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 스님의 일화와 원각경>
춘성春城 스님(1891~1977)은 만해萬海 스님의 유일한 상좌(제자)이셨습니다. 스님은 언행에
승속僧俗을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걸죽한 입담은 수많은 일화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스님은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정도로 경학經學에 밝으셨고, 유언 을 “다비한 재와 사리를
서해바다에 버려라”라고 하실 정도로 걸림 없는 삶을 실천하신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스님 곁에서 수십 년을 공부한 보살님이 계셨는데, 손녀딸이17~8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손녀딸이 그 정도 나이면 스님의 ‘말 귀’를 이해할 것 같아 노보살님은 손녀딸에게 “춘성 스님께
가서 법 문 좀 청해 듣고 오너라”라고 하였습니다.
손녀딸은 춘성 스님께 정중히 삼배를 올리고 “할머니가 스님 법문을 듣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며 다소곳이 앉아 법문을 기다렸습니다.
노보살의 의도를 잘 알고 있는 스님은 그 말이 끝나자 바로 “내 물건이 너무 커서 작은 네 것에
들어갈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손녀딸은 스님의 그 말씀에 질겁을 하였습니다. 얼굴은 홍당무가 된 채로 할머니에게 달려와
울면서 스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노보살님은 “이것아, 내가 염려했던 대로구나, 네 소갈 머리가 그렇게 작으니 스님의
큰 말씀이 어디 들어가겠느냐?” 하며 스님이 역시 안목이 높으시다며 한탄을 하셨다 합니다.
이렇듯 ‘말 귀’를 알아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듣는 ‘말귀’의 수준도 모두 그 경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중생심은 그 경계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그 각각의 다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착각이나 오류라 하더라도
본인은 그 당시에는 전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작 문제입니다
이 경우 원각경圓覺經의 환화幻化의 비유가 적절한데, 우리 눈에 티 가 들어가 공중에 헛것
〔환화幻化〕이 보여도 중생심은 그것을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합니다.
『원각경』 보현보살장普賢菩薩章의 대목을 옮기면,
그때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발에 정례하며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두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원하옵니다. 이 모임의 여러 보살들을 위하시며, 또 말세의 모든
중생들로서 대승을 닦는 이들을 위하소서. 이 원각의 청정한 경계를 듣고 어떻게 수행하여야
합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저 중생이 환幻과 같은줄 아는 자이면 몸과 마음도 또한 환이거늘 어떻게
환으로써 환을 닦습니까? 만일 모든 환성 幻性이 일체가 다 멸했다면 곧 마음이 없으니 누가
수행함이 되며, 어찌하여 또 수행함이 환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중생들이 본래
수행하지 않는다면 생사 가운데 항상 환화幻化에 머물러 있어 일찍이 환 같은 경계를 요지
了知하지 못하리니, 망상심으로 하여금 어떻게 해탈케 하겠습니까?
원하오니, 말세의 일체 중생들을 위하소서. 무슨 방편을 지어서 점 차 닦아 익혀야 중생들로
하여금 온갖 환을 영원히 여의게 하겠습 니까?”
실은 저도 『원각경』을 볼 때 이 개념에 확연히 공감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저녁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화장실 한쪽
벽면에 엄청나게 큰 벌레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아이쿠, 저것에 물리면 큰일나겠구나’ 하고 주 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놀라서 나오려고 하던 ‘그것’이 쏙 들어간 것은 물론입니다. 헌데 그 엄청나게 큰 그림자는
백열전구에 달라붙은 조그만 날벌레였습니다. 저는 어이가 없다는 생각보다는 환화를
체득했다는 기쁨에 그대로 앉은 채로 아랫도리에 힘은 주지 않고 실컷웃다가 나왔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우습게 여기지 말고 정말 겸손해지도록 노력하고
자신의 신념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늘상 고민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친구를 만나서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식성 이 다르니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갑론을박하며 겨우 결정을 했습니다. 이제 그곳에 가서 식사를 즐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일어서려는데 한 친구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하는 말, “그 집 문 닫았어”라고
해 버립니다. 이 한마디로 앞의 모든 자기주장들은 전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이와 같습니다. 아니 불교의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된 말로 ‘임자를 못 만나’ 자기 잘났다고 설치는 것입니다.
춘성 스님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놓치기 아까운 일화를 덤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날 춘성 스님이 열차 여행을 하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기독교 전도사들이 열차
객실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큰소리로 외치며 지나가다가 마침
삭발염의한 춘성 스님이 앉아 있으니 그 부근을 왔다갔다 하며 더욱 큰소리로
외쳐댔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3일 만에 부활했나니….”
이때 춘성 스님이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뭐! 누가 죽었다 살아났다고? 이놈들아, 내 평생에 죽었다 살아난 것은 내 좆밖에
못 봤다!”
이 일갈에 승객들은 폭소를 터트리며 깔깔대고 웃어대니 그 전도사 들은 혼비백산
사라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