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禹伯玉赴任山陰
丹邱 全克念
翩翩五馬向南行
嶺路風烟入眼平
半月沉疴違掺別
遠教江樹也合情
우석규가 산음(산청)에 부임하매 전송하여
단구 전극념
날쌘 다섯 마리 말이 남쪽을 향해 출발하니
고갯길 경관이 평화롭게 눈에 들어오다.
보름 동안의 고질병으로 손잡고 이별함이 어긋났으니
멀리 강가의 나무에 석별의 정이 어려있네
[국역] 전과웅
[출처] 단구유고
● 우석규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백옥(伯玉), 호는 지족당(知足堂). 증조할아버지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우배선(禹拜善)이다. 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우달해(禹達海)이고, 할머니는 주부(主簿)를 지낸 송희순(宋希醇)의 딸 숙인(淑人)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다. 아버지는 효행으로 복호(復戶)된 우여률(禹汝律)이며, 어머니는 노전(盧㙉)의 딸 광주 노씨(光州盧氏)이다. 부인은 김시락(金是犖)의 딸 숙인 의성 김씨(義城金氏)이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우석규의 단양 우씨(丹陽禹氏) 일족은 1989년까지 달성군 월배읍이었던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일대에서 세거해 오고 있다.
[활동 사항]
우석규(禹錫珪)[1648~1713]는 1648년(인조 26) 대구도호부에서 출생하였다.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682년(숙종 8) 창릉 참봉(昌陵參奉), 1685년(숙종 11)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 1686년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 1687년(숙종 13) 산음 현감(山陰縣監)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우석규는 민정중(閔鼎重)·이이명(李頤命)·홍수헌(洪受瀗)·권상유(權相游)·이만성(李晩成) 등 서인계 학자 및 관료들과 교유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 정권이 무너지자 산음 현감에서 파직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서인계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그 과정에서 두 아들이 권상하(權尙夏)와 이여(李畬)의 문인이 되었다. 1710년(숙종 36) 이만성의 천거로 진천 현감을 지냈다.
[학문과 저술]
17세기 후반 대구도호부 지역의 대표적인 기호학파 인사로서 3권 1책의 문집인 『지족당집(知足堂集)』이 전한다. 1697년(숙종 23) 『대구 읍지(大丘邑誌)』를 편수하였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명대리 송동에 있다.
[참고문헌]
● 송지문(宋之問)이 두심언(杜審言)과 이별하며 지은 〈별두심언(別杜審言)〉 시이다. 《전당시》 권52에
“병들어 누워 인사도 못 하는데, 아 그대 만리 길 떠나시는가. 하수 다리에서 전송도 못 하다니, 강가의 나무에 멀리 정이 어렸네.〔臥病人事絶 嗟君萬里行 河橋不相送 江樹遠含情〕”
라고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