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창문들
신정민
파란시선 0164∣2025년 9월 20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39쪽
ISBN 979-11-94799-11-5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중요한 건 우리 모두 다른 곳에서 온 꼭짓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너무 많은 창문들]은 신정민 시인의 일곱 번째 신작 시집으로, 「변곡」 「혼선」 「면의 이해」 등 63편이 실려 있다.
신정민 시인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꽃들이 딸꾹] [뱀이 된 피아노] [티벳 만행] [나이지리아의 모자]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의자를 두고 내렸다] [너무 많은 창문들]을 썼다. 최계락문학상,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기다림은 비어 있는 시간과 공명하는 일이다. 시간에 소유와 교환가치가 부여된 현실에서 기다림은 무익한 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찌」의 “낚시꾼”처럼 “밑밥 뿌려 놓고 손맛 기다리는 것 어종이 무엇이든 그것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게 전부”인 사람에게 기다림은 관심과 마음 씀에 다름이 아니다. 「찌」의 시적 화자는 “먹지도 않을 것을 왜 잡냐”라는 물음에 웃음과 “묵묵부답”으로 화답하는 그의 태도에 공감한다. 마치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기다림 그 자체를 말하듯이 시적 화자 또한 기다림을 존재가 살아 내는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기다림은 사유가 아니며 경험이다. 그리고 시인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시간이 돈이 된 세계에서 시는 기다림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쉽거나 한가로워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가깝다(「면의 이해」). 시인은 사물에 스며드는 무위의 느낌으로 시를 발현한다. 기다리는 사람만 사물의 특이함을 지각하고 말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창문들]의 마지막 시편인 「나의 맹인은 왜 하필 벽 속을 더듬어 오시나」가 진술하듯이 시는 침묵 속에서 나와 맹인의 걸음으로 다가온다. “벽 속을 걷는 것이 유일한 운동”이며 “나와 그만 아는 길이 벽 속에 있다”. (이상 구모룡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양털 모자를 쓴 시인을 본 적이 있는가. 시인 이전의 그는 양을 죽여 성과 속의 접경에서 통과의례를 치렀다. 살해자라는 죄목으로 산정에서 추방당할 때 자신이 죽인 양의 털로 만든 모자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순결한 양의 털과 깃털의 유전자를 보유한 채 저잣거리를 유랑한다. 죄가 들끓는 세속으로 내려와 속되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만나는 자. 순결한 생명체를 죽여 얻은 이름 시인으로 세상을 주유하며 이야기 유포자이기를 자처한 자. 그는 수시로 변하는 세계를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고, 길 없는 길에서 도리어 수다한 길이 태어나는 자유를 구가한다. 그가 하는 일이란 떠돌이 근성으로 “춤추는 먼지의 노래”를 부르는 것(「나빗가루 립스틱」). 모든 고정된 것과 일방향의 좌표를 부정하며 양털 같은 언어를 날린다. 어쩌면 그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져, 칩거하던 동굴에서 나온 자라투스트라의 변종일지도 모른다. 이 인물이 지혜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시를 읊조리며 낯선 세계가 또 다른 자아를 발생시키는 사정을 언표한다. 그는 창녀들이 있는 골목으로 안내받았을 때 정글보다 거대한 홍학 이미지로 그 잔상을 덮으려 하거나, 시집을 꺼내어 읽을 틈을 엿보는 뼛속까지 시인이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도리어 의외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노라며 환영하고, 최상의 것을 얻으려는 극렬한 투쟁보다 살아 있음의 감각을 더 소중히 여긴다. 체험의 시간과 글쓰기의 시간이 나란히 놓인 삶에서 그가 하는 일이란, 언어 사전에 새겨진 정의를 일껏 부수고, 같은 음을 다르게 듣는 감각과 역설・반어로 변이종을 만드는 것이다. 그를 키운 건 마음을 가로지르는 온갖 통점들. 이는 살갗이 벌어지는 듯한 고통의 순간에 자기의 것이 되는 시 언어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자유의 형식을 만들어 가지만, 그 자유가 곧 고행이기도 한 수행자의 면모를 지닌다.
―김효숙(문학평론가)
•― 시인의 말
저, 저것, 저런 것,
나는 나의 체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저자 소개
신정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꽃들이 딸꾹] [뱀이 된 피아노] [티벳 만행] [나이지리아의 모자]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의자를 두고 내렸다] [너무 많은 창문들]을 썼다.
최계락문학상,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변곡 ‒ 11
혼선 ‒ 14
면의 이해 ‒ 18
있다, 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 20
뱀이 운다 ‒ 22
맨홀 ‒ 24
Blind ‒ 26
피켓 보이 ‒ 28
차경 ‒ 30
파악 ‒ 31
여름을 부르는 관찰 ‒ 32
sample ‒ 33
마음을 분석해 줄 공식이 있다면 ‒ 34
그루잠 ‒ 36
환상동물 사전에서 찾은 거짓말 ‒ 38
연필 끝을 깨무는 버릇 ‒ 40
바라크 ‒ 42
3 of 4 ‒ 44
PSO J 318.5-22 ‒ 46
물 생활 ‒ 48
제2부
컨테이너 ‒ 51
젖은 뼈 ‒ 52
웰던 ‒ 54
3 of 4 ‒ 56
나비 지뢰 ‒ 58
데킬라 알러지 ‒ 60
나는 왜 찬란한 봄의 꽃가루 알러지가 없는가 ‒ 61
맞불 ‒ 62
함묵 ‒ 64
봄은 왜 여름이 되기로 했을까 ‒ 66
키스 앤 러브 ‒ 68
막대그래프 ‒ 70
가난은 별걸 다 기억하지 ‒ 72
아이스 브레이킹 ‒ 73
正 ‒ 74
찌 ‒ 75
수집 ‒ 76
기벽 ‒ 78
있는 듯 없는 듯 ‒ 79
울 100% ‒ 80
나빗가루 립스틱 ‒ 82
있다, 가 내게 휴가를 준다면 ‒ 84
가능성 콤플렉스 ‒ 86
제3부
먹구름레이디 ‒ 89
페르시아나 ‒ 92
친선 게임 ‒ 94
후루꾸 ‒ 95
Franc ‒ 96
지나치게 화려한 어둠 속에서 ‒ 98
끝장 ‒ 100
화분인간 ‒ 102
스타카토 블랙 ‒ 104
옆 ‒ 106
질서를 위한 아트 페어 ‒ 108
나이트 옆 비숍 ‒ 110
피곤한 비너스 ‒ 112
가을은 왜 그토록 도망갔을까 ‒ 113
봄은 왜 겨울을 버렸을까 ‒ 114
수드라 ‒ 116
재떨이가 된 유골함 ‒ 117
고엽(枯葉) ‒ 118
간당간당 ‒ 120
나의 맹인은 왜 하필 벽 속을 더듬어 오시나 ‒ 121
해설 구모룡 일상이라는 사건과 사물의 이면 ‒ 122
•― 시집 속의 시 세 편
변곡
호수를 기억해 내려는 몸짓
깃털 하나 낡은 오리털 잠바에서 빠져나온다
*
티피에 올랐더니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목동들이 보인다
새들의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물담배를 피우는
*
양을 키운 사람이 양을 잡았다고
구루에게 말했더니 하산하라고 한다
양털 모자를 선물로 받은 사람 모자 하나로 따듯해진 사람 세상에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드디어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고
그의 어깨에 깃털 하나가 내려앉는다
*
첫 강의 주제는 바닥이다
바닥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무엇보다 믿고 있는 바닥을 의심하라
그의 강연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추락하는 사람들에게 돌팔매로 양들을 모는 사람이 보인다
돌은 양들에게 던지는 게 아니라 양들이 가야 할 곳으로 던져진다
양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은 호수를 심연을 모른다
*
침묵을 밀고 가는 깃털을 보면
무엇이든 말해 놓고 들키는 느낌이 든다
세상 모든 것들의 가벼움을 이해한다면
우주의 마지막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다
모퉁이에서 모퉁이까지 사선으로 가로질러 갔다가 갔던 길을 돌려 다시 날고 있는 곡선이 보인다
*
무엇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그것을 어디로 가져가는지
중요한 건 우리 모두 다른 곳에서 온 꼭짓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한곳에 모이기 위한 방향들
방향이 되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깃털들
실은 추방되는 것이다
*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이 빠져나온다 ■
혼선
피정 끝난 사람들을 태운 전세 버스가 골목으로 들어선다
퇴근 시간엔 샛길도 막히는 법, 버스가 뒷골목에 끼어 버렸다
얼떨결에 홍등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의 포즈를 본다
나체에 가까운 23번과 눈화장 짙은 16번이 눈에 들어온다
겨우 깨끗해졌는데 더럽힐 일 있냐고 누군가 운전수에게 항의한다
나는 정글을 삼킨 홍학이나 생각하기로 한다
삼백육십 도 회전이 가능한 목뼈를 깃털 속에 넣고 자는 동물
골목만 한 습지가 없다
*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로 생각할 때까지
가방 속에 있는 시집을 언제 꺼내 읽어야 타이밍이 좋을지 망설이는 동안 책도 창녀일까, 생각부터 만지작거린다
생각의 진열도 배치가 중요하다
그래서 눈도 겨울이 길러 내는 작물이라 치자던 시인을 생각한다 민희라는 첫 애인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던
책들의 호객 행위
*
수련은 한 방에 무너졌다
함께 살고 있는 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총천연색 어둠
후진이 최선이었다
버스가 찔끔찔끔 움직이는 동안
사흘이 멀다 하고 파출소에 들락거리던 철웅이 오빠가 난데없이 생각났다 가난한 청춘이 피워야 할 말썽 다 피우고 그 경험 삼아 시작한 번개탄 장사로 떼돈 벌어 폭삭 늙은 엄마를 황후처럼 모셨다는 소문은 아직도 훈훈하다
어떤 사색이든 가능한 사시사철
무 싹이나 보리 싹에 내려 쌓이는 눈을 상상하며 본 적 없는 민희와 철웅이를 생각하니 지루한 기분이 좋아진다
*
자기의 그림자가 애인인 줄 알고 행복해하는 해피 홍학과 정글을 통째로 삼킨 매는 비슷한 구도를 가진 한 작가의 그림이다
나는 두 개의 그림을 가진 테이블 위에 책을 내려놓을 것이다
펴면 앉은뱅이 식탁이고 접으면 액자가 되는 테이블
덕분에 방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
*
버스가 길을 잘못 들어선 건
아무래도 우리가 못 본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로 생각할 때까지: 롭상도르찌 을지터그스. ■
면의 이해
누군가 힘껏 잡아당겨 한없이 길어진 장방형 벽에
그가 붉은 칠을 하고 있다
지우는 일인가
거듭나는 일인가
모든 벽이 문을 향하고 있음을 덧칠은 다시 한번 보여 주고 있다
으깬 잇꽃과 잘 말린 암컷 연지벌레 가루가 담긴 양동이가 그를 따라다닌다
극한상황에서 더 붉어진다는 안료
색은 색을 불러들인다
쉽거나 한가로워 아무것도 아닌 일
붉은색은 더 붉은색으로 조금 더 분명해진다
칼에 찔린 짐승들이 뛰어다닌다 솟구치거나 낭자해진 시간들을 감추기 위해 붓을 휘두르는 그가 까마득한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비린내를 덮는다
정신이라는 입체, 보지 못한 평면들을 위해
젖은 습자지 같은 오늘을 어제 위에 펼치고 있다
벽이 태어난다
면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펼치는 것
서두르지 않는 의식
따듯한 오후 한때가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칠해야 할 벽이 자꾸만 길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