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자몽을 좋아하지 않아
한보경
파란시선 0165∣2025년 10월 10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54쪽
ISBN 979-11-94799-13-9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시들지 않고 천천히 껍질이 되어 가는 겨울꽃처럼, 자몽 같아도 자몽이 아닌 자몽주스를 마셔
[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자몽을 좋아하지 않아]는 한보경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우리는 머나먼 이국에서 온 이방인이어서」 「이름이 조르바였던 조르바」 「일방통행로」 등 50편이 실려 있다.
한보경 시인은 2009년 [불교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여기가 거기였을 때] [덤, 덤] [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자몽을 좋아하지 않아], 산문집 [사탕과 버찌]를 썼다.
한보경의 이번 시집 [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자몽을 좋아하지 않아]는 시에 정진해 온 자의 쓸쓸한 숙고를 정직하게 탐색하고 완숙한 기교의 언어로 객체화하는 능력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시는 철없는 사랑의 고백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년의 초연도 아닐 것이다. 위로도 희망도 믿음도 아닐 것이다. 현실의 와중에서, 탈속이 아닌 속세에서, 시인의 저항은, 꺼지지 않는 열망은, 그리하여 사랑은 어찌 유지될 수 있을까? 한보경의 시에는 쉬운 해결이 없고 가까운 위로가 없고 성불의 가식이 없고 무엇보다 섣부른 사랑이 없다. 달콤하고 강렬한 언어에 익숙해진 독자에게는 어쩌면 전달이 어려울 수 있는, 오랜만에 드물게 대하는, 한보경 시인의 새 사랑법이 어찌 진화할지 눈여겨보자. (이상 양균원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한보경의 시에는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욕망의 단호한 절제가 있고, 그럼에도 그 세계를 항구적으로 열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랑의 발현이 있다. 그는 “시간을 감쳐/묵은 상처를 감추는 일”(「퀼트」) 혹은 “불가능이라는 이름표를 달지 않고 불가능으로”(「우리는 머나먼 이국에서 온 이방인이어서」) 살아가는 일이 자신이 걸어가는 시인의 길임을 고백하고 또 다짐해 간다. 수많은 이형(異形)의 이미지군(群)을 통해 아릿한 사랑의 정점과 균열을 동시에 보여 주는 그의 시는, 외형적으로는 타오르는 불길 같은 정념을 품고 있지만, 안으로는 “두근두근 가슴이 뛰던/시의 첫 행처럼”(「친절하게 주(註)를 달아 주는 친절하지 않은 당신」) 남은 유적(遺跡)의 마음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또 사랑한다. 그 사랑은 “흉내 낼 수 없는/당신의 방언”을 떠올리기도 하고(「트와일라잇 존 2」) “당신 안에 내가 모르는 오지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 속으로 흡입되면서(「트레이싱페이퍼」), “헐렁해진 심장이 마지막 출정을 떠나는” 순간을 가녀리고도 선명한 빛으로 감싸 준다(「낡은 양말」). 이제 “홀로 남아도 쓸쓸하지 않은 저녁”에(「봄비」) 그는 “어떠한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는/하나의 이름”을 부르고(「이름이 조르바였던 조르바」) “기별 없는 그리움”과(「어바웃 타임」) 숱한 “기억의 목록”을 재배치하면서(「일방통행로」) 스스로를 고통 속에서 만나 위안하고 그 고통과 흔연하게 결별한다. 그의 시가 평범한 환상 시편으로부터 벗어나 사랑을 가파른 실존 원리로 탐색하는 세계임을 우뚝하게 증언하는 순간이 이로써 가능해진다. 결국 한보경은 가장 고전적인 사유의 우물을 파면서, 지극한 ‘사랑’과 ‘울음’에 감싸인 존재자의 운명을 채록해 가는 시편들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시간 속에서 끝없이 솟아오르는 자신의 사랑과 열정을 남김없이 바친 한 시인을 한동안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일차적으로는 ‘시’를 통해 아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을 재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랑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존재론적 사건임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고 유니크한 언어로 축조해 간다. 그 시편을 읽어 가는 우리도 “그림자가 흘린 흙 묻은 이름 하나 데려와/마주 보고 누운 밤”을(「그림자의 바깥」) 아득하고 아늑하게 맞을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 시인의 말
커다란 착각 앞에 마주 선다
다행이다
•― 저자 소개
한보경
2009년 [불교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여기가 거기였을 때] [덤, 덤] [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자몽을 좋아하지 않아], 산문집 [사탕과 버찌]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우리는 머나먼 이국에서 온 이방인이어서 ‒ 11
이름이 조르바였던 조르바 ‒ 12
일방통행로 ‒ 14
메노포즈 ‒ 16
우리는 모르는 게 많아서 ‒ 18
새라고 부르기 ‒ 20
새샘슈퍼 ‒ 22
노포동 두 시 ‒ 24
언더독에 얽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26
차귀(遮歸) ‒ 28
제2부
비 온 뒤 첫 소금 ‒ 33
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자몽을 좋아하지 않아 ‒ 34
징조 ‒ 36
묵비권 ‒ 38
나바위길 ‒ 40
봄눈 ‒ 42
비둘기의 시간 ‒ 44
문신과 타투 ‒ 46
낡은 양말 ‒ 48
이름이 바다였던 바다 ‒ 50
제3부
반전 ‒ 55
바람의 기억 ‒ 56
거울 앞에서 ‒ 58
화양연화 ‒ 60
씹고 물어뜯기 딱 좋은 ‒ 62
퀼트 ‒ 64
엎드린 말 ‒ 66
목요일의 일과 ‒ 68
곰소 ‒ 70
미담 ‒ 72
제4부
트와일라잇 존 1 ‒ 77
트와일라잇 존 2 ‒ 80
클리세 1 ‒ 82
클리세 2 ‒ 84
아이스크림을 옮기는 북극곰 ‒ 86
아모르파티 ‒ 88
빨강 모자 ‒ 90
친절하게 주(註)를 달아 주는 친절하지 않은 당신 ‒ 92
장마주의보 ‒ 94
트레이싱페이퍼 ‒ 96
제5부
테드 휴즈의 아홉 가지 레시피 ‒ 101
페이스메이커 ‒ 104
봄비 ‒ 106
그림자의 바깥 ‒ 108
말하지 못한 사연 ‒ 110
떨켜 ‒ 112
간절의 틈새에 손가락이 끼다 ‒ 114
개와 하모니카 ‒ 116
어바웃 타임 ‒ 118
고요 ‒ 120
해설 양균원 생략과 대조의 복화술 ‒ 122
•― 시집 속의 시 세 편
우리는 머나먼 이국에서 온 이방인이어서
등을 서로 등지고 다른 방향을 사랑했다 영원이라 착각했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다른 방향을 같은 방향이라고 겨루었다
똑같은 꽃무늬가 그려진 찻잔을 마주 놓고 똑같은 차를 우려내는 짧은 순간들이 우리를 일몰의 눈빛으로 데려왔다 은은하게 번져 가는 멀버리 향에 젖어 고단한 방향을 멀리 두고 갈라진 찻잔 틈에서 한 송이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적이 없었다 우리를 둘러싼 각진 모서리들이 팽팽하게 잡아당긴 방향을 내려놓고 찻잔 속에서 시남시남 풀어지고 서로의 입술이 묻은 꽃무늬들은 붉은 입술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이 아니다 벌어진 찻잔 틈에서 꽃이 피었다 꽃은 가끔 손가락을 길게 뻗어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는 머나먼 이국에서 온 이방인이어서 불가능이라는 이름표를 달지 않고 불가능으로 살았듯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제법 시끄러울 것이다 ■
이름이 조르바였던 조르바
수보리여, 언젠가 이름이 조르바였던 조르바를 찾아서
이름이 크레타였던 크레타에 갔을 때
켜켜이 쌓아 둔 이름들이 움직일 수 없는 금강석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은 건널 수 없는 큰 바다를 보이지 않게 건너가는
작은 뗏목처럼 떠 있었습니다
수보리여
이름이 조르바여서 조르바인 이름이 어떠한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이름이기 때문에, 조르바라 부른다면
껍질처럼 떠 있는 섬과 섬 사이 셀 수 없이 떠다니는 무수한 이름들을 조르바라
부르지 않고, 교외별전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여 이름이 크레타였던 크레타에서
이름이 조르바였던 조르바가 강가강의 셀 수 없는 모래 알갱이로
짓고 무너뜨리고 다시 짓고 또 지었다는
금강석보다 빛나는 교외별전은 차디찬 지중해 물빛보다 깊고 푸르렀습니다
금강이라는 이름은 무너지지 않는 이름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교외별전이 그 이름이었습니다
수보리여 무너지지 않는 이름으로
지었다는 그것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뜬눈으로 다 읽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여 나의 이름은 이름이 아니고
금강과 한편이라고 내가 나를 속인, 이름의 헐거운 그림자였습니다
수보리여 언젠가
이름이 크레타인 크레타에서
이름이 조르바인 조르바를 다시 만나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이제 알았다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바람의 노래」. ■
일방통행로
지난 시간을 모두 기억한다는 일방적인 말에
사랑이라 답한 적 있다
멈춘 시간 앞 버려진 낡은 기억을 뭐라 부를지 몰라
더는 네가 낯설지 않다고 에둘렀던 것
먼지 쌓인 다락방에 두고 온 시간들이 지불한
기억의 목록에는 일방통행로를 걸어온 곡절들이 빼곡했고
굽은 사연을 부러지지 않게 펴려면 일방적인 자세가 가장 옳았으므로,
기억 너머 곡절들이 유령처럼 피어오르는, 아샤라시스의 길을 걷는다
뿌연 유리창 너머 꽃무늬 양말이 덩굴처럼 걸린
양품점을 지나 빛바랜 색종이와 갈대 펜이 꽂힌 포켓수첩이 널린 문구점을 따라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지는 굽은 샛길을 걸어간다
색색의 사탕과 기름 밴 봉지에 담긴 튀김과자 더미 사이로
문 닫은 작은 주유소가 서 있고
습득물 보관소가 딸린 세놓은 점포들이 이어진다
흩어지는 환호성처럼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다니던 골목 저편
좌판 위에 놓인 시든 배추와 새빨간 입술을 내민 홍옥 한 알
지난 유행어처럼 서걱서걱하고 무안한 장면들은 정말 113번지였을까
맹랑한 거짓의 제스처처럼
투명한 속을 숨긴 홍안의 사과가 그립다
굽은 걸음걸이에 지나온 길을 실어 걸어가는 길
펼 수 없는 그 길 위에서
뒤늦은 사랑을 꺼내 든 건
당돌하고 막된 자유처럼, 일방통행에 대한 구부러진 직설을 펴기 위함이다
낮은 잡풀처럼 어여쁜 고독이 되기 위해서이다
*아샤라시스의 길: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속 이미지들을 차용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