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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11회 詩사랑 전국 시 낭송 경연대회 지정 시 30편
2024년 6월 1일 토. 오후 1시부터~창원진해 문화센터 1층 공연장
<공익법인 한국명시낭송가협회 소리예술 신승희 문화연구원 >
목차
1, 에밀레 종 / 김천우
2. 산중문답山中問答 / 조지훈
3. 정동진 / 정호승
4.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 했던가 / 이기철
5. 만월滿月 / 신승희
6.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든가 / 이기철
7. 마흔 살의 동화 / 이기철
8. 알수 없어요. / 한용운
9. 비화飛花 / 신승희
10. 수채화 같은 한 사람 / 신승희
11.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12. 마음이 머무는 곳에 / 정일근
13.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14. 순대국밥집 / 나태주
15. 소리없는 전쟁 / 신승희
16. 거리의 악사 / 신승희
17. 갈보리의 노래 / 박두진
18. 마법의 새 / 박두진
19. 망향가 / 황송문
20. 슬픈 눈동자의 소년 / 신승희
21. 곰메바위 아리랑 / 신승희
22. 넋은 별이되고 / 유연숙
23. 모정母情 / 신승희
24. 웅천읍성 / 신승희
25. 바다로 간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 신승희
26. 어느 엄마의 고백 / 신승희
27. 가을의 여자 / 신승희
28. 별 헤는 밤 / 윤동주
29. 향수 / 정지용
30. 바람의 언덕에서 / 신승희
제11회[시제] 시사랑 전국시낭송경대회
1. 에밀레 종 / 김천우
누가 저- 사연을 보고
천년의 세월이라고 했던가
골마다 깊어진 여운
산울림으로 되돌아와서
우리네 마음 한 자락
젖어 베개, 하는가
한이 깊다면 차라리
혀 깨물어 피 흘리며
죽기나 할 것이지
살아 살아서 흔들어 놓는 너는
이 세상에 무엇을 말함인가.
에밀레 ~ 에밀레
그 속 깊은 뜻이 어미 찾는 한이라면
저- 심산유곡에 소쩍새나 되어
밤마다 울고 웃기나 할 것이지
산 그림자 드리운 서라벌 땅에
추억에 질린 산이 화석처럼 굳어
깨어나지 못할 마술에 걸린 채
이젠 울어도 성숙한 목소리가
안개로 묻힌다
2. 산중문답山中問答 /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는가'
'마당가 멍석자리 삽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 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는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 온 뒤 앞 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태곳적 살림, 이라고 웃을 라는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난 사람
잘되어 오는 놈 하나 없데
소원이 뭐가 있는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랏일이나 잘하라고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는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러, 주신다.
'예 이 맛은 알 만합니더'
청산靑山 백운白雲아 할 말이 없다.
3. 정동진 /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4.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이기철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 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들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 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 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 병이 생이다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할 수 있느냐
5. 만월滿月 / 신승희
천지를 밝히는 당신은
모시 저고리 옷소매 걷으시고
사뿐사뿐 청 마루 걸어 시는
울 어머니 버선발로 오십니다.
천지를 밝히는 당신은
매미 소리 저문 베틀에 앉아
누런 거친 올 삼베를 짜던
굵은 마디의 손길로 오십니다.
고요는 비단치마 어둠을 휘덮고
가볍게 떠오르는 당신의 발길은
옛 초가지붕 별빛을 뿌리는 저녁
호박넝쿨 언덕 돌담장을 넘어가고
눅눅한 장맛비, 흔들리던 이파리들
굵은 빗방울에 찢겨 쓰러지고
바람이 뜯어간 살점 없는 손으로
돌 틈을 타고 오르기까지 긴 아픔, 어이하셨나요.
저 작은 풋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는 것처럼
이제야 둥근 당신을 닮아가고
산허리 고즈넉한 당신의 모습에서
나 또한 달이 되어 흘러가는 나그네임을
수없이 오고 간 계절 앞에
저 작은 풀잎 하나의 소중함을
내 뛰는 맥박 안에 담아놓고 간절히 돋아나는 날에
나의 가을도 당신 만월로 채우고 싶소.
개구리 소리 합창하는 논길에선 삽을 든 농부가
가을을 기약하듯이.
6.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든가 / 이기철
언제 삶이 위기가 아닌 적 있었든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 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든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든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삶이므로
7. 마흔 살의 동화 - 이기철
먹고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묻는
산노루 되어 나는 살겠네.
8.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9. 비화飛花 / 신승희
누가 너의 눈물을 아름답다고 했든가
거문고의 선율 같은 몸짓으로
신화의 선녀 같은 옷깃으로
무리 진 나비의 날갯짓으로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아름다운 작별
천 년이 흐른 들 너의 마음 어찌 알랴
바람의 냉 혹, 떨고 있는 숨결들
한가락 음률의 신음들을 누가 그리도 아름답다 했든가
허공에서 허공으로 어디로 가서 머물지 몰라도
싸늘한 흙 위에 싸락눈, 너의 이름은 비화飛花
숙명은 너를 내몰아 계절의 역사를 만들고
찬 서리 튼 살, 새의 발톱 자국
혹독한 긴 겨울 망울망울 잉태한 산고의 인내를
어찌 그리도 쉽게 보낼 수 있으랴
달무리 지는 저녁 답 파릇이 적시는 빗소리
분홍빛 연정 사월이 걷는 소리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소리, 노파의 기침 소리
애수의 잠기는 어느 시인의 미학적 선율
창백한 노을 앞에 식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차마, 누가 꽃답다고 했든가
너의 이별의 몸부림까지도.
10. 수채화 같은 한 사람 / 신승희
당신은 누구십니까
가끔, 이파리 무성한 나무로 서서
석산에 돌처럼 바라보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돌연, 안개로 피어나 시야를 흐리게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은하수를 만드는가 하면 조각달도 띄웁니다.
구름을 풀어놓는가 하면 비도 내리게 합니다.
가끔은 부드러운 풀잎 위에
이슬방울처럼 아슬하기도,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글거리는 광선이 다하는 시간
석양이란 이름으로 바다 저 끝에
붉게 피어나는 수채화 속 놀 같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제도 오늘도 이파리 무성한 나무로 서서
석산에 돌처럼 바라보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당신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11. 그리운 바다 성산포 /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나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곯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12. 마음이 머무는 곳에 / 정 일 근
마음이 머무는 곳에 영혼이 머문다
마음이 머문 곳에 영혼이 눈을 뜨며 살아 있다
저무는 가을 바다를 만나는
해국(海菊)이 피어 있는 언덕길이나
등대의 불빛 아래, 우리보다 먼저 바다를 지극히 사랑한
사람들의 영혼이 환한 빛으로 떠돌고 있지 않던가
가고 싶어 밑불을 그어 놓았던 낡은 해도(海圖) 속의 바다에서
그대 손때 묻은 젊은 날이 빛나고
오래 마음 준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 섬마다
그대 영혼을 담은 푸른 파도가 숨 쉬고 있듯이
사람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영혼이 머물도록 마음을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떠나간 뒤에도
영혼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는 사랑
우편으로 보내온 <섬>을 받은 저녁
그 바다에 마음 모두 준 그대의 영혼을 읽는다
서쪽 바다 먼 섬마다 두고 온 착한 영혼들이
책갈피마다 등대처럼 반짝이며 눈뜨고 있다
13.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끔 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출품한 시간들이 숨 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 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냄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동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14. 순대국밥집 / 나태주
마음 허하고
아무 곳에도 기댈 곳 없는 날은
비실비실 저녁 어스름 밟으며
시장 골목길 돌고 돌아
허름한 순대국밥집 찾아들어라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마자
달려드는 구수한 음식 냄새
순대국밥 안주하여 막걸리나 소주 마시며
크게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
더러는 다투는 소리
그동안 내가 찾지 못하던
세상 살 재미들이 모두 여기
이렇게 깡그리 모여 있었구나
종일 두고 무쇠솥에 국물은 끓고
김은 피어오르고
시끄메진 벽을 등에 지고
보일 듯 말 듯 웃음 짓는 주인 아낙네
순대국밥 마는 일 하나로 저토록
늙어버린 주인 아낙네
내가 그동안 잃어버린 미더운
사람 마음과 사람의 얼굴이
여기와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비록 그들은 날마다 사는 일에 지치고
생채기 받지만
저토록 씩씩하게 자신들의 하루를 잘
갈무리하고 있음이여!
15. 소리 없는 전쟁/ 신승희
처음엔, 스쳐 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뜨거운 태양의 계절, 여름이 오면
이 전쟁은 끝날 줄 알았는데
봄, 여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뉴스 채널마다 내리치는 코로나 번개
죽음마저도 우아하게 떠날 수 없었던
저- 밤하늘 크고 작은 희미한 별들
이천이십 수많은 코로나 별인지도 몰라
추락도 접어서도 안 될 삶의 분기점
하늘을, 나르는 백학처럼 하얀 영혼의 날개 날개들
그 날개는 바람 앞에 깃털처럼 휘적이노니
항해하는 생의 뱃길 위에 어디 이뿐이랴
소국小國과 대국大國의 하늘길마저도
마비된 삶의 터전은 혈전처럼
지구촌 혈관을 잘 흐르지 못하고
공포는 소리 없는 폭탄으로 무형적 공간을 휘돌며
마디마디 저리는 저마다의 가슴 가슴들
하늘이여 정녕 모르시나이까?
소리 없는 전쟁은 격리隔離와 격리隔離 속에
삶의 바다 위에 휘적이는 한숨 한숨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속 데는 전쟁 속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지구별의 아우성
무심한 세월은 나룻배처럼 그저 말없이 계절을 실어 나르고
소리 없는 바이러스와 전쟁은 언제 끝이 날지
서리 까마귀 우짖는 아침,
떨어진 낙엽의 목쉰 노래가 이토록 슬플까,
아, 아, 사람과 사람이 자유도 행복도
얼굴 없는 마스크 가면에 갇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진정, 묻고 싶은 저 – 하늘에
16. 거리의 악사 / 신승희
어느 날의 폐 간이역, 낡은 벤치 앞에는
집시의 탄식이 촉촉이 흐른다.
그는 해무의 휩싸인 섬처럼 얼굴이 없다.
베레모에 가린 채, 깊은 수염만이
소슬한 바람에 너울거릴 뿐,
그의 악보는 영혼의 날개를 달고 허공을 메웠다.
가을비 스쳐간 자리 거리의 악사
빗물 걷다간 창가 아직 남은 눈물이 흐르고
애절히 녹여내는 음률은 놀 빛 몸 감은 갯가에
한 마리 백로를 보는 듯 지나가는 눈과 귀는
허공에 걸린 채, 뒤돌아보며 간다.
빛바랜 청바지, 가난한 무대
어디든 어느 곳이든 관중이 있고 없고
별빛 따라 흐르는 거리의 악사
이끼 덮인 골짜기 흐르는 물처럼
저 홀로 취해 부르는 고독한 거리에서
재생되는 음반은 가을비를 닮았다.
우수수 한 줌 바람이 야속 타.
간간이 빗소리는 흐느끼는데
하염없는 방랑, 외방을 떠도는 가난한 무대
빈 가슴 헤집듯, 파고드는 집시의 탄식
어느 날의 폐 간이역 거리의 악사
17. 갈보리의 노래 / 박두진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어 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 꽝 쳐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 맞추어 배반하고, 매어 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같이 밀려오는, 승리에의 욕망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패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은 스스로의 혈적으로
어떻게 만민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신인 줄을 믿었는가.
커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 가 달려들어 안길 줄을, 알았는가
엘리,,,,,, 엘리,,,,,,엘리...,,, 엘리...,,,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 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신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일 수 있었는가 인간이여!
어떻게 당신은 신일 수가 있었는가
아!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인자人子여! 인자여!
마지막 쏟아지는 폭포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18. 마법의 새 / 박두진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 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속 갈피 갈피를
포릉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 하며 끼들 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 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 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 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 흐르는 창녀이다가
한 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 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를 나는 사랑하고 있다.
19. 망향가 / 황송문
어매여, 시골 울엄매여
어매 솜씨에 장맛이 달아
시래깃국 잘도 끓여주던 어매여
어매 청춘 품앗이로 보낸 들녘
가르마 트인 논두렁길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동짓날 팥죽을 먹다가
문득, 걸리던 어매여
새알심이 걸려 넘기지를 못하고
그리버 그리버, 울 엄매 그리 버서
빌딩 달 하염없이 바라보며
속울음 꺼이꺼이 울었지러
앵두나무 우물가로 시집오던 울 엄매
새벽마다 맑은 물 길어 와서는
정화수 축수, 축수 치성을 드리더니
동백기름에 윤기 자르르한 머리카락은
뜬구름 세월에 파뿌리 되었지러
아들이 유학을 간다고
송편을 쪄 가지고 달려오던 어매여
구만리장천에 월매나 시장 허꼬
비행기 속에서 먹어라, 잉!
점드락 갈라믄 월매나 시장허꼬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야!
돌아서며 눈물을 감추시던 울엄매
어매 뜨거운 심정이 살아
모성의 피 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어매여, 시골 울 엄매여
어매 잠든 고향 땅을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지나는 기러기도 부르던 어매처럼
나도 워리워리 목청껏 불러들여
인정이 넘치게 살아 볼라요.
자운영 환장할 노을 진 들녘을
미친 듯이 미친 듯이 밟아 볼라요!.
20. 슬픈 눈동자의 소년 /신승희
소년의 머리카락은 장발
부는 바람 없어도 휘감긴 얼굴
한 생각 바꾸면 낮이요
한 생각 바꾸면 밤인 것을
푸른 날개를 접고 방황하는 영혼아
밤하늘 영롱한 별빛만큼이나
찬란했던 푸른 꿈은 어디에 접어두고
교문 아닌 교문을 두드리고 있단 말가.
가슴 한, 켠 무한한 밀물 썰물 따라
섬은 등대로 서서 희망의 등불을 비추고 있건만
저- 넘실대는 푸르디푸른 바다
배 한 척 띄우지 못하고 날 저물면
그 뜨거운 핏줄 어디에 쓸 것인가.
푸른 소년이여! 이렇게 좋은 날에
아침 햇살과 맑은 바람의 손을 잡고
꿈과 희망을 실어 볼 만하지 않은가.
비 온 뒤 오색의 무지개가 아름답듯이
한 방울의 빗물이 땅을 적실 때
그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흘러 바다가 되는 것은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법 아니겠니
효가 근본이듯 존재의 두 글자 소중함을 알게 되면
세상은 감사와 사랑으로 달라질 걸세
아가야! 아니 슬픈 눈동자의 소년이여!
뜰 앞에 오동잎이 가을 소리를 전하기 전에
이 계절에 알맞은 옷을 입고 너의 푸른 바다
푸른 이름으로 희망의 돛대를 올려 보자꾸나.
저 넓은 삶의 바다를 향하여 -
21. 곰메바위 아리랑! /신승희
어둠 속에 전설은 더욱, 선명하다
한줄기 영롱한 빛을 따라
전설은 서투른 날갯짓으로
초저녁 흘리는 달빛 아래 퍼덕이고 있다
눈길 닿는 저곳, 영혼마저 걸린 달빛으로 서서
그리워 저물지 못한 저 산마루 시루봉
오백 년 아리랑이 허공에 가슴을 푼다.
웅산 정상에서 흐느끼는 달빛
침묵은 무거워 흐느끼는 볼에 눕고
비련의 아천자, 전설에 감기운 채
희끄무레 스치는 작은 바람들
태어난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뚝 솟은 시루봉이 소리치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밤하늘 곰메가 부르고 있다
조선이라는 태를 두르고 순종의 무병장수
명성황후 백일기도, 한 맺힌 역사가 전설 속에
흐느끼고 있다
곰메여
한마디 말도 없는 곰메여
웅산 정상에 묻힌 전설이여
외세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아리랑이여
단 한 번, 흰 바람이라도 붙잡고
곰메의 가슴을 풀어놓고 싶지 않은가
명성황후도, 비련의 아천자도, 할배 할매도
넋이 감겨 우는 거암 시루봉 곰메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강물은 흐르고 있다
강물은 흘러도, 저 시리도록 푸른 별들
억만년 그 자리에 있었으리라
곰메여, 눈을 뜨고 말이다.
22. 넋은 별이 되고 / 유연숙
모른 척 돌아서 가면
가시밭길 걷지 않아도 되었으련만
당신은 어찌하여 푸른 목숨 잘라내는
그 길을 택하셨습니까.
시린 새벽 공기 가르며 무사 귀환을 빌었던
주름 깊은 어머니의 아들이었는데
바람 소리에도 행여 님일까.
문지방 황급히 넘던 눈물 많은 아내의 남편이었는데
기억하지 못할 얼굴 어린 자식 가슴에 새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희미해진 딸의 아버지였는데
무슨 일로 당신은 소식이 없으십니까.
작은 몸짓에도 흔들리는 조국의 운명 앞에
꺼져가는 마지막 불씨를 지피려
뜨거운 피 쏟으며 지켜낸 이 땅엔
당신의 아들딸들이 주인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있었으리오
주저 없이 조국에 태워버린
당신의 영혼들이 거름이 되어
지금 화려한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 파도처럼 높았던 함성
가만히 눈 감아도 보이고 귀 막아도 천둥처럼 들려옵니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수많은 푸르른 넋
잠들지 못한 당신의 정신은 남아
후손들의 가슴속에 숨을 쉬고
차가운 혈관을 두드려 깨웁니다
이제 보이십니까
피 맺힌 절규로 지켜낸 조국은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몸을 태워 어둠을 사르는 촛불같이
목숨 녹여 이룩한 이 나라 당신의 넋은 언제나
망망대해에서 뱃길을 열어주는
등대로 우뚝 서 계십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잊혀지는 일 많다 하지만
당신이 걸어가신 그 길은 우리들 가슴속에 별이 되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23. 모정(母情) /신승희
고이 접어 당신께서 주신 모시 홑이불
막내딸, 시집보낼 때 주신 보물이라고
장롱 속 깊이 간직했건만……
세월이 얼마나 흘렀으면 접어둔 자리마다
새겨진 당신의 말씀, 성서처럼 일어설까
손수 짜신 당신의 모시 한 필
그 굵은 올의 모시 한 필에는 먼 산 부엉이 울음도
귀뚜라미 울음도, 낙엽 지는 소리도, 당신의 노랫가락도
베틀 소리도 담겨있어, 아끼고 아낀 것이
삭고 삭아 이토록 적실 줄이야,
묵은 먼지 털어내고, 골 깊은 주름 다시 펴서
청옥 빛 저 햇살에 헹궈내어도 보지만
그곳엔 따스한 온돌방이 있고, 호롱불이 있고
동백기름에 은비녀 그리고 빛바랜 치마
산비탈 들국화 내음까지도 가득한 이 저녁
한 해 두 해 늘어나는 홀씨 같은 머리이고
백발 당신 앞에서 나무람을 듣습니다.
“자고로 여자는 살림을 잘해야 혀”
“시집가서 버릴망정 여자는 다 배워 가야 혀”
“그래야 시집가서 친정 부모 욕을 안 먹이는 겨”
모락모락 굴뚝의 연기같이 피어나는 말씀들
계절이 하나씩 바뀔 때마다 속담 같은 꽃잎으로
하나둘, 피면 시들고 시들면 핀다.
스마트 시대 좋은 이불들이 천지인데
창호지 문에도 어울리지 않을
삭아 흐늘거리는 이 모시 홑이불 하나
진정 버리지 못하는 나는
한 잎 추풍낙엽 되면 모를까
올올이 묻어있는 당신의 모성애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24. 웅천읍성 /신승희
삼포왜란三浦倭亂 그 발자취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
동문의 견룡문見龍門
서문의 수호문睡虎門
남문의 진남루鎭南樓
북문의 공신문拱宸門
세종실록의 역사가 흐른다
오백 년 사직, 충혼이 서린 이곳
돌성을 쌓기까지 오랜 세월!
무어라 한 서린 전설만 남긴 채
옛 성터는 보이지 않고
성벽에 흐르는 묵언의 흔적들,
왜 세의 말발굽에 짓밟힌 황톳길
그 성벽 밑으로 나부끼는 몇 잎의 가을 엽서
듬성듬성 서걱이며 우는 바람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을 두드리고 있다
어둠 풀리는 서녘 하늘가
저 담청 빛 바다는 곱기만 한데
안골포 왜성 위로 나르는 한 줄 기러기는
충무공의 호각 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견용루見龍樓 서녘 하늘 유적지에서
웅천읍성 옛 노래를 띄워 본다.
25. 바다로 간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신승희
둥지 떠난 새들은 집을 잃었을까.
고적한 침묵의 숲엔, 홀로 선 나목이 외롭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형의 강
그 강물 속엔 너도 흐르고 나도 흐른다
어느 시인의 별 하나 그리움을 닮아가고
능소화 전설처럼 담 너머 바라보는 꽃이 되었을까.
빈 배의 사공 하현 달빛으로 분칠한 얼굴을 씻어본다.
밤을 이고 하루가 가고
하루를 지고 달이 가고
그달을 묶은 열두 달은
삼백육십 다섯 날을 쉬지 않고 실어 나른다
오늘도 내일도…
목이 쉬도록 우는 바람아
아래로만 흐르는 강물아
수 없는 계절이 땅에 눕고
수없는 시간이 바다로 간 뒤
백 년 강가에 이르면
비로소, 뜨거운 강의 의미를…….
26. 어느 엄마의 고백 /신승희
아들아!
저 창공을, 나르는 한 마리 철새도
알에서 막 깨어나 퍼덕일 때가 있었듯이
둥지 안에 새처럼 너도
어미 품에서 퍼덕이며 말과 글을 익히며
포롱거릴 때도 있었단다
잉태한 너를, 풀어놓은 창가엔
너를 위한 기도로 채우고
희망의 배를 띄우는 날엔
너의 작은 가슴에서 우러나는 효심
어미의 두 손을 모으게 했단다
한때는 바위 같은 삶이 버거워
하늘을 우러러 원망도 설움도 던졌지만
눈을 뜨면 새로운 태양이 비추고 있었지
그 보듬은 세월이 얼마나 흘렀으면
얼룩 군복에 늠름한 군인이 되었구나
수 없는 계절이 땅에 눕고
냉혹한 삶의 전선에서
너 가 있어 내가 존재한다는 거
엄마의 버팀목이 바로 너희였음을
아들아! 고백한다
27. 가을의 여자 /신승희
언제부터인가
억새풀처럼 늘어나는 숲을 이고
물감을 찾아 거리를 헤매었다.
가을 문턱에 서서 머뭇거리는 여자
푸른 신록을 삼킬 만큼이나
아카시아 향기로 가득했던 오월
베란다 시도 때도 없이 피는 꽃처럼
계절을 모르고 피는 화분의 여자
가시 돋은 줄기 이슬 머금은 꽃망울
장미의 붉은 열정을 고집했던 여자
그 계절을 어디쯤 보냈을까.
돋아나는 그리움의 씨앗들은
녹색을 잃어가는 이파리이기에
더욱 간절하리라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자주 서걱대는
갈바람 소리를 듣고 하나둘 떨어지는
정원에 솔방울처럼 삶의 뜰에도
간간이 허무의 솔 씨들이 떨어진다
들녘에 구절초가 웃는 날이면
더욱 젖어드는 음악을 듣고
가끔은 호숫가에 해오라기가 되는 여자
늘 뒷모습만 스케치하는 여자
가을로 가는 길목
결실의 풍요로움 위에도 달은 기울고
차면 비운다는 것 어디 달뿐이랴
익어간다는 것 비우면서 익는다는 것일까.
거울 속을 기웃거리는 여자
가을로 익어가는 여자
28.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29.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30. 바람의 언덕에서 /신승희
살아가는 것은 다 바람이다
생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람 속을 걷는 일이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로, 흔들리는 갈대의 몸짓으로
장대비 같은 폭우 속에서 휘적이는 날개의 젖은 모습으로
가끔은 태풍에 쓰러진 잣나무의 굽은 등으로
때로는 해일이 스쳐 간 잔해 위에 아이의 울음으로
비틀대는 바람 속의 숨 가쁜 걸음걸음들
한때, 모국어도 바람에 쓸려갔다 되돌아오지 않았든가
민초에서, 천하의 진시황도 떠난 것은 바람이다
심산유곡 산새로 지저귀는 것도
바위 틈새 해풍을 먹고사는 것도
한 잎 출렁이는 이파리같이 인연의 물결 따라 밀려왔다 밀려간다.
우리 모두 냉정한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 구름 들이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구름, 구름들
이래 스치고 저래 스치는 바람, 바람들
저 하얗게 질색하는 절벽 밑 바위를 봐라
멋지고 잘생긴 수석의 볼을 철썩, 때리고도
그것도 모자라 흰 거품을 물고 사방을 흩트리며
성난 용의 몸부림처럼 꿈틀대며 달려드는 파도
이 세상, 바람으로 생기는 일이다
우리 모두 바람 앞에 돌아가는 언덕에 풍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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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를 더할수록 알차게 아름답게 성대하게 개최되는 시낭송대회 기대됩니다.
다녀 가신 걸음 늘 복 된 날 되십시오. 절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