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의 위치를 통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卒本)의 위치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의무려산은 고대 역사의 강역에 있어 갈석산(碣石山) 만큼 중요한 산입니다.
그 이유는 그 의무려산은 동이 민족의 영산으로 고구려의 주몽이 첫 도읍한 졸본(卒本)의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則紇升骨城·卒夲似一處也... 則周禮北鎮醫巫閭山也
곧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같은 한 곳이다. 곧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고
『삼국사기(三國史記)』 「地理 四, 高句麗」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地理 四, 高句麗」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졸본의 위치에 대해 의무려산과 현토군의 경계 라는 중요한 위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 지도는 강단사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현도군과 졸본의 위치입니다. 의무려산과도 전혀 관련도 없고 현도군의 위치도 저기가 아닙니다. 전혀 사료와도 맞지 않는 엉터리 내용임을 알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내용도 부정하는 ...이게 현 사학계의 수준입니다.
그럼 현도군의 위치를 비정하고 졸본을 현재 의무려산으로 위치 시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럼 아래의 위치가 졸본과 현도군의 위치 일까요?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주례(周禮)》를 보면 의무려산의 유주(현 북경)의 진산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일주서(逸周書)에도 같이 기록이 존재합니다.
東北曰 幽州 ,其山鎮曰 醫無閭 。
동북쪽을 유주(북경)이라고 한다. 그 진산은 의무려(醫無閭)라 한다.
『周禮·夏官·職方氏(주례 하관 직방씨편)』
東北曰幽州,其山鎮曰醫無閭
동북쪽을 유주(북경)이라고 한다. 그 진산은 의무려(醫無閭)라 한다.
『逸周書(일주서))』
따라서 현재의 의무려산은 요령성 지역으로 유주(북경) 지역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북경 지역의 산은 연산산맥(燕山山脈, Yanshan)으로 즉 지금의 의무려산의 주례에서 말하는 위치가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즉 의무려산은 더 서쪽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더 서쪽에 있다고 추정되는 의무려산 이와 관련된 고지도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명나라 때의 지도에는 의무려산이 산해관의 북쪽에 있으며 원나라 때의 지도를 보면 갈석산의 북쪽에 의무려산이 위치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의 의무려산의 위치는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사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혀 지고 있으며 현주(顯州)에 의무려산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顯州,奉先軍,上,節度。本渤海顯德府地。世宗置,以奉顯陵。顯陵者,東丹人皇王墓也。人皇王性好讀者,不喜射獵,購書數萬卷,置醫巫閭山絕頂
현주(顯州) 봉선군은 본래 발해 현덕부땅인데 .....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다.
『요사』
大遼國東亰之西
(졸본은)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地理 四, 高句麗」
그리고 요나라 강역의 지도인 추리도에서는 현주(顯州)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요수(遼水)와 난하 사이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이 지도를 보면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위치한 지역은 지금의 하북성의 북경 지역의 연산산맥 부근인 것이 가장 신빙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현주 지역을 졸본의 위치로 비정하면 되는 것일까요?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곧 우리의 조빙하는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에 의주(醫州)에 이르러, 연계(燕薊)로 향하였음으로 고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地理 四, 高句麗」
燕薊又名幽薊或幽燕,唐代、五代地名,治所在幽都縣(今北京市宛平縣)
『중국 바이두 백과 燕薊』
今北京市宛平縣 : 지금의 베이징 시 펑타이 구 宛平縣署舊址 로 보고 있습니다.
바이두 백과에 의르면 연계(燕薊) 북경시 부근이고
삼국사기에 이르면 요수를 지나 연계(북경)으로 가는 의주(醫州)가 의무려산의 중심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의무려산의 영역을 보면 북경(燕薊)의 동쪽에서 난하 서쪽 현주(顯州) 사이로 비정 할 수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 대학자 미수 허목 선생은 북경의 땅을 말하면서 요동과 현도의 북쪽에 의무려산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周禮幽州 其山鎭曰醫巫 其下遼東玄菟 句麗朱蒙氏 邑於卒本扶餘 在玄菟之域
주례 유주(북경)의 땅, 그 진산은 의무려라네, 그 아래 요동과 현도가 있고 고구려 주몽씨 졸본부여에 도읍하니 그곳은 현도의 영역이였네
『미수 허목 고구려찬』
즉 결국 이 요동과 현도를 어디에 위치하느냐가 의무려산과 졸본의 위치를 알수 있는 것입니다.
遼東在無慮縣, 卽周禮醫無閭山. 樂浪在朝鮮縣, 玄菟在高句驪縣, 今皆在東夷也.
요동(군)에 무려현이 있는데 즉 《주례(周禮)》에 의무려산이다. 낙랑(군)에 조선현이 있고,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다. 지금 모두 동이의 땅에 있다.
『구당서(舊唐書)』
無慮有醫無慮山。
무려에 의무려산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君國志』
無慮, 西部都尉治
무려현(無慮縣),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린다.(應劭曰慮音閭師古曰即所謂醫巫閭.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慮의 음은 려(閭)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즉 이른바 의무려(醫巫閭)라고 했다.)
『한서지리지 요동군(遼東郡)』
원래 요동군의 속현 무려현에 의무려산이 있으며 이는 신당서와 한서지리지, 후한서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의 요동군은 갈석산 지역에 있었습니다. 갈석산의 위치 비정에 따라 갈라지지면 적어도 하북성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지도로 화이도(華夷圖)를 꼽을 수가 있는데 송사에 보면 다음과 같이 의무려산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北鎮醫巫閭山並於定州
북진 의무려산은 정주(定州)에서 관리한다.
《송사》
中山府,次府,博陵郡。建隆元年,以易北平并來屬。太平興國初,改定武軍節度。本定州..
중산부는 박릉군이고 역수의 북평(北平)에 속한다. 본래 정주(定州)이다.
《송사》
결론적으로 즉 갈석산과 요동을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의무려산의 위치도 같이 비정된 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갈석산이 있는 요동의 북쪽에 의무려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병도(갈석산3)의 주장은 사료에도 없는 허무맹랑한 엉터리 주장이고, 현재 갈석산(갈석산2)을 기준으로 한다면 북경과 난하 사이의 북쪽 연산산맥 지역으로 생각되며, 송사의 위치와 심백강 선생의 갈석산(갈석산1)을 기준으로 한다면 북경 보다 더 서쪽의 지역으로도 볼수 있습니다. 사료의 의무려산은 모두 하북성 지역으로 지금의 의무려산 보다 더 서쪽 지역입니다. 즉 주몽이 도읍한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도 이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첫댓글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註 040의 근처로 옮겨갔다. 발해인 무예(武藝)註 041가 말하기를 “옛 고려(高麗)의 강성하였을 때에는 병사 30만으로 당(唐)과 겨루어 적이 되었다.”라 하였으니, 곧 가히 지세가 유리하고 병사가 강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왕과 신하가 어리석고 포학하여 도리를 잃자, 대당(大唐)이 다시 군사를 보내고, 신라가 도움을 주어註 042,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말갈(渤海靺鞨)註 043로 편입되고, 신라 또한 그 남쪽 지경을 차지하여, 한(漢)·삭(朔)·명(溟)의 3주와 군현을 설치하여 9주를 갖추었다.
-삼국사기 잡지-
논하여 말한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아[有司]가 있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영웅이 특별히 일어나 분에 넘치는[僭竊] 이름과 자리를 가졌으니, 두려움이 많은 땅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의 뜻이 없고 [천자가] 봉한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편안할 때가 거의 없었다.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 수와 당의 통일을 만나고도 여전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으며 왕의 사람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아 여러 번 죄를 묻는 군사가 이르게 되었다. 비록 어떤 때에는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면, 위아래가 화합하고 뭇사람이 화목할 때는 아무리 대국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에 의롭지 않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뭇사람의 원망을 일으키게 되면서 무너져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