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동 유허를 문화재로 만듭시다
월당공유허비문 송치규(宋穉圭, 1759~1838) 지음.
1827년(순조 27) 1월 부안 처암공파 존중(存中), 고부 주부공파 일성(一性), 남원 교도공파 설(偰), 영암 의령공파 목흠(穆欽) 세움.
비문에는 바위에 새겨진 광풍제월, 연비어약 같은 글을 통하여 공의 마음속에 품은 회포와 생각 그리고 취향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巖臺諸刻若光風霽月鳶飛魚躍公之襟懷意趣有足以想像者)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글씨를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썼다고 주장한다.
비석은 이삼만 58세 때 세웠고, 20년이 지나서 이삼만 사망.
송치규나 비석을 세운 분들은 이삼만과 당연히 서로 아는 사이.
이삼만이 글씨를 새기는 것을 보고서도 월당공 글씨라 했겠는가?
몇 년 전 새긴 글씨와 400년 전 새긴 글씨를 구분하지 못했겠는가?
조상의 흔적이 타성인 것으로 되는 황당한 상황을 방치하면 안 된다.
사람들이 전주최씨 가문에 사람이 없다고 욕할 것이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는 만육공 최양이 팔공산에 은거하려 들어가다가 잠시 쉬어 간 곳인데, 1871년 세운 만육공유허비는 전라북도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월당공유허비보다 44년 늦다.
옥류동 유허에는 월당공이 은거하며 남기신 참의정(參議井)이 있고, 바위 곳곳에 심매경(尋梅逕), 백화담(百華潭), 영월대(迎月臺), 요수(樂水), 수풍(水風), 첨연(簷烟), 선동(仙洞) 등 글씨가 전해오고 있어서 만육공이 잠시 쉬어간 반송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옥류동 유허를 한벽당과 한옥마을까지 연계하면 좋은 스토리텔링 소재가 될 수 있고 전라북도 기념물 지정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중랑장공종회의 노력을 당부 드립니다.
2019년 4월 7일
최순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