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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포럼
 
 
 
카페 게시글
- 고대사 의무려산(醫巫閭山)과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卒本)의 위치
동이 추천 3 조회 690 22.04.02 00:0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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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2.04.02 12:44

    첫댓글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註 040의 근처로 옮겨갔다. 발해인 무예(武藝)註 041가 말하기를 “옛 고려(高麗)의 강성하였을 때에는 병사 30만으로 당(唐)과 겨루어 적이 되었다.”라 하였으니, 곧 가히 지세가 유리하고 병사가 강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왕과 신하가 어리석고 포학하여 도리를 잃자, 대당(大唐)이 다시 군사를 보내고, 신라가 도움을 주어註 042,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그 지역의 대부분이 발해말갈(渤海靺鞨)註 043로 편입되고, 신라 또한 그 남쪽 지경을 차지하여, 한(漢)·삭(朔)·명(溟)의 3주와 군현을 설치하여 9주를 갖추었다.
    -삼국사기 잡지-

  • 22.04.02 12:49

     논하여 말한다.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으로 기자가 책봉되었던 곳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어,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아[有司]가 있고 어지러운 시대에는 영웅이 특별히 일어나 분에 넘치는[僭竊] 이름과 자리를 가졌으니, 두려움이 많은 땅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의 뜻이 없고 [천자가] 봉한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편안할 때가 거의 없었다.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고, 수와 당의 통일을 만나고도 여전히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으며 왕의 사람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아 여러 번 죄를 묻는 군사가 이르게 되었다. 비록 어떤 때에는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만두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면, 위아래가 화합하고 뭇사람이 화목할 때는 아무리 대국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라에 의롭지 않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뭇사람의 원망을 일으키게 되면서 무너져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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