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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宮 建築物 : 5대 고궁 소장문화재, 제809호-821호, 85.1.8 지정)
제811호 : 경복궁아미산의굴뚝(景福宮峨嵋山의굴뚝)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제812호 : 경복궁근정문및행각(景福宮勤政門및行閣)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근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형태가 날카롭고 곡선을 크게 그리고 있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원래는 한 칸 복도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2칸 복도로 만들었다.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으며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북행각 가운데에 사정문(思政門)이 있다.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가 있다. 벽에 만든 창의 형태는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궁 정전의 남문 중 하나 밖에 없는 2층 건물로, 위엄을 갖춘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813호 : 창덕궁인정문(昌德宮仁政門)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은 조선 영조 20년(1744) 불탄 것을 이듬해 복구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인정문 좌우로는 복도건물(행각)이 뻗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일부가 개조되어 건축 구조에 일본식이 섞여 있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제814호 : 창덕궁선정전(昌德宮宣政殿)
선정전은 조선시대에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임금님의 집무실이지만 왕비가 가끔 이용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누에를 치는 행사도 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1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탁 트여 있으며 바닥에는 붉은 색의 양탄자를 깔았고 천장에서 멋진 단청을 볼 수 있다. 선정전의 기와는 청색 유리기와인데, 강화에서 육연 스님이 굽던 계열의 기와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다른 건물에도 있었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고, 조선 중기 건축재료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제815호 : 창덕궁희정당(昌德宮熙政堂)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시대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11칸·옆면 4칸으로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면 9칸·옆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복도로 사용하였다. 앞면 9칸 중 3칸은 응접실이며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응접실에는 김규진의 금강산도, 해금강도 등의 벽화가 걸려있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었다. 이는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제816호 : 창덕궁대조전(昌德宮大造殿)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어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제817호 : 창덕궁구선원전(昌德宮舊璿源殿)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궁궐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을 두었다고 한다. 원래 춘휘전이었던 건물을 조선 효종 7년(1656) 광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어 사용하다가,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 한다. 현재 구선원전은 궁 안의 주요 유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은 건물로, 조선시대 왕실 제사용 건물의 유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제818호 : 창경궁통명전(昌慶宮通明殿)
창경궁 안에 있는 왕의 생활공간으로 연회 장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 처음 지었던 건물이 임진왜란의 피해로 불에 타 버려 광해군 때 고쳐 지었으나 정조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 창경궁을 고쳐 세울 때 같이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 구성이 조선 중기 양식의 특징과 정결한 건물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건물 왼쪽으로 돌난간을 만들어 놓은 연못과 둥근 화강석을 두른 샘, 건물 뒤쪽에 꾸민 정원이 한층 더 정감 어린 풍경을 만들고 있다. 궁궐 안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옛 격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제819호 : 덕수궁의중화전및중화문(德壽宮의中和殿및中和門)
중화전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광무 6년(1902)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중화전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밖으로 뻗쳐 나온 공포 부재의 형태가 가늘고 약해 보이며 곡선이 큰데 이것은 조선 후기 수법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안쪽에는 임금님이 앉는 자리를 더욱 위엄있게 꾸미기 위해 화려한 닫집을 달아 놓았다.
중화문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공포 양식은 중화전과 같이 조선 후기 수법을 가진 다포 양식을 따르고 있다. 원래 좌우로 복도건물(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 동쪽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820호 : 덕수궁함녕전(德壽宮咸寧殿)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생활공간(침전)이다.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 불에 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위쪽에 여러 가지 조각을 장식해 놓고 있다. 더욱이 지붕 모서리 부분에 조각들(잡상)을 나열한 점은 침전 건축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구성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간결하게 장식한 익공 양식이며 구름과 덩굴문양으로 꾸몄다. 건물의 천장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고, 네면 모든 칸에 벽을 두르지 않고 창을 달아 놓았다.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제821호 : 종묘영녕전(宗廟永寧殿)
종묘는 조선시대 왕·왕비·공신 등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그 중 영녕전은 종묘의 일부로 정전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영녕전을 짓게 된 동기는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을 늘리거나 새로 지어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 이 건물은 세종 3년(1421)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지은 것으로,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 곳이다. 현재 영녕전에는 가운데 4개의 방을 양쪽 옆에 딸린 방들보다 높게 꾸미고, 각 방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각각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조와 왕비,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태자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17세기 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이 건물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구조와 장식·색 등이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었다. 일부 구조에서는 옛 방식을 따라 입구에 널문을 달고 발을 쳤으며, 건물 안쪽 방 사이에는 담벽을 치지 않고 발을 늘여 나누어 놓았다. 신위를 모시는 집으로 옛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문화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제822호 : 영월암마애여래입상(映月庵磨崖如來立像) 이천
높이 7∼8m의 자연 암석을 다듬고 바위면 전체에 꽉 채워 조각한 마애불로 전체적으로 장대하며 힘찬 솜씨를 보이고 있어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와 양 손은 얕은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고 옷주름 등은 선으로 조각되었다.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하며 지그시 감은 듯한 눈과 굵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에서 힘차고 후덕한 고승의 느낌을 갖게 한다. 양 손은 가슴에 모아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으며, 손바닥이 밖을 향하고 있는 설법하는 모양이다.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부드러운 사선을 그리며 흐르고, 끝에서는 지그재그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옷주름선은 소박한 모습이며, 스님의 얼굴에 어울리는 은은한 덕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영월암의 창건조사 혹은 이 사찰과 인연이 깊은 나한이나 고승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유례가 드문 고려시대 마애조사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작품이다.
제823호 : 석남사영산전(石南寺靈山殿)
석남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20년(680) 고승 석선(奭善)이 세웠고 고려 초기 혜거국사가 넓혀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나중에 화덕(華德)이 다시 지은 절이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상과 그 생애를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모신 곳으로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의 끝이 짧고 약간 밑으로 처진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는 조선 초기 건물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튼튼하게 균형 잡힌 모습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제824호 : 청룡사대웅전(靑龍寺大雄殿) 경기 안성
청룡사는 원래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세워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던 곳이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크게 넓히면서 청룡사라 이름을 고쳤는데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으로 꾸몄다.
이 대웅전은 안쪽에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범종을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과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825호 : 숭림사보광전(崇林寺普光殿) 익산
숭림사는 고려 충목왕 1년(1345)에 세워졌다. 절 이름은 중국의 달마대사가 숭산 소림사에서 9년간 앉아 도를 닦았다는 옛 이야기를 기리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은 17세기 이전에 지은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건물 옆면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았다. 건물 안쪽은 보 끝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고, 기둥 윗부분에 설치된 건축 부재들은 각각 연꽃, 용의 몸, 용 앞발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양으로 장식하고 있다.
법식과 기법이 특징인 조선 후기 건축물로 건축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제826호 : 귀신사대적광전(歸信寺大寂光殿) 김제
귀신사(歸信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8)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8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절에는 예스러운 맛이 배어 있는 건물과 연꽃무늬로 된 받침대, 동물 모양의 돌 등 많은 석물들을 볼 수 있다.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17세기 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칸인 퇴칸은 벽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제827호 : 금산사대장전(金山寺大藏殿) 김제
금산사는『 금산사사적』에 따르면 백제 법왕(600)때 세운 절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원래 미륵전 뜰 가운데 세운 목조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예전의 기능은 없어지고 안에 불상을 모시고 있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짓고, 1922년에 지금 있는 위치로 옮겼다. 지붕 위에 남아 있는 조각들은 목조탑이었을 때 흔적이며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의 제자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양쪽 칸에는 1개, 가운데 칸에는 공포를 2개씩 올렸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민 우물천장이고 석가모니가 앉아 있는 수미단에는 정교한 장식문을 조각해 놓았다. 전체 건물 구조와 크기가 비교적 간단하고 작지만 큰 관심을 끄는 변형 건물로, 탑 형식의 목조 건축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제828호 : 금산사석등(金山寺石燈)
금산사 대장전 앞뜰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히는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그 밑에 아래받침돌, 가운데기둥, 윗받침돌로 3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어 놓았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까지 모두 온전히 남아 있다.
아래받침돌은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새겼고, 그 위의 세워진 가운데기둥은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모양이다.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보다 크고 무거운데, 역시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네 면에 창을 만들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창 주위에는 구멍이 3개씩 뚫려있는데, 창문을 달기 위한 구멍이었던 듯하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작은 꽃조각으로 꾸며 놓았다. 전체적으로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붕돌의 꽃조각이나 석등 각 부분의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제829호 : 금곡사삼층석탑(金谷寺三層石塔) 강진
금곡사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나, 기단과 탑신의 여러 군데가 갈라지거나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기단은 네 모서리에 두터운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마다 판돌을 끼워 두었는데 그 중 한 면에는 판돌이 없이 작은 돌들로 채워져 있다. 이렇게 모서리기둥을 본떠 새기지 않고, 직접 세운 것은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에서도 볼 수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각 면마다 감실(龕室)을 팠는데, 목탑에서의 감실은 불상을 모셔두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으나, 석탑에서는 이처럼 형식적인 조각만 하게 된다. 두툼한 지붕돌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밑면에는 6단씩의 받침을 두어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기단에서 3층 탑신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규모를 줄여 안정된 비례를 보이는 점이나, 각 부분에 짜임새가 있는 점에서 이 탑의 우수함을 엿볼 수 있다. 백제양식이 보이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아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함을 느끼게 한다.
제830호 : 불갑사대웅전(佛甲寺大雄殿) 영광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설과 무왕 때 행은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으나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셔 놓은 법당인 대웅전은 18세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기와 가운데 ‘건륭 29년(乾隆二十九年)’이라고 쓴 것이 발견되어 조선 영조 40년(1764)에 고친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융희 3년(1909)에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위부분에서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조각한 장식을 볼 수 있으며, 가운데 칸 좌우의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또한 가운데 칸에 달린 문은 연꽃과 국화 모양으로 꾸며 뛰어난 창살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의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다.
화려한 무늬와 조각을 새긴 조선 후기 목조 불전 건축으로 시대적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제831호 : 동화사삼층석탑(桐華寺三層石塔) 순천
동화사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밑부분인 기단(基壇)이 땅속에 거의 파묻힌 채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땅위로 드러난 기단의 맨윗돌은 4장의 돌로 짜여져 있으며 경사져 있다. 탑신은 모두 지붕돌과 몸돌이 각각 한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3단씩이나, 높이의 차가 심해서 형식화된 느낌을 준다. 또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옆면을 급하게 깍아 지붕돌 전체가 무거워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 등이 거의 온전히 남아있다.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각 부분의 표현이 약해지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도 3단으로 줄어드는 등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탑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제832호 : 성혈사나한전(聖穴寺羅漢殿) 영주
성혈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지형에 따라 건물을 자연스럽게 배치한 성혈사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1592) 이후 새롭게 지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1984년 수리를 할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명종 8년(1553)에 처음 지었고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앞문의 창에 조각을 만들어 장식하였는데, 특히 가운데 칸에서 물고기, 게, 동자상, 연꽃, 새 등의 뛰어난 조각과 공예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제833호 : 기림사대적광전(祇林寺大寂廣殿) 경주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인도의 스님 광유가 세워 임정사라 불렀고, 그 뒤 원효대사가 새롭게 고쳐 지어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절은 천년에 한번 핀다는 한약초 ‘우담바라’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한 곳이다.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제834호 : 대비사대웅전(大悲寺大雄殿) 청도
대비사는 신라 진흥왕 27년(566)에 신승이 세우고 진평왕 22년(600)에 원광국사가 보수했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왔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16세기 경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체 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의 구성도 꼼꼼하고 튼튼하며, 이를 이루는 세부 부재들의 형태를 보아 조선 초기의 건축 수법을 볼 수 있어, 대체로 조선 초기에서 중기에 걸친 양식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제835호 : 운문사대웅보전(雲門寺大雄寶殿)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크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넓어 5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안쪽은 큰 기둥을 하나만 세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다. 천장의 가운데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해 놓았다. 건물의 짜임이 조선 중기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836호 : 대적사극락전(大寂寺極樂殿) 청도
대적사는 조선 숙종 15년(1689) 성해대사가 건물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면서부터 비로소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이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이는 극락전은 불교도의 이상향인 극락정토를 표현하고 있는 법당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기단 앞부분에는 연꽃무늬와 거북 무늬를 조각하고 주변에 H자 모양의 선 조각을 하였다. 또 계단 양쪽 옆면에 용을 새겨 놓은 기단 부분의 조각들은 다른 건축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 되고 있다. 건물안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는데 천장은 앞뒤로 층지게 만들어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불단 위로는 불상을 엄숙하게 장식한 간략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안팎으로 여러 구성을 갖추고 있는 건물로 조선시대 건축사와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科學技術文化財, 보물 제837-851호, 85.8.9 지정)
제837호 :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複刻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국립고궁박물관
별자리를 돌에 새겨 놓은 천문도이다.
둥글게 그린 하늘 안에 1,464개의 별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천문도를 만들게 된 경위와 참여자 명단이 적혀 있다. 구도상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태조 4년(1395)에 처음 만든 것과 완전히 같고, 설명문으로는 권근의 글이 실려있다. 전체의 구성이 처음 새긴 것보다 더 좋고 당당하다. 1395년 처음 새긴 것을 돌이 닳아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숙종 13년(1687)에 다시 새겨 놓은 것으로, 천문도를 제작하게 된 이유와 과정 등은『증보문헌비고』,『상위고』와『서운관지』에 잘 나타나 있다.
제838호 : 수표(水標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조선 세종 때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를 만들고, 이 방법으로 하천의 수위를 측정기 위해 설치한 것이 수표이다. 한강변과 청계천 2곳에 설치하였는데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청계천의 수표는 성종(재위 1469∼1494) 때 돌기둥으로 개량한 것으로 높이 3m, 폭 20㎝의 화강암 사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밑에는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 속 깊이 박혀있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21㎝)마다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기고 3·6·9척에는 O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수위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하천의 범람을 미리 예고하였다.
세종 때 나무 수표와 비교하면 촌·푼까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가뭄과 홍수를 미리 예견할 수 있어 실생활에 직접 이용된 한층 더 발전된 것이다.
제839호 : 숭정9년명신법지평일구(崇禎9年銘新法地平日晷) 국립고궁박물관
대부분의 해시계가 반원모양인데 비해 이 해시계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는 면인 시반(時盤)이 수평을 이루고 있어 지평일구(地平日晷)란 이름이 붙었다. 전체가 흰 대리석으로 가로 120.3㎝, 세로 57.5㎝, 두께 16.5㎝이고 무게가 310㎏이나 된다.
시반면은 잘 연마된 평면으로 그 위에 시각선과 절기선이 매우 조밀하고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시각선은 한시간을 4각(角)으로 나누고 1각마다 시각선을 하나씩 그어 오전 5시45분부터 오후 6시15분까지 알 수 있게 하였다. 절기선은 하지에서 동지까지 13개선으로 이루어 졌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가운데 삼각형의 시표(時表)가 있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인조 14년(1636) 시헌력법에 의해 이천경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해시계가 만들어진 표준 위도를 계산했는데 30°54′N으로 중국 북경의 위도와 같아, 이 지평일구는 북경을 관측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1645년 우리나라에 돌아오면서 그 일행이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제840호 :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 국립고궁박물관
해시계의 일종으로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가로 58.9㎝, 세로 38.2㎝, 두께 16.3㎝이다.
원리는 그래프 용지에 1㎝ 간격으로 동심원과 10°간격의 방사선을 그어놓고, 그 중심에 막대를 세워 시각에 따른 그림자의 변화를 보는 형태로, 이것은 반구형을 한 해시계 앙부일구를 전개하여 평면에 옮겨 놓은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측면에 새겨져 있는 글을 통해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고 구조와 평면에 그려진 시각선, 절기를 나타낸 선이 중국의 것과 같아 그것을 본 떠 관상감(觀象監)에서 새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이들 신법지평일구와 같은 휴대용 해시계가 있다. 가로 16.8㎝, 세로 12.4㎝ 크기의 놋쇠로 만든 이 해시계는 자석으로 된 침이 들어 있어서, 휴대할 때 남북을 정하여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게 했다. 현재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