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경
2일 ·
오늘은 어린이 날.
페스탈로치와 전태일
1.
다음은 어린이를 진정 사랑한 교육자 페스탈로치의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취리히의 빈민굴 뒷골목에 한 늙수그레한 노인이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 소중히 주워 모으고 있었다.
한 줌이 되면 소중한 듯 주머니에 넣고 다시 길바닥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이 수상쩍은 모습을 조금 전부터 지켜보던 순경을 필시 그 노인이 어린이들의 소지품이라고 노리는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했다.
순경은 노일의 곁으로 다가서서 “여보시오, 무얼 하는 거요?”
멋쩍은 듯이 웃고 있는 노인의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깨진 유리 조각이 있었다.
어이없는 순경은 “이것들을 도대체 무엇에 쓰려는 거요?” 하고 물었다.
노인은 거리를 뛰며 놀고 있는 소년들의 맨발을 가리키며 “저들의 발이 상할까 해서...”하고는 여전히 길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이 노인이 근세 교육의 아버지인 스위스의 페스탈로치 그분이었다.
이 위대한 교육자는 그 생애가 모두 이렇게 유리 조각을 줍는 모습 같았다.
그 분의 생애를 전하는 기록 속에는 군중 앞에 서서 열렬히 호소하는 모습도, 추대와 영광을 받는 모습도 없다.
다만 고아들과 함께 있는 인자한 노인, 거리를 헤매는 남루한 노인의 모습이 고작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 속에 내재하는 무한한 사람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려는 교육 이념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사랑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갔을 뿐이다.
...
이 숭고한 사랑의 교육이, 비록 그가 한 사업은 실패했어도, 그가 가장 위대한 교육자의 한 사람임을 의심할 수 없게 하였다.』-김길수 ‘실재하는 사랑’ 중에서.
2.
전태일 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미군부대 양복점에 취직하여 전쟁 특수를 누린 덕분에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졌다.
산비탈 천막촌에 빠져나와 부산 범일동에 있는 마당 넓은 양옥집 큰 방에 세 들어 살았다.
피난민 아이들이 이 마당에서 자주 놀았다.
다음은 <최재영. 2020. 전태일실록Ⅰ.동연.> 88〜89쪽에 있는 글이다.
『피난민(避難民)들에 베푼 사랑과 동정심(1953.7~1954.4)
태일은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에 대한 동정심이 유달리 남달랐다. 어린 태일은 자기가 먹을 밥이나 군것질거리라도 생기면 피난민 자녀들에게 얼른 가져다주었다.
때로는 소선(어머니 이소선)이 외출하였을 때, 피난민 아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쌀을 볶아서 먹이곤 하였다.
하루는 소선이 밖에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태일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알몸으로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태일아, 네 옷은 어디다 두고 그렇게 옷을 홀랑 벗고 앉아 있느냐?”
놀란 소선이 고개를 돌려 마당을 쳐다보니 태일이 입던 옷은 남의 아이가 입고 마당에서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뛰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 저 아이가 옷이 없어서 내 옷을 입혀 줬다. 내 옷은 아버지 옷을 잘 잘라서 나한테 맞게 옷을 만들어 주면 되잖아?”
소선은 그렇게 말하는 태일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심하게 야단을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라며 칭찬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소선은 속으로 생각했다.
‘참으로 기특한 놈이로구나, 그래, 제 것을 움켜잡고 남한테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백배로 낫다. 남을 도와주려는 것이니 너는 참으로 기특하고 훌륭한 아이다’
소선은 태일에게 다른 옷을 입히며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성장하면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 어떻게 해서라도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야지...’
소선은 태일의 앙상한 가슴을 매만지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3.
『페스탈로치(1746〜1827)는 당시 유럽 사회를 분석하여, 계층 간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은 정당한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즉, 민중에게 바른 지성의 힘을 기르게 하면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인간학교의 이상을 제안했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을 보면, 전 생애를 통하여 온갖 고경(苦境)을 참으면서 언제나 교사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고 교육이라는 외길을 걸었던 강한 실천성과, 교육에 의한 인류구제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확립하여 소상히 전개한 교육적 천재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새겨진 묘비명은 그의 교육에 대한 모든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한 페스탈로치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에서 인용
페스탈로치 사후 180여 년 후 태어난 기독 청년 전태일(1947〜1970)이 어린이 때부터 보여 준 인간에 깊은 신뢰와 순수한 영성은 페스탈로치가 교육자로서 그렸던 그런 참인간의 모습이었다.
전태일은 사회의 불평등에 몸서리치게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전태일 삶 역시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4.
어린애같이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상식이 다소 유치(childish)할 수 있다고 하지만, 치열한 사고를 거쳐도 결국은 우리의 삶이 상식에서 상식으로 돌아가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페스탈로치와 전태일의 삶이 보인 치열한 과정을 거친 앎의 실천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다운(childlike) 순진(맑음) 그 자체였다.
두 분 모두 이를테면 어린이다운 순수성을 평생 지니고 사셨다.
오늘은 내 두 손녀의 푸른 날!
두 손녀가 자라서 언젠가 두 분께 깊은 고마움을 드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