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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 선시조 본관 시조 파조 당홍계 토홍계
1. 우리나라의 홍씨
2. 홍씨의 시원
3. 우리나라 홍씨의 선시조 홍천하
4. 토홍과 당홍으로 나누는 홍씨
5. 성씨의 변천과정 : 〈당홍계〉
6. 성씨의 변천과정 : 〈토홍계〉
7. 주요 인물들
8. 남양홍씨 근현대 인물
9. 인연,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 : 역관 홍순언과 해주 석씨의 이주
우리나라의 홍씨(洪⽒)
우리나라 성(姓)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 성으로 나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 성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 남양홍씨는 인구수 약 41만 명으로 집계됐습니다. 그중 당홍계가 38만 명(379708명, 22위) 토홍계가 3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 외 홍씨의 본관은 문헌에 111본까지 나와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 중에서 남양(南陽), 풍산(豊山), 홍주(洪州) 등 3개가 저명합니다.
홍씨(洪⽒)의 시원(始原)
홍씨(洪⽒)의 시원은 지금의 중국에서 농업문화의 창시자인 고시씨[농업과 불의 신으로서 “고시씨”를 잊지 않는 감사와 풍년을 기원하며 “고시례”의 어원이 됨]→한의학의 창시자인 염제신농씨[염제신농국을 세워 520여 년간 나라를 통치해온 “황족”]→천하제일의 영웅이라 한 공공씨→공씨로 분가해오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2백 년전, 치수장관으로도 이름을 떨쳤던바 공(共)에다 삼수변[氵]을 더해 “홍(洪)”이라는 성으로 개성했으므로 이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비롯된 뿌리 깊은 성씨로서 학사공 홍천하(洪天河) 선생은 홍보를 시조로 하고 돈황을 본관으로 한 돈황홍씨의 후손이신바 대당의 강남 휘주[안휘성]의 명문가 출신이신 홍수의 자(子)로서 당학사 이십니다.
그러나 중국에도 이후 여러 홍씨[굉(宏)씨가 홍씨로, 홍(弘)씨가 홍(洪)씨로, 뿌리를 알 수 없는 육계당(六桂堂) 홍씨]가 생겼으나 이는 학사공께서 동래 이후에 생긴 뿌리가 다른 홍씨들이니 돈황홍씨를 뿌리로 하는 우리 홍씨와는 무관한 홍씨들입니다.
우리나라 홍씨(洪⽒)의 선시조 홍천하(洪天河 : 618년경~698년경)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639년) 고구려의 영류왕이 개혁을 위해 덕예문학의 학사(學士)를 보내 달라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습니다. 이에 당태종은 홍학사를 수반으로 한 8학사[홍(洪), 은(殷), 목(睦), 길(吉), 위(魏), 방(房), 기(奇), 봉(奉)]를 642년경 고구려에 연차로 파견하였습니다. 홍학사는 홍씨가없던 우리나라에 당성홍씨의 선시조(先始祖)가 되신 홍천하(洪天河) 선생이십니다.
공(公)의 휘(諱)는 천하(天河)요 자는 명보(明甫)이시니 대대로 중국 강남 휘주 사람이었습니다. 요동을 거쳐 백모 차림으로 고구려에 처음 도착한 곳이 당성군의 은수포[銀樹浦 :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이고 정착한 곳이 당성[唐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으로 이곳에서부터 당나라의 문물과 유학(儒學) 예악시서 등 선진문화를 전수하시며 이민족의 교화가 비롯되었으니 큰 위업은 이루 다 표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현재 화성시에 있는 당성(唐城)과 은수포(銀樹浦)는 당시에 선진국이었던 당(唐)나라와의 교통 요지로서 역사적으로도 한반도 대외교류의 최초 관문이자 개항포구이며 한반도 실크로드인 ‘당은포로’의 시발점으로서 이로 인해 신라 후기에는 당성진을 설치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서로가 탐내서 싸움이 그치지 않던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던 곳입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난(亂)에 이어 고당 전쟁(645~668)이 일어나 당나라 귀족들을 무차별로 죽일 때 당학사 일행은 그 화[禍 : 죽임]를 피해 당나라로 환국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육로가 막혀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신하시니 신라의 덕산[德山 : 경남 산청군 시천면(지리산) 추정]으로서 신라 선덕여왕(재위 : 632~647)이 이를 알고 국빈으로 우대하여 환영하고 날마다 예를 갖추어 극진한 향연을 베풀며 8 학사들이 덕산촌에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명하고 홍학사를 덕산촌주(德山村主)로 봉하였습니다. 또한, 8 학사를 신라의 신하가 아닌 당나라의 신하라 하여 ‘당신[唐臣 : 듣는 이를 높여 부르는 말로 변해 지금의 “당신”이란 말의 어원이 됨]’이라 하였고 홍학사의 학덕을 높여 도호(道號)를 당동(唐東) 선생이라 하였습니다.
태종 무열왕(재위 : 654~661) 역시 지극히 봉양하여 처음 정착한 구봉산에 성을 고쳐 쌓아 당성(唐城)이라 하고 공을 당성백으로 봉하였으며 이 일대를 고구려에 이어 식읍(食邑)으로 내려 관적을 당성홍씨[원래 돈황홍씨 였기에 당성의 본관만을 받아 당성홍씨로 하였고 이후 충선왕 2년(1310년) 일대가 남양부로 개칭되어 남양홍씨라 함]라 하였습니다. 신문왕(재위 : 681~692)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전습하고 태자태부[태자의 스승]로 봉하였고 효소왕(재위 : 692~702)은 유지를 이어받아 당성후(唐城侯)로 추존 승격 봉하였습니다. 신라의 5대 왕은 물론 김유신 강수 설총 김수충 등이 학사공 홍천하 선생의 제자이자 후학들임은 물론 모두가 스승으로 섬겼으니 공의 덕망과 예능을 짐작할 수 있으며 공자묘를 창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 1607~1689) 선생이 지은 남양유생통문의 글을 보면 이조의 인조(仁祖 : 재위 1623~1649) 때 남양부사는 학사공 홍천하 선생을 일컬어 “고금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현이다”라고 하여 문정사[文定祠 : 지금은 불타 없어짐]를 세워 학사공을 추모하였고 “높고도 깊은 그 학문은 만천하에 알려졌기에 그 어른을 길이 추모해야 한다고 절규하기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으니 이 외에도 학사공의 업적은 모두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많습니다.
또 고려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 선생은 찬시(讚詩)를 지어 홍학사공을 찬양(讚揚)하였으니 당성인(唐城引) 망해루기에 이르기를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예악시서는 모두가 덕산촌주 홍천하 선생에게서 나온 것일세”라고 찬양했음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라에서는 학사공과 그 후손들을 귀족 이상의 예우를 다해왔으므로 육두품 이상의 벼슬과 왕족과 혼인도 할 수 있도록 예우를 다하였으니 현달해 오셨으며 선시조이신 학사공에서 부터 10세를 “홍씨선계십세보”라 하여 가문에서 높이 모셔오고 있습니다.
홍학사공의 배위는 당나라의 명문가 분음설씨[설씨족보 참고 623년경 출생 추정]로서 작호가 분음현남이시고 태상경공이신 설수(薛收 : 593~625)의 따님이십니다. 태상경공은 당나라의 대신으로 천책부기실 문학관 학사를 역임하시고 영주 18 학사 태상경에 추증되시었습니다. 명재상인 방현령, 두여회와 비견되는 인물로서 33세(歲)에 타계하시니 당태종이 친임곡하고 소릉에 장사하였습니다. 조부의 작호는 분음현남이신 설도형이시고 증조부는 분음후 설효통이시며 고조부는 간의후 설총이시니 십 대가 연속하여 명현록에 오르고 문집 십 권이 전하는바 구당서 제73권 열전 제23에 실려있고 당서인 설수전으로도 기록되어 전하는 대단하신 명문거족의 따님이십니다.
홍학사 공의 묘(墓)는 광주(廣州) 개건동[開乾洞 : 또는 괘건동(掛巾洞)] 언덕의 진좌에 있다고 기록으로 전해오나 역사에 묻힌 채 실전한 것으로 전하니 후손들의 연구와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토홍과 당홍으로 나누는 홍씨
남양홍씨는 동성동본이나 조상을 달리하는 두 가지 계보가 있는 성씨입니다.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이 그것입니다.
당홍은 고구려 때 귀화해 온 홍학사의 후예이고, 토홍은 고려 고종조에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의 후손입니다. 당홍, 토홍이라는 속칭도 바로 이 같은 귀화파와 토착파의 구분에서 연유했습니다. 그러나 토착파인 토홍의 역사보다 귀화파인 당홍의 역사가 300여 년 이상 길다는 데서 동성동본 두 집안의 관계는 역사의 미궁에 들어가 있습니다.
두 집안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몇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만, 당홍의 선시조로 일컫는 홍학사의 후예 가운데 일파가 난을 피해 신분을 감추며 별개의 토홍을 내세웠다는 설(당홍 측 주장)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러므로 두 집안은 계보는 서로 따로 가리되 남이 아닌 종씨로 사이좋게 지내오고 있으며, 시조는 다르지만, 동성동본이라 하여 서로 결혼도 하지 않습니다.
남양홍씨는 고려 때 최고의 명문갑족 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330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이씨(884명), 안동권씨(359명), 파평윤씨(336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지만, 인구순위를 감안하면 최고의 명문가문(名門家門)으로 불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 당홍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8명, 문형(文衡) 2명을 비롯해 왕비 1명(헌종의 계비), 청백리 3명, 부마 4명, 공신 10여 명을 배출하였습니다.
본관의 변천
남양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시(華城巿)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입니다. 고구려대의 당성군(唐城郡)을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 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 수원)와 인주(仁州 : 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기에 당성홍씨(唐城洪氏)가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조선조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습니다. 1914년 군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 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통합하였습니다. 이때 일부 면이 은덕 쌍수 마도 송산 서신 비봉면으로 통합되었습니다. 1931년 수원군의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고, 1949년 수원군을 수원시로 승격시킬 때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되고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으로 되었다가 지금의 화성시(華城巿)가 되었습니다.
성씨의 변천과정 : 〈당홍계〉
1) 중시조 홍은열
시조 홍은열 공은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홍천하의 10세손으로 출생하셨습니다. 홍은열의 초명(初名)은 유(儒), 자는 자술(子術), 후에 몽량(夢良)입니다. 호(號)는 복룡(伏龍)으로 당시 사람들은 ‘복룡선생’이라 불렀다 합니다. 태조는 고려 창업에 크게 공헌한 그에게 은열(殷悅)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습니다. 이는 그 공덕이 '은(殷)나라의 명재상인 부열(傅說)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삼한이 서로 쟁패를 겨루는 후삼국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신라 말의 석학 최치원과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 스님 등 많은 문사(文士)로부터 수학하면서 수신과 제가에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최치원이 신라가 내리는 높은 관직을 마다하고 산사로 은거하면서 당시 궁예 수하로 있던 왕건에게 보낸 격려 편지에서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곡령(개성)은 푸른 솔이다”(鷄林黃葉 鵠嶺靑松) 즉, “신라는 망하고 개성의 새 나라는 흥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전해 듣고, 새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하여 철원 태봉국으로 왕건을 찾아가서, 궁예의 신하로 입문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궁예의 패악 정치가 계속되자 궁예를 왕(王)에서 폐하고 왕건을 세울 때 함께 참여하여 고려 개국에 진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 후 고려가 936년 후삼국, 삼한을 통일한 뒤인 서기 940년에 태조 왕건은 삼한통합에 공헌한 공신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신흥사(神興寺)에 공신당(功臣堂)을 지어, 동쪽과 서쪽 벽에 고려 개국 삼한공신을 그려 넣고 공신호(功臣號)를 책록하였습니다.
이때 태조 왕건은 은열에게 18자에 걸친 가장 길고도 화려한 공신호를 내려주었습니다. 그것은 “고려 광익 효절 헌양 정난 홍제 분용 양채 보예 경제 공신”(高麗匡翼効節獻襄定難弘濟奮庸亮采保乂經濟功臣)입니다. 벼슬이 정일품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입니다. 의성홍씨의 시조 홍유[초명은 홍술(弘述) 시호 충렬(忠烈)] 장군과는 다른 자료들이 있기에 별개의 인물이 아닐지 연구 중에 있습니다.
배위는 금교군부인 김씨이시고 처부는 사찬 원보공 김남이시며 모는 사보부인 혹은 복부인이라 하였습니다. 조부는 사찬 김예천이시고 증조부는 덕산촌주이시며 외조부는 현평경 덕산촌주이십니다.
태사공 홍은열 선생의 묘는 황해북도 토산군 서천면 홍묘리(洪墓里 : 현 매봉리) 취적봉 병좌 합폄 유신도비 이신데 토산의 세장지에는 재실과 제전 등이 있으며 산도에도 기록이 있으나 한때 200여 년간 실전해오고 있었기에 중랑장공파의 서일 홍상조(洪相朝 : 1690~1756) 공께서 후손의 도리로서 문과급제 이후 박천군수 때인 영조 6년(1730년)에 수해로 허물어지며 실전된 태사묘와 비석 조각을 어렵게 찾아내시고 영의정이셨던 남양군파 홍치중(洪致中 : 1667~1732) 공과 더불어 그 대책을 강구하시며 태사묘와 신도비를 제자리에 봉개축 하시고 고유제와 그 제문을 지어 올리셨으므로 그 제문 기록이 전해오니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서일 홍상조 공께서 담와 홍계희 공과 후일 을미대동보 합보를 추진, 고증하신 선조님이십니다. 태사공의 묘역은 북한에서 지정문화재 보준급 제1013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또 그 묘역은 남북분단으로 오갈 수 없으니 가묘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2리 산 25번지 노곡재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후손들이 1960년에 충북 청원군 미산면 수산리에 남양사(南陽祠)를 건립하여 시조 홍은열과 6세손 충평공(忠平公) 홍관(洪瓘), 11세손인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藩), 광정공 홍규(洪規) 등 네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9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또 대전의 세덕사는 선시조, 시조 외 16개 파조를 모신 사당으로 전국의 각파에서 모여 매년 음력 3월 첫 일요일 10시 춘향제로 모시고 있으며 중랑장공파에서는 경북 봉화의 운곡천변 삼척봉 아래 당성사(唐城祠)에 남양홍씨 시조이신 태사묘와 중랑장공파의 파조비를 비롯한 문경공(文景公) 충헌공(忠憲公)의 신도비 외 걸출한 인물의 9위 단비를 모셔오고 있는 불천위(不遷位) 사당으로서 장단(연천) 대종택에서 병조호란(1636년) 때 낙향하며 이전해온 연주정과 연주정 6백주년 기념비 정려각 등을 모셔오고 있으며 또 이 외에도 각 지파대로 사당제와 분묘제를 모셔오고 있습니다.
2) 당홍의 파 분류
당홍은 시조하 후손 2세로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 을미대동보(1775년)의 신뢰할 고증록에 의해 2세(世)로 함]가 갈리고 그의 손자 대에서 1파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 대에서 다시 1파 예사공파(禮史公派), 13대 아래서 13파가 갈려 모두 16파로 나뉩니다.
이에 중랑장공파가 2세 분파 근거에 대해 대부분 모르시기에 자세히 언급하자면 중랑장공파는 약 1천년 가까운 이전부터 단일파로 기록하여 왔으니 청보라하여 파조이신 홍후(洪厚) 공을 1세(世)로 모시며 별보로 내려오고 있었으나 남양홍씨 을미대동보[1775년 발행]에 중랑장공파 합보를 위한 준비기부터 양 중앙종회를 대표할 수 있는 당대 정승급이라 할 출중한 문인이신 남양군파 담와 홍계희(洪啟禧 : 1703~1771) 공과 중랑장공파 서일 홍상조(洪相朝 : 1690~1756) 공을 비롯한 신뢰할만한 여러 석학의 선조님들께서 모여 합보 준비와 대책을 논의, 고증을 거치시고 중랑장공파 을미보 합보에 따른 세수정립의 고증록을 중랑장공파 편에 남기신바, 홍상조 공과 홍계희 공이 완간하지 못하신채 홍상조(洪相朝) 공(公)이 갑자기 타계(他界 : 1756)하시자 이후(以後) 홍계희(洪啟禧) 공(公)에 의해 인쇄(印刷)는 들어갔으나 1762년 억울(抑鬱)한 사건(事件)에 몰리게 되시며, 타계(他界 : 1771)하시자 후손(後孫)이신 세마 홍량해(洪量海) 공(公)에 의해 서문(序文)이 쓰이고 완간(完刊)은 되었으나 마침 세마공(公) 외 여러 후손(後孫)께서도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일족(一族)이 화(禍)를 당(當)하는 수난(受難)으로 죄인(罪人)의 서문(序文)이라 하여 뜯겨내고 배포(配布)되는 등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다고 한다.
이 을미대동보 고증록 번역문을 요약하면, 일명 고보인 안성보에 중랑장공파 파조 이신 홍후(洪厚) 공을 시조이신 태사공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등 근거로 시조하 2세(世) 자(子)로 하고자 하였으나 다른 기록에 년수 차이[태사공(869~942경)부터 파조는 인종시인[인종 때 활동 시기로 봄으로 즉 1070년대 경 출생으로 추정]이라 전해오니 약 200년가량 년수 차이가 있으나 세수차를 30년 내외로 계대해도 5~6세(世)도 맞지 않고 또 근거도 없음]도 있음을 감안하여 자로 할 수도 없었기에 더 이상 밝힐 근거자료는 없으나 시조이신 태사공의 후손은 확실하니 합보는 하되 계통을 존중하여 중랑장공파 파조 이신 홍후 공을 1세(世)로 쓰지 않고 분파계보를 태사공 시조하 후손 2세(世)로 정립하여 고증록에 기록하시고 편철 합보하셨으므로 중랑장공파는 이를 존중하여 대동항렬과 세수를 2세(世)에 맞춰 250여 년간 써오고 있는 현실이므로 중랑장공파는 태사공 시조하 2세(世) 분파라는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 중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또한 2002년 남양홍씨 해봉공종중에서 발간한 남양홍씨 현조유사록(顯祖遺事錄)의 중랑장공파 편에서도 위와 같은 시조하 2세(世) 분파 주장을 다시 논리적으로 밝혔음에도 이러한 신뢰할 고증록 전거 외 근래까지 달리 인정할 고증 없이 시조와 파조의 년수차이만을 추측하여 세수만을 억지로 짜 맞추기 위해 아무 조상에다 끼워 5세(世)나 6세(世) 분파(分派)로 잘못 쓰이고 있으나 이제는 잘못 쓰이는 줄도 모르고 난무(亂舞)하는데 이는 선조님들께서 고증하고 남겨주신 고증록 내용을 모르는 잘못된 처사로서 명문가 후손으로서 근거와 절차를 무시하고 원칙을 훼손시키면서까지 무모하게 할 짓이 아니며 남양홍씨대종중을 비롯한 당시 고증하신 선조님들은 물론 범(汎) 홍문에 대한 모독(冒瀆)이므로 그 누구든 각별한 주의(注意)가 요구됩니다.
년수 차이야 아쉽지만, 무어라 단정할 수는 없으니 앞으로도 연구해야할 과제일뿐, 더 이상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자료가 나오지 않는 한,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일뿐이므로 중지하고 신뢰할만한 선조님들께서 고증록에 정(定)하고 써온 대로 지켜가는 것 또한 후손 된 당연한 도리이자 의무이므로 후손은 물론 누구라도 남양홍씨 중랑장공파는 “시조하 2세(世)분파” 임을 바로알고 바로 쓰자는 것은 합당한 논리요 당연한 조치(措置)라 하겠으니 꼭 협조해주시고 주변에 홍보해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16파 중 후손이 가장 많은 파는 남양군파[南陽君派 : 파조 홍주(洪澍)], 문정공파[文正公派 : 파조 홍언박(洪彦博)],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 파조 홍언수(洪彦修)], 익산군파[益山君派 : 파조 홍운수(洪云遂)], 예사공파[禮史公派 : 파조 홍복(洪復)],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 파조 홍후(洪厚)] 등입니다. 남양군파와 문정공파의 후손이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다음이 익산군파(15%)입니다.
성씨의 변천과정 : 〈토홍계〉
1) 시조 홍선행
또 다른 남양홍씨(토홍계)의 시조는 홍선행(洪先幸) 공입니다. 그는 당성(남양의 옛 지명)에서 제법 세력이 있었던 선비 집안의 후손인데, 고려 고종 때 금오위별장(金吾衛別將)을 지냈습니다. 그 후 그의 후손들이 남양홍씨 토홍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남양홍씨 당홍계의 선시조인 홍천하의 후손이라는 주장(당홍계)이 유력하나, 홍선행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토홍계에서는 이를 부인하였습니다.
자료에 의해 분석해보건대 학사공 홍천하 선시조의 동래 이전에는 우리나라에 홍씨가 없었다는 기록과 검모잠이 당(唐)에 반발하며 당의 귀족들을 모두 죽이고자 할 때 선시조의 장자이신 휘 문명공은 당나라에 가 화를 면하셨고 차자이신 휘 우명공께서 화를 당하셨으며 3자이신 순명공께서는 토착한 홍씨라 말하여 화를 면하셨다는 10세보의 기록도 증거가 될 것입니다. 처음 당성에 관적되신 이후 자손들은 당에 유학하시고 혼인하시며 신라의 관직에 따라 대족이 경주에 가셨을 것으로 당홍이라 하였을 것이고 당성에 남은 일족이 토홍이라 했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만약이지만 선시조 홍천하공의 후손이 맞기에 같은 홍씨일가이지만 10세손인 홍은열 공의 직계 후손은 아닐수도 있으므로 세밀한 연구중에 있습니다.
2) 토홍의 파분류
시조 홍선행의 9대부터 12대 사이에 문희공파(文僖公派), 정효공파(貞孝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등 5개 파가 갈라졌습니다.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123명을 배출하고, 상신 2명, 대제학 1명, 청백리 3명, 부마 1명, 공신 3명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는 현재 토홍의 인구 3만여 명을 가정할 때 어떤 가문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주요 인물들
1) 고려 조의 인물 : 〈당홍계〉
고려조의 당홍 인물로는 개국공신 홍은열 외에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충절을 지켜 순사하신 명필 홍관(洪瓘), 충렬왕 때 세 번이나 수상직에 오른 홍자번(洪子藩), 충숙왕과 충선왕의 장인으로 남양부원군에 책봉된 된 홍규(洪圭), 공민왕 때 수상을 지낸 홍언박 등이 있습니다.
홍자번은 고려・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때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전함건조 책임을 맡았었고 원의 간섭과 간신배들의 이간으로 벌어진 충렬・충선왕 부자의 불화가 고려의 국기를 위태롭게 만든 위기에서 끝까지 부자를 화합시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애썼던 충신입니다.
홍언박도 고려 말 공민왕을 도와 원의 속박을 물리치고 자주성을 회복하는 개혁정치에 오른팔 노릇을 했던 인물입니다.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처남으로 고려 조정에서 실력자로 군림하여 횡포를 일삼던 기철(寄轍) 일파 숙청에 수훈을 세워 1등 공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는 모두 서울 개경(開京)을 버리고 피난할 것을 주장했으나 그만이 서울 사수를 주장했으며 서경(西京)이 함락돼 끝내 서울을 떠날 때는 왕을 따르며 전시에 궁중 경비를 줄이도록 권유하는 등 충언을 아끼지 않아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2년 뒤 김용(金鏞)이 난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에서 왕을 죽이려 할 때 몸을 피하라는 아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난군 앞에 나가 불충을 꾸짖다 살해당해 충신의 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정승에 추증되고 문정공(文正公)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홍규(洪奎)는 처음 이름이 홍문계(洪文系)로 부친 홍진(洪縉)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냈습니다. 홍규는 성품이 담박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뜻이 커서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원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습니다. 송송례와 함께 임유무를 처단하여 무신정권을 종식시켰습니다.
이 공으로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으나 국사가 나날이 글러 가고 동료들도 아첨질이나 일삼자 그는 그들과 함께 조정에 있는 것을 수치로 여겨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버렸습니다. 왕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올려 주었으나 거듭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니 당시 나이는 마흔이 못 되었습니다. 충렬왕 때 다시 발탁되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오른 홍규는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양가의 규수들을 뽑아 원나라에 보내려 할 때 자기 딸을 보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깎은 일이 드러나 한때 가산이 몰수되고 귀양 가는 풍파를 겪기도 했습니다.
홍규는 일족 홍자번 등의 청에 의해 가산이 반환되고 풀려났으나 딸은 원의 사신 아고대(阿古大)에게 시집갔습니다. 그의 딸 하나는 나중에 충숙왕의 비(妃)가 됐습니다.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입니다. 또 한 딸은 충선왕의 후비가 돼 그는 두 임금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고려조와의 이같이 깊은 인연으로 당홍의 일부에선 조선조 들어 한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2) 조선 초기의 당홍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조선 개국공신 문경공(文景公)이신 홍길민[洪吉旼 : 문과 호조판서 집현전대제학 남양부원군]과 아들 문량공(文良公) 홍여방[洪汝方 : 문과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남양군. 성종임금의 어머니이신 인수대비의 외조부]이 그리고 손자 장간공(章簡公) 홍원용[洪元用 : 숭정대부 호조판서 판돈녕부사 강녕군. 세종임금과 사돈. 세조임금의 맏동서. 성종임금의 어머니이신 인수대비의 외숙부]이 중랑장공파댁(中郎將公派宅) 대종손(大宗孫)들로서 3대(代)가 유명합니다.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판사 홍보현(洪普賢) 공의 장자이신 문경공은 문량공과 부자지간에 대제학에 오른 것도 드문일이지만 조선 개국 시 조선이라는 국호 승인이 수차 거부되고 어려움을 겪자 태조 이성계는 고려말 관직에서 물러나 고려 충신들과 개국을 반대하며 절의를 지키던 홍길민[문경공 : 조선에도 노비(가병포함)를 1천여 명이나 거느린 기반과 명나라 언어와 기반이 있었으므로] 공을 수차 회유 압박하니 고려 역사에 배반의 이름을 남길 수 없다 하여 부득이 무기명의 조건부로 명(明)나라로 건너가 황제(皇帝)에게 순망치한[脣亡齒寒 :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려움]의 이치로 설득하고 조선(朝鮮)이라는 국호승인과 옥새를 받아오시므로 조선개국공신에 올랐으며 이때 명나라 황제로부터 조선의 사람이기도 하지만 명나라의 지아비라 함이 옳겠다 하여 명부(明夫)라는 호(號)를 받아오게 되셨다는 중랑장공파댁(中郎將公派宅)의 일화(逸話)입니다. 하여 기록에는 한상질이 받아온 것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직후 태조로부터 황조인[皇祖人 : 중국에서 와 벼슬한 사람]의 후손들은 나라를 도와 충신의 도리를 다했으며 동방의 명신(名臣)이니 비록 천만 대가 지나가도 세금을 면하고 군역에 동원하지 말라” 명하여 조선 초에 어려움에 처해있던 남양홍씨의 재등용과 영화의 기반을 닦았으며 문경공이 향년 55세에 갑자기 타계하시자 무학대사가 소점해 둔 묘역에 왕릉과 버금가게 하라는 태조의 명으로 우리나라 사대부 중 유일한 능(陵)과 같은 곡담과 난간석이 있는 사각묘를 쓰게되었다는 중랑장공파댁의 일화이며 장단[연천 판부리 : 전쟁과 산짐승으로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휴전선에 접해 복구 연구중. 향토문화재 22호로 지정]의 그곳은 지금도 고릉동이라 불려오고 있습니다.
이후 세조의 반정에 공을 세운 홍윤성(洪允成)과 홍달손(洪達孫), 홍순손(洪順孫) 형제가 있습니다. 홍윤성은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거쳐 예종 때 영의정에 올랐으며 홍달손(洪達孫)은 좌의정, 홍순손(洪順孫)은 판서(判書)를 역임, 당홍 영화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성종, 광해군 때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홍흥(洪興)은 ‘당대 제일의 풍채’로 선망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성종은 그를 일부러 명에 사신으로 보내 우리나라의 인물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풍채만큼 글씨도 훌륭했습니다. 그의 형 홍응[洪應 : 익산군파]은 또 성종 때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습니다.
조선조 당홍 인물의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에 조선 남아의 기개를 알리고 나중 그 인연으로 임진왜란에 국난극복의 공신이 된 홍순언[洪純彦 : 예사공파]이 있습니다.
또 홍희남(洪喜男)은 당홍이 낳은 조선조의 명 외교가입니다. 임란 이후 대일(對日) 교섭에서 조선 측의 주역으로 일본에 여섯 차례나 사신으로 왕래, 국교회복을 매듭지었으며, 명나라에도 두 차례나 사신으로 파견됐습니다. 1649년 인조가 죽었을 때는 일본의 조문 사절을 부산에서 맞아 일본사신 왕래의 새로운 규례를 정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효종 10년(1659) 일본에 사신으로 간 길에 서양을 통해 들어온 유황(硫黃)의 산화법(酸化法)을 배워 와 우리나라 화기 발전에 공헌했습니다.
3) 조선 중기의 당홍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으로 영의정 대제학에 오른 홍서봉(洪瑞鳳)과 그의 아버지인 천민(天民), 할아버지 춘경(春卿)은 ‘3대 호당(湖堂)’의 명예를 누렸습니다. 또 천민의 동생인 성민(聖民)의 후예는 그로부터 6대 7명 대과(大科)의 영예를 쌓아, 춘경의 아버지 계정(係貞)부터 따지면 9대 대과의 5백년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더욱이 그중에는 영의정이 둘(홍명하, 홍치중), 우의정이 1명(홍중보)으로 당홍 영화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6대 이후에도 한말 홍순목(洪淳穆)이 영의정에 오르는 등 조선조 중반 이후 당홍의 영화는 계속되었습니다.
당홍 영화를 꽃피운 홍서봉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릴 적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당시 정승이던 홍섬[洪暹 : 토홍]의 집 연못에서 놀다가 막 피는 연꽃을 모두 꺾어 버렸습니다. 노한 홍정승이 볼기를 치려 하자 다른 아이들은 다 도망쳤으나 서봉만은 가지 않았습니다.
홍섬이 기이하게 여겨, “네가 만일 시를 짓는다면 매를 때리지 않고 용서해 주겠다”고 했더니 서봉이 “좋습니다”라고 선뜻 응답했습니다. 홍섬이 추(秋), 유(遊), 우(牛)의 세 운자를 부르자 서봉은 막힘없이 시구를 이루었습니다.
상공지각냉여추 동자휴붕월하유(相公池閣冷如秋 童子携朋月下遊)···정승댁 연못은 차기가 가을 같아 소년이 친구와 더불어 달밤에 놀았네.
승평대업지하사 단상연화불문우(昇平大業知何事 但想蓮花不問牛)···태평세월에 무슨 일이 문제이리, 어찌하여 연꽃만 묻고 소는 아니 물으시는고.
홍섬은 서봉을 불러 자리에 앉히고 어깨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훗날 반드시 내 자리에 앉을 것이다”라고 했다 합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서봉은 벼슬길에서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국무총리)에 올랐습니다. 병자호란의 국난을 당해서는 최명길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 여러 차례 청나라 진영을 드나들며 강화교섭을 벌였습니다. 문장과 시에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습니다.
성민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형인 승지 천민에게서 글을 배웠습니다. 하루는 글을 배우다 말고 갑자기 슬피 울었습니다. 천민이 까닭을 물으니, “내가 배운 지 몇 달에 한 번도 종아리를 맞지 않았는데 이는 나의 아버지 없음을 불쌍히 여긴 때문이라 슬퍼한다”라고 했습니다.
홍문(洪門)의 9대 대과 영예는 스스로 채찍질하는 이 같은 면학의 정신이 전승돼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4) 조선 후기의 당홍
조선 후기의 대표적 당홍의 인물은 혁명아 홍경래[洪景來 : 예사공파]입니다. 그는 일찍이 어려서 서당에서 훈장에게 글을 배우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잡혀 죽은 형가(邢可)를 두고 시를 지으라는 말에, ‘추풍역수장사권(秋風易水壯士拳) 백일함양천자두(白日咸陽天子頭)’라고 지어냈습니다. 훈장이 ‘추풍역수장사권이요, 백일함양천자두라’하고 뜻 없이 흥얼거리자 소년 경래는 “선생님 그렇게 읽는 게 아닙니다”하고 즉각 이의를 달았습니다.
그는 “추풍역수장사권(秋風易水壯士拳)으로 백일함양천자두(白日咸陽天子頭를)”하며 ‘으로’와 ‘를’이라는 토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어 방바닥을 내리쳤습니다. 약한 제나라를 삼키려 기회만 노리는 폭군 진시황을 죽이겠다고 차가운 가을 역수(易水) 강물을 건너던 그 형가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에 중국천자(中國天子)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겠다는 이 소년의 기백에 시골 훈장은 그만 혼비백산, “얘야, 이제부터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없다”고 도망쳤다는 얘기입니다.
남 하는 대로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예상대로 낙방한 그는 세도정치와 당쟁과 지역 차별로 속속들이 병든 조선을 바로잡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 과거를 단념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박천(博川)의 청룡사(靑龍寺)에서 명문의 서자(庶子)로 역시 사회개혁의 의지를 품고 배회하던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의기가 투합, 거사의 모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산(嘉山) 다복동(多福洞)을 본거지로 각지의 장사, 기인, 술사 등을 모으고 군사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부자들도 포섭, 자금을 대게했습니다.
1811년(순조 11년) 극심한 흉년으로 인심이 혼란해지자, 12월에 2천 병력을 일으켜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일컫고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가산(嘉山) 박천(博川) 곽산(郭山) 정주(定州) 선주(宣州) 태산(泰山) 철산(鐵山) 용천(龍川) 등 평북 일대를 휩쓸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으나 관군과 안주(安州)에서 싸워 패주, 그의 웅지는 꺾이고 말았습니다. 정주성에 웅거,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성 밑에 굴을 파고 화약을 터뜨린 관군의 기습으로 전사했습니다. 그때 나이 서른둘. 불꽃 같은 혁명아의 일생이었습니다.
5) 조선시대의 토홍
비록 수에서는 당홍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적으면서도 토홍은 당홍에 지지 않는 저력이 있었습니다. 본고장인 남양과 서울, 경북 예천(醴泉) 영주(榮州) 봉화(奉化), 충남 아산(牙山) 당진(唐津) 등에 주로 살았습니다. 토홍의 영화 중의 절정은 중종 때 영의정에 오른 문희공(文僖公) 언필(彦弼)과 그의 아들 섬(暹)의 대입니다.
섬은 선조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며 명상(名相) 청백리(淸白吏)의 칭송을 들었는데 부자가 수상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웠습니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여산(礪山) 송(宋)씨는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의 딸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수상인 ‘세계사상 유일의 복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왕비와 대신의 부인 등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는데, 왕비는 송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했다 합니다.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 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재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송 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다 합니다. 그녀가 처녀 시절 친정아버지 송질은 극성스런 부인의 성격에 골치를 앓던 나머지 딸들도 어머니를 닮으면 큰일이다 싶어 세 딸을 불러다 놓고 한마당 연극을 했다고 합니다. 딸들 앞에 약을 한 사발씩 내놓고 너희들이 어머니를 본받아 극성을 부리면 다음에 시집을 가더라도 송씨 가문에 누가 미칠 터이니 그럴 양이면 여기 이것이 독약이니 아예 마시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위로 두 언니는 절대로 어머니 같은 극성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반면 유독 셋째 송부인 만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기 본마음대로 살지 못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냐”고 선뜻 약사발을 들어 들이켰다는 것입니다.
그 약은 그러나 독약이 아니라 보약이었습니다. 딸들의 기질을 시험하고 길을 들이려던 송질은 이 셋째 딸의 기개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합니다. 유감없이 한세상을 살 그런 기질을 타고났던 듯싶습니다. 그녀는 평생 세 번 평양(平壤)을 갔습니다. 처녀 때 평안감사 아버지를 따라, 결혼한 뒤 평안감사 남편을 따라, 세 번째는 늙어서 평안감사 아들을 따라갔다는 것이입니다.
그러나 정작 천하제일 강산 평양의 경치를 구경한 것은 늙어서 아들을 따라가서였습니다. 처녀 때와 젊은 부인이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집 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할머니가 되어 세 번째 가서야 가마를 멈추게 하고 “이제는 평양 구경해도 욕되지 않을 것이다”라며 산천경개를 구경했습니다. 평안감사 관사 별당에 그녀가 처녀 때 와서 심었던 복숭아와 앵두나무는 그때 고목이 되어 있었습니다.
송 부인은 나무가 이렇게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늙었겠느냐고 인생무상을 탄식했는데 이 얘기를 전해 들은 중종은 이 당대 복덕귀(福德貴) 부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특별과거를 베풀고 글제로 ‘삼지유경탄앵도수로(三至柳京歎櫻桃樹老)’ (세 번 평양에 가서 앵두나무의 늙음을 탄식하다)를 출제했다는 것입니다. 남성 위주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존경과 대우를 받은 드문 한편의 가화(佳話)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장희공 홍숙(洪淑)이 대사헌과 형조,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습니다. 형조판서로 재직할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 사림파를 숙청하는 데 관여하였습니다. 그의 손자 홍려는 중종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홍숙의 현손인 홍익한(洪翼漢)은 김상헌 등과 함께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의 1인이었으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살해되었습니다.
그의 부인인 허씨와 아들 홍수원, 며느리 이씨도 피난길에 함께 죽었습니다. 그가 순절한 후 도승지와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명해졌으며, 광주의 헌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암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토홍에서 이색적인 인물로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 정효공파]이 있습니다. 그는 목사(牧使)였던 홍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류득공 등과 함께 북학파의 일원으로 천문학과 경제에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영조 때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삼촌 홍억을 따라 북경에 가서 서양문물을 배워왔습니다. 그는 음양오행설 대신 기화설(氣化說)을 주장했으며, 지구 자전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지역주민 천거에 의한 공거제(貢擧制)를 주장했으며, 천문학 연구를 위해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남양홍씨 근현대 인물
1) 당홍계
한말 대원군의 심복이자 수구 강경파의 거두였던 영의정 홍정목(洪渟穆)은 그 아들이 홍영식(洪英植)입니다. 영식이 개화파의 선봉으로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처형되자 자결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영식의 형 만식(萬植)은 의정부(議政府) 찬정(贊政)으로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울분을 못 이겨 음독 자결했습니다.
반면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이 조선 책략을 건의하여 개화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자 관동유림을 대표하던 홍재학(洪在鶴)은 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참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홍종우(洪鐘宇)는 수구파로 프랑스에 유학한 뒤,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김옥균에게 접근한 뒤 암살하였습니다. 이후 황국협회를 만들어 독립협회 활동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구한말 국난시대 당홍계에서 많은 의병을 배출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洪範圖)입니다. 홍범도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1907년에 차도선, 태양욱 등과 평안북도에서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부대는 압록강을 넘나들며 삼수, 혜산, 풍산, 만포진, 봉오동 등지에서 승리를 이끌며 일제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후 김좌진 등과 합세하여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 등과 함께 부총재에 취임하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고려혁명군사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과 대립을 꺼린 소련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 해제되었습니다. 이를 ‘흑하사변’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후에도 연해주에 농장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옮겨간 뒤 1943년에 병사했습니다.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는 그의 흉상이 있으며, 건국공로훈장 복장(대통령장)이 수여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이송 안치되었습니다.
홍병기(洪秉箕)와 홍기조(洪基兆)는 천도교 대표로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하였으며, 3·1운동 후 홍병기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홍기조는 국내에서 민족정신 고취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가 홍재하[洪在厦 : 1892~1960, 중랑장파] 지사는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출신으로 배재학당 졸업 즈음의 유학자로서 혼인한 능성구씨와 어린 자녀를 두었으나 서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일제의 강력한 검거령에 쫓겨 만주 등을 거쳐 임시정부에 “내가 독립을 위해 할 일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을 보내면서 수년에 거쳐 적극적인 황기환(1884~1923)의 도움으로 어렵게 프랑스까지 도피하며 독립운동을 적극 실천하시게 됩니다.
홍지사는 결심해온 의지대로 프랑스 도착 즉시, 김규식(임시정부 구미위원장) 황기환(임시정부 부위원장) 조소앙(이후 국회의원) 등 독립운동가들과 협조하며 프랑스한인회의 전신인 재법한국민회라는 한인단체를 주도적으로 조직 운영하고 초대회장 허정(이후 제2공화국 대통령권한대행)에 이어 2대 회장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구성원으로 1920년 10월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 결성을 주도하여 이 단체의 서기장으로서 활약하는 등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찬탈 만행 실상과 독립의지를 강대국 등 세상에 알렸으며 노동으로 어렵게 번 자금과 모금을 더 하여 임시정부에 적지 않은 독립운동자금을 수시로 보내는 자금책으로도 활동하셨고 프랑스에서 단체로 3·1운동 기념식도 열어 독립의 의지를 세상에 알리기도 하셨습니다.
해방과 귀국이 길어짐에 결국, 프랑스 여인과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고 염원하던 조국의 해방을 맞아 국가재건자금을 보내기도 했으나 조국이 6.25와 민족분단 되는 애통함을 임시정부에 막아달라는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으며 해방 후 제3차 유엔총회(1948.12)가 파리에서 개최될 때 장면(이후 부통령) 등 대표단의 한국승인 외교를 측면에서 적극, 돕기도 하셨다. 조국의 독립과 발전을 늘 그리워하며 프랑스 가족들과 함께 귀국을 고대해 왔으나 본인은 독립자금으로 가난하였고 고국은 그의 고충을 헤아리지 못해 결국 타국에서 마음고생만 하시다 외롭게 암으로 타계하신 독립운동가로서 뒤늦게 세상에 밝혀져 정부로부터 200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셨으며 유해는 202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송, 안장되셨습니다.
또 홍익성(洪益成)은 기독교 장로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안동과 만주 일원에서 임정 연락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그 외 홍식(洪植)은 독립군사령부 제3영장으로 국내에 들어와 일경과 교전 중 전사하였으며, 홍학순(洪學淳)은 식산은행 의주지점을 습격하고, 만주와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하였습니다. 홍원식(洪元植)은 3·1운동 때 고향인 화성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는데, 제암리 학살사건 때 현장에서 살해당하였습니다.
홍승노(洪承魯)는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광복 후에는 반민특위 감찰위원과 김구의 한독당 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렇듯, 당홍계에서는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걸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족지사를 배출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중앙일보 회장과 법무, 내무장관을 역임한 홍진기와 주미대사와 중앙일보 회장을 지내는 홍석현 부자가 있습니다. 홍진기 일가는 삼성 이병철,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노신영, 동아일보 김병관 일가 등과 사돈 관계를 맺는 등 현대사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홍진기는 일제하에서 판사를 지내고,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 내무장관을 역임하며 조봉암사건, 4·19 시위대 발포사건 등과 연루되어 있어 적지 않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 외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 문공부장관을 지낸 홍종철, 지식경제부장관을 역임한 홍석우, 한국방송공사 사장을 지낸 홍경모, 홍두표, 국회의원으로는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고, 경남지사에 재직하고 있는 홍준표를 비롯하여 홍창섭, 홍종욱, 홍재형, 홍정욱, 홍문종, 홍영표, 홍일표, 홍문표, 홍희덕 등이 있으며,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을 역임한 홍진표가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홍기창(고려대교수), 홍순옥(동국대교수), 홍문화(서울대 약대교수), 홍윤숙(시인)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이건희 삼성회장의 부인이자 라움미술관장인 홍라희, 남양유업 창업자인 홍두영 회장과 그의 아들 홍원식(남양유업 회장), 홍철호(굽네치킨 사장) 등이 있습니다.
당홍의 주요 집성촌은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동덕리,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남양리,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충남 연기군 서면 신대리, 충북 옥천군 안남면 화학리, 평남 강동군 봉진면 봉당리, 평북 삭주군 남서면 창신동, 평북 정주군 말산면 신오동, 함남 홍성군 홍서읍 내원리,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 석천리 등입니다.
2) 토홍계
근현대에 들어와 토홍계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중 독립협회 간부였던 홍정후(洪正厚)가 있으며, 봉선화의 작곡가이면서 근대 음악계의 거장인 홍난파[洪蘭坡 : 본명은 영후(英厚)]가 있습니다.
홍난파는 경기 화성시 출신으로 동경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수업한 뒤 ‘봉선화’를 작곡하였으며, 1925년엔 우리나라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습니다. 음악잡지인 ‘음악계’를 발간하였으며,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냈습니다. 또 이화여전과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서양음악 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며, ‘봉선화’ 외에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의 가곡과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를 작곡했습니다.
또 문학에도 재능을 보여 소설로 ‘향일초’, ‘처녀혼’, ‘폭풍우 지난 뒤’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또 같은 화성 출신으로 시인이었던 홍사용[洪思容 : 필명은 홍로작(洪露雀)]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백조는 흐르는데 별하나 나 하나’ 등을 지었고, 토월회 동인으로 연극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된 홍사익도 토홍계입니다.
현대에 들어와 토홍계 인물로는 전경련 회장을 역임한 홍재선, 대한변협회장을 역임한 홍승만, 한국일보 부회장을 역임한 홍유선,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인 홍사중이 있으며, 정관계에서는 홍사덕(전 국회의원, 민화협 상임의장), 홍승직(고려대 교수), 홍사석(연세대 의대 교수), 홍사풍(고려인삼 회장) 등이 있습니다.
토홍의 집성촌은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평택시 송탄읍, 포천시 군내면, 김포시 검단면, 화성시 남양면 일원, 충북 중원군 노은면·앙성면, 음성군 금왕읍, 충남 부여시 양화면·석성면, 아산시 인주면 일원, 당진시 송산면, 전남 함평군 손불면, 경북 영풍군 단산면, 봉화군 봉성면 등지입니다.
인연, 조선의 운명을 바꾸다 : 역관 홍순언과 해주 석씨의 이주
홍순언(洪純彦 : 1530~1598)은 남양홍씨 예사공파로 선조 임금 때 중국어 역관(譯官)을 지냈습니다. 명나라로 가는 사신을 따라 북경으로 가는 길에 통주(通州)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일행은 유곽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순언은 하얀소복을 입고 있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사연인즉 여인의 부모는 절강(浙江) 사람인데 북경에 와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불행히 돌림병에 걸려 두 분이 돌아가시고 관이 객사에 있다고 했습니다. 외동딸로서 부모님을 고향으로 모셔가 장례를 치를 돈이 없으므로 마지 못하여 스스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공이 듣고 불쌍히 여겨 그 장례비를 물으니 3백 금이 필요하다 하기에 곧 전대를 털어서 주고 끝내 가까이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인이 성명을 물었으나 끝까지 말하지 않았는데, 여인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려 하시면 저도 감히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성만 말하고 나오니, 동행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보라고 비웃었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순언은 나랏돈을 함부로 쓴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동료 역관들이 돈을 걷어 순언이 횡령한 돈을 갚아준 뒤 그를 구명해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200여 년간 골머리를 앓아온 외교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 : 잘못 기록된 왕실의 가계를 시정하기 위해 명나라에 주청한 일]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부친은 이자춘(李子春)인데 고려 말 이성계와 권력 다툼을 했던 정적 이인임(李仁任)으로 기록돼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명회전의 정정을 요구하는 진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 차일피일 미루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자 선조는 이번에도 실패하면 사신을 따라간 수석 역관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것이 동료 역관들이 그를 구해준 이유였습니다. 1584년 순언은 무거운 가슴을 안고 종계변무 사신의 일행으로 북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순언이 북경의 조양문(朝陽門)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부시랑[禮部侍郞 : 외교부 차관] 석성(石星)과 그의 부인 류(柳)씨였습니다. 부인은 그동안 조선에서 역관이 방문할 때마다 그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오래전에 순언이 유곽에서 만난 여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던 부인은 보은(報恩)의 절이라며 큰절까지 올렸습니다. 순언의 처지를 파악한 부인은 이번에는 물심양면으로 외교직무를 도와주었습니다. 남편인 석 시랑이 분주히 뛰어다닌 끝에 대명회전 만력본에 태조의 가계도가 바로잡히는 성과를 낸 것입니다.
순언이 종계변무를 무사히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갈 때 예부시랑의 아내는 나전함 10개에 각 10필씩 직접 짠 비단을 넣어 보냈는데, 비단마다 ‘보은(報恩)’이라는 수를 놓았다고 합니다. 조선 왕실의 오랜 숙제가 해결되자 선조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순언을 종2품의 우림위장(羽林衛將)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는 임금을 경호하는 군대사령관으로 역관으로서는 오를 수 없는 위치로 파격 승진이었습니다.
당릉군(唐陵君)이라는 군호도 하사받는데 이는 왕실과 핏줄이 같다는 의미였기에 신하로서는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순언과 석성 부부와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습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명나라의 구원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명나라의 조정에서는 조선 파병을 주저했는데 당시 병부상서[兵部尙書 : 국방부 장관]의 위치에 있었던 석성만이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때 석성은 명나라 조정의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역관 순언을 급히 불러들여 조언해주었습니다. “조선에서 명나라를 믿게 하기 위해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원병을 청하시오. 사신만 오면 내가 힘을 쓸 것이오” 석성의 노력에 힘입어 결국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하게 되고 기나긴 7년의 조일(朝日)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순언은 통역관이 되어 이여송을 따라 다녔습니다. 순언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해 사망했습니다. 명나라는 전쟁 후 막대한 군비 소모와 인명 손실로 나라가 기울게 되는데 파병을 적극, 주장했던 석성은 문책을 당해 투옥되었습니다. 1599년 옥사한 석성은 죽기 전에 부인 류(柳)씨와 아들 둘에게 자신이 죽으면 명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가라고 유언했습니다.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유언에 따라 즉시 그의 아들 중 차남 석천(石洊)은 1597년(조선 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과 호남을 거쳐 동래하여 가야산(伽倻山) 남쪽 군성산(君聖山) 아래 성주(星州) 대명동(大明洞)에 정착하면서 성주석씨(星州石氏)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 류씨와 장자 담(潭)은 차마 부친 곁을 떠나지 못하고 옥바라지를 하며 남았다가 명조(明朝)에 잡혀 유배되었습니다.
후에 장남 석담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어머니 류씨를 모시고 조선의 해주(海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왕이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수양산 아래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해주로 사관(賜貫)하였습니다. 이로서 이 땅에 해주 석씨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이 성씨의 운명과 나라의 운명을 바꾸게 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홍순근, 『남양홍씨 중랑장공파의 세력 약화 연구』, 2023
출처 : 기존글에 남양홍씨 중랑장공파의 세력 약화 연구(2023)를 근거로 2024.3.3일 일부는 편집하였습니다.
편집자 : 중랑장공파 33세 홍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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