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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본 생태영성의 전망
1. 인간의 욕망과 생태영성
최근 베트남, 캄보디아 등의 나라들을 돌아보며, 인간은 과연 이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얼마나 정확히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공해로 가득찬 도로 위를 오가는 빽빽한 베트남의 오토바이며, 1달러를 외치는 가냘픈 소녀의 외침이 눈을 아프게 하는 캄보디아의 붉은 들녘은, 20세기의 고통이 그토록 진하게 배어 있는 나라의 생존이라는 무게가 여전히 과거와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베트남전이나 킬링필드의 흔적을 마음속에 되새김질하며,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무의미한 고통에 가득 차도록 했는가 하는 공허감이 폐부를 찔렀다. 형용할 수 없는 이러한 대량살상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소위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분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은 과학의 기반 아래 대량의 물질적 생산과 공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욕망과, 욕망으로부터 배태된 맹목적인 이념과 증오가 도화선이 된 것이다. 신의 영역을 떠난 과학이 종교가 가장 신성시하는 생명을 이렇게 무참하게 살상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인식의 한계 너머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실이 어디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뿐이랴. 그 전엔 한반도가 그랬고, 그 이전엔 전 세계가 불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고통을 멈추기 위해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고통받는 것은 곧 대지와 숲과, 강과 바다도 함께 고통받는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인간이 삶의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자연을 도구화하고, 도구화된 자연이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인간 자신을 적대시하게 된 것에 그 연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대량살상한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갈라놓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모든 생명이 경외시되던 시대를 떠나 하나의 파편화된 생명으로 여겨질 때 그 존재의 의미는 인식의 주관에 의해 얼마든지 처분 가능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구화된 자연은 도구화된 생명을 만들고, 이를 인간의 경제적 이익이라고 하는 가치관에 의해 늘 재단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생태영성은 이제 시대의 화두로써 인간의 전도된 삶의 가치관을 새롭게 되돌려놓아야 할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생태영성은 모순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모순된 삶을 어떻게 새로운 지혜와 철학으로써 해결할 것인가가 과제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가운데 지속가능한 삶을 인류의 미래세대에게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가 화두이다.
2. 무아의 영성과 하나의 생태론
생태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은 "동양이 그 답이다"라고 한다. 전일적인 사고, 자타불이의 관념, 자연주의적인 전통 등등은 동양의 사상, 특히 종교철학의 뛰어난 면모이기도 하다. 특히 불교의 불살생에 바탕한 우주적인 생명관은 오늘날 생태를 논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이러한 논의가 가능한 것은 불교의 무아(無我)와 연기(緣起)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아는 한 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인간 개개인은 물론, 국가, 민족, 심지어는 작은 모임에 이르기까지 정체성이 없으면 그 존재감이 상실되어 결국 자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언가 잘못 설정된 개념에 의한 것이다. 무아는 연기와 더불어 생명의 실상을 설명하는 두 축의 하나이다. 모든 생명은 사실 연생연멸(緣生緣滅)하는 존재다. 즉, 인연에 의해 태어났다가 다시 인연에 의해 소멸하는 것이다. 그것은 찰나찰나도 그렇거니와 긴 시간을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생과 멸을 거듭하므로 어디 하나 고정된 영원한 실체는 없는 것이다. 있다면 그 연생연멸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러한 무아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공(空)한 것이 된다. 모든 존재는 서로 공하거니와 이 공에 바탕해 있으므로 서로 통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한 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로써 존재할 때, 연기로써 무한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중중무진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소위 인드라망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다. 한 존재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며, 모든 존재는 하나의 존재가 된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비추며 무한이 증식하는 것이다. 여기에 타자라고 하는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근대적 가치관의 하나는 이러한 자타를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데카르트식 이성의 명제는 이처럼 기계론적인 환원론에 바탕해 있다.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고, 인간마저도 사회구조 속에 쓸모있는 인간과 쓸모없는 인간으로 나누는 문명은 인간 자신을 극한적으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의 강이 흐르는 곳에 함께하는 존재일 뿐 결코 개체로 나누어 설명할 수는 없다. 자신을 돌아볼 때, 과연 자신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돌이켜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타자화된 자연은 인간의 삶을 위해 얼마든지 착취당하고, 부역당할 대상인지 돌이켜 볼일이다.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모태이며, 생태의 무수한 고리로써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자연의 동물과 식물, 광물, 대기와 바다, 대지는 연기적으로 얽혀있는 인간존재와 같은 동격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무아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존재가 연생연멸하듯이 인간의 성품도 실재하지 않지만 텅빈 가운데 인연을 따라 그 성품이 발현된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은 인간이 주어진 자연의 성품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밥먹고, 잠자고, 일하는 것이 그 텅빈 성품에 바탕해 있음을 알게 되면 따로 무엇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욕망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만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성의 분별을 바탕으로 욕망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물신과 권력의 노예화는 이를 보여주고 있다. 위로만 치솟기를 바랄 뿐, 옆으로 나누기를 꺼려하며, 오직 적자생존의 원칙만을 삶의 원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생태적인 인간의 자연스러움은 배제되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자신의 충복이 되어야만 한다. 집단적인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에 대해 이러한 배타성을 강요한다. 종(種)을 넘어선 유대관계가 무너진 이유로 인해 지구환경의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생태영성은 인간과 자연의 궁극적인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만물동근(萬物同根)의 원리와 함께, 서로 의존하는 연기적인 관계임을 철견(徹見)해야만 한다. 피조물로서의 모든 존재가 하나의 손에서 빚어진 존재들임을 알게 될 때, 생태영성은 세계를 새롭게 안내할 것으로 본다.
3. 대아의 영성과 생명공동체론
최근 생태에 대한 논의는 인간과 자연의 영성에 대한 화제로 옮겨가고 있다. 인간중심주의가 모든 만물을 소유하며 이에 대한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것에 비판인 것이다. 인간만이 만물의 지배자라고 하는 인식에 대한 반성인 셈이다. 불교에서는 이미 이에 대한 대안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점은 다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 식물, 광물, 공기와 물을 비롯한 모든 자연존재들도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선어(禪語)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혜랑(慧朗)선사가 석두(石頭)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그대는 불성이 없다."고 하였다. 이 말에 당황한 혜랑선사는 다시 "고물고물하는 생령(蠢動含靈)들은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고물고물하는 생령들에게는 오히려 불성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그런데 혜랑에게는 왜 없습니까?"하고 반문하니, "그대가 수긍하지 않기 때문이니라."하는 말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석두화상은 8세기를 꼬박 살다간 선사이다. 혜랑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어떤 것이냐고 묻는 의심에 대해 이미 자신에게도 있는 불성을 수긍하지 않고 있음을 석두화상은 보고 있는 것이다. 혜랑선사는 석두선사가 모든 존재, 즉 꿈틀대는 미물곤충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불성이 있음을 이야기 한 후, 그를 깨닫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령한 존재임은 이미 인류의 문명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가지고 신의 존재를 마음에 간직한 순간부터 이미 부처와 같은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자각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은 늘 어둡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스스로 완성되어 있는 자, 그것이 부처인 것이다. 어느 존재 하나 똑 같지 않는 이유는 그 자체로 이미 유아독존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계를 넘어서 모든 존재마저도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불법의 지평이 인간에게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가상대사(嘉祥大師) 길장(吉藏)은 경전을 인거하여 일체 모든 존재들도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존재는 인간만을 가리키고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내 안의 보석같은 불성이 모든 존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만큼 모든 존재도 그만큼 절대적 가치를 스스로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는 말로 설해져 있다. 나와 남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은 것은 이러한 말씀에 바탕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하나의 법성(法性)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법성 위에 모든 존재 각각의 존엄이 있는 것이다. 이를 달리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事事佛供)이라고도 한다. 모든 존재가 부처님인 까닭에 그 부처님 한 분 한 분께 최상의 마음과 예를 다해 공경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공경의 방식은 목불(木佛)에 대한 불공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그 존재의 존재다움을 유지시켜주고, 그 존재의 성격에 맞게 불공하는 것이다. 우주자연의 품위를 그대로 내안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럴 때 참된 깨달음의 영성이 회복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이러한 영성의 빛으로 비출 때, 그 각각의 존재는 나의 맑은 영성만큼이나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된다. 혜랑선사처럼 묻지 않아도 깊은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대아(大我)의 영성이다.
둘째는 모든 존재는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하는 생태의 망 속에 있다. <범망경(梵網經)>에는 "모든 흙과 물은 나의 옛 몸뚱이요, 모든 불과 바람은 나의 본체(一切地水是我先身, 一切火風是我本體)"라는 말씀이 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산하대지는 나의 몸체가 된다는 말씀이다. 나의 삶과 죽음은 이 대지 안에서 영원히 순환반복된다. 어제의 네가 오늘의 나였으며, 오늘의 내가 내일의 네가 되는 것이다. 이를 데이비드 브레지어(D. Brazier)는 본래의 우주적 통일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한 통속이다. 깨달은 의식 속에서 이 자연과 지구와 우주는 하나가 된다. 차별로써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인식에는 생태계가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왔다. 하지만 생사의 숨막히는 과정은 실은 인간의 두려움에서 발생한 것이다. 나의 죽음이 너의 삶으로 전환되고, 너의 죽음이 나의 삶으로 전환되는 이치는 늘상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다. 산천초목국토 모두가 깨달음의 눈으로 볼 때 이미 그 모습 그대로 깨달음을 얻고 있으므로 삶과 죽음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일차원적인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비로운 삶과 죽음의 순환의 과정에 함께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욕망에 의한 죽임이야말로 가장 비불성적인 자연질서의 훼손에 해당한다. 스나이더(G. Snyder)는 인드라의 그물 속에는 식물의 생산, 동물의 소비, 미생물들의 분해작용이 먹이그물의 순환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먹이그물의 순환은 그물망을 타고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는 관계라고 한다. 나는 나 자신이자 곧 타자인 존재들을 먹는 과정을 통해 거룩한 존재의 통일적 관계성을 지속시키는 거룩한 성찬식에 동참한다고 한다. 삶은 성찬식을 맞이하는 나날의 연속인 것이다.
근대의 선각자인 소태산(박중빈, 원불교 교조)도 세상의 유정(有情) 무정(無情)이 다 생의 요소가 있으며 하나라도 아주 없어지는 것은 없고 다만 그 형상이 변해 갈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의 시체가 썩어서 이루어진 비옥한 땅의 풀이 곡식을 영글게 하고, 그 곡식은 인간의 피와 살이 되며 생명을 유지시킨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주 만물 모두가 영원히 죽지 않고 지푸라기 하나까지도 백억 부처의 화신(化身)을 나타내 온갖 조화와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우리는 거대한 생명의 폭포수에서 쏟아지는 순간의 물방울에 불과하다. 그 물방울은 다시 생명의 대해장강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공동체의 의식이야말로 대아의 영성을 회복하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치유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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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아 진아 대아를 밝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읽을 수 있도록 공지로 올려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