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
모든 법회의식에는 처음에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삼귀의례를 합니다. 요즈음은 대부분
우리말로 하지만 한문으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귀의불 양족존 歸依佛 兩足尊 귀의법 이욕존 歸依法 離欲尊 귀의승 중중존 歸依僧 衆中尊
원효元曉(617~?)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삼귀의를 강조하여 이를 귀명삼보
歸命三寶로 이름 붙여 설명하였으며, 고려의 나옹懶翁 (1320~1376) 스님은 귀의를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불교학자 이기영의 탁월한 저서인 원효사상은 첫 페이지부터 원효의 이 귀명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서 귀명은 ‘목숨을 돌이켜 의지함’이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결국 삼귀의란
목숨까지도 바치며 부처님께 의지하는 선서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바쳐야 할까요?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나옹의
선택을 이해하면 되는데,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가지는 것’이라고 이미 밝혀드렸습니다. 이
진실眞實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우리들은 내내 번민하며 밤잠을 설쳐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귀의하는 존귀한 양족兩足은 붓다의 두 다리가 아니라, 두 가지를 다 원만히 구족具足
했다는 뜻의 양족을 말하고, 그것은 즉 복덕과 지혜를 다 갖춤을 말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스스로 이룩하신 이 복덕의 장으로 모든 세계를 이룩하시며, 장엄하시며, 중생에게
이익을 주어도 중생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니 참으로 큰 무명無明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할 것입니다. 나는 고통만 있고 이익은 없는데요? 부처님을, 붓다를 대신해
제가 말씀드립니다.
“때론 비를 내려 세상을 적시어 이롭게 하거늘, 당신은 하필이면 그때 술에 취해 비에 젖어
감기에 걸렸느냐”라고 말입니다.
참 안타까운게 이토록 거룩한 공경을 받아야 하는 한국의 승가에는 원효 스님같이 ‘목숨을
돌이켜 의지’하는 결연함도, 세간의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승가를 비난해도, 우리는 절대 그런
수준이 아니니 막말을 하지 말라는 자존심조차 없어 보입니다.
더욱 더 승가가 한심한 이유는 개혁이나 극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구성원이나 재가 불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난제가 많다”는 논리를 댄다는 것입니다.
아니, 한 인간이 출가하는 것보다 더 현실을 뛰어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출가 후 승가의 사판 지도자가 되면, 되레 현실 운운하니 도무지 출가 후 무슨 수행을
했기에 뼛속까지 속화俗化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