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 제20품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 중 각림보살
覺林菩薩의 게송입니다.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 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라는 4구게입니다. 풀이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려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이 모든 것은 마음으로 비롯됨을 보라”입니다.
일체유심조는 한국의 절에서는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을 정도로 마음법의 ‘키워드’입니다.
저는 백 년이 지나도 기라성 같은 스님들의 풀이를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뿐만 아니라 연기 등 불교의 요체와 과학이 가장 극적인 ‘통섭’을 이룰 수 있는
불확정성 원리와 양자역학을 소개하는 것으로‘면피’하겠습니다.
1932년 양자역학의 탄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하이젠베르크 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 원리부터 시작합니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뉴턴이 완성한 고전물리학에 의하면 이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하늘에 던져진 공이 낙하법칙에 따라 떨어지듯이,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물체의 운동
과정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아무리
정확한 물리법칙이라 하더라도 어떤 한계 내에서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20세기 사상의 커다란 흐름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통계적이고
비결정론적인 세계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초 뉴턴 역학을 바탕으로 해서 완성된
라플라스(프랑스 물리·천체학자)의 세계는 완벽한 결정론의 세계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뉴턴과 라플라스에 의해 제창된 결정론적 세계관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그 대신 물리 세계에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고 단지 통계적으로만
기술할 수 있다는 비결정론적인 새로운 세계관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20세기 비결정론적 세계관의 형성 에 있어서 핵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였다.
그는 1925년 ‘행렬역학(matrix mechanics, 行列力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여
고전역학과는 다른 새로운 현대물리학 체계인 양자역학을 창안한 사람이다.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창안한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고 하면 그만큼 더 짧은 파장의 빛으로 관찰해야 한다.
하지만 빛의 파장이 짧아질수록 컴프턴 효과〔필자 주: compton effect, X선을 전자에
투사시켰을 때 산란되어 나오는 X선 파장이 입사했을 때의 X선 파장보다 길어지는
현상〕로 전자의 유동성이 커져 그 전자의 운동량에 대해서 그만큼 부정확한 값을 얻게 된다.
결국 위치와 운동량은 아주 작은 범위에서는 서로 불확실한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야기했던 가장 커다란 논란은 사람의
관찰, 혹은 측정 행위가 측정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관찰자의 측정 행위가 대상을 결정한다는 내용은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객관주의와
실재론적 전통이 강한 물리학에서 주관주의와 관념론적인 측면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필자 주: 물리적으로는 해괴한 이 이론이 일체유심조의
‘모든 것은 마음으로 비롯된다’에 대비시키면 걱정거리가 없어집니다.〕
파울리Wolfgang Pauli(1900~1958)는 양자역학이 지니는 비결정론적 (불확정성) 성격을
종교에서 연금술적 상징들이 표출되는 집단 무의식을 다룬 칼 융의 정신분석학과
연결시켰다. 관찰자의 주관적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치 소우주인 인간이
정신적으로 만다라mandala에 ‘들어가서’ 우주 생성에 개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리적 개별 현상은 우주 전체 과정과 연결되어 있고, 부분은 전체와 상호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 주: 화엄사상인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 법성게의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음을 주목하십시오.〕 또한 개별 측정행위에 의해
세계가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는 사실 무한히 많은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다수
세계 해석(many-world interpretation)’, 혹은 정반대로 ‘다수 정신 해석(many-mind
interpretation)’을 제안하는 철학자들도 등장했다.
포항공대 임경순 교수의 글에 제가 후렴을 더했습니다. 이토록 불법은 과학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적 능력이 향상될수록 ‘증명’이 되어가는 무진無盡의 가르침의 보고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적 엘리트들은 불법을 외면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과
진지하게 대면해 전문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스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글을 보며 느끼는 점은 이미 1959년에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며 무려
반세기 이상을 세계의 석학들과 많은 교류를 한 것이 오히려 그의 수행을 성숙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승가는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사찰 덕분에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기에 자만심에 빠져 점점 더 폐쇄적이고 문중화되어 가고 있으니 큰 걱정 입니다.
한국불교가 미국과 유럽에서 티베트나 베트남의 불교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철학과 사상의 부재라는 문제 때문입니다. 한국불교를 개인으로 가정하면 12연기의
시초가 되는 무지라는 가장 수치스러운 ‘경지’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생각만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