
오다 셔럽다라
볼 수 없는 무한의 뼈 하나 덜그덕거리는 공간으로 낯설고 무한한 몸이 귀환한다 백련암 적광전이 침묵을 열어 고요를 깬다 귀환한 몸 사이로 바람이 스미고 느린 선녀벌레가 귀를 간질인다
몽상의 시간이 다녀가고 그대의 몸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거울은 깨어졌고 그곳에서 우리는 긴 장마를 기다리며 파멸의 선고를 기다린다 운명을 볼 수 없는 물방울이 가혹하게 그대의 몸 위로 스친다
그대의 열반에 물방울을 잡고 운다 뒹굴며 잦아들 듯 길게 운다 아득한 산길 따라 진달래 꽃잎처럼 열반에 든 그대 드디어 몸으로 귀환한다 드디어 파멸한다 그리움으로 파계의 문에 들어선 그대 문득 서럽더라
적광전에 등 기대고 앉아 오래 그대를 기다린다 초록의 가느다란 그늘이 짙어 꺼지지 않는 울음을 운다
오다 오다 오다
그대 문득 오다 셔럽다라
*오다 오다 오다 그대 문득 오다 셔럽다라: 향가 「풍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