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은 종교인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은 지구에서 보낸 화성 탐사선이 언제 화성 표면에 안착할지 초 단위까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더욱 천년 아니 만년 후의 일식 현상까지 정확히 맞출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떤 종류의 일식이 지구상의 어디에서 가장 잘 관측되며, 어디에선 태양의 몇
퍼센트가 가려진 현상이 나타난다고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고전 물리학의 창시자인 뉴턴이 1697년 발표한 “질량을 가진 물체들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계산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정확한 뉴턴의 법칙이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큰, 다시 말해 빛의 속도로 수만·수억 년을 지난
공간의 우주적인 거시세계에서나, 반대로 전자 단위의 극히 미시적인 세계에서는 쓸모가
없어지고 맙니다.
거시세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미시세계에서는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1901~1976)와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1887~1961) 등이 정립한 양자역학이
적용되지 뉴턴의 중력 이론만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뉴턴이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그가 과학자라면 자신의 부족함을 순순히 인정할
것입니다. 자신의 평생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하더라도 잘못된 이론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까요?
종교는 때론 본래의 역할과 관계없이 미래를 예견해야 하는 일을 떠맡아야 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현재도 사이비 종교일수록 스스로 예견을 주 임무로 자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예견이 빗나갔을 때, 책임 있는 해명이나 오류를 인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본인이 이룩한 ‘종교적 무엇’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에 넘치는 사회적 평가와 권위를 인정받아 왔음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경우 대부분 붓다와 예수의 몫이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반드시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합니다. 심지어 14세기부터 중세에 있어서의 성직자는 하나님의 종복으로
충실하기 위해 수백 년간 인류의 지성에 반하는 행동을 정당화했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야 부분적이나마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불교 역시 기독교보다 먼저 발생하여 인류 역사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쳐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불교의 수행자도 미래 어느 때에 기독교의 성직자처럼 똑같은
고백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는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많기는 합니다. 우선 교리상으로 국가적 단위의 집단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개연성에서 현저한 차이가 납니다.
또한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도 불교는 개인의 수행을 위주로 하는 무신론이라, 기독교보다
사회와 외적 환경의 변화에 상대적으로 민감해질 개연성도 현저히 떨어지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참회’에 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은,
100년 안에 불교가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확신이 될
것입니다.
당장 우리는 부파불교시대 수백 년을 불필요한 논쟁으로 소모된 쇠퇴의 시대라 말하고
소승小乘이라 폄하합니다. 아마 그 시대의 논사들이 지금 앞에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해명과 반성문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불교가 지향하는 교설敎說이나 수행법, 더욱 신도들에게 방편이라는
명목으로 행하는 일련의 종교적 행위가 미래의 반성을 염두에 둘 수준은 절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지는 정말 의문입니다.
지금 출가자와 재가 불자 모두에게 미래에 참회해야 할 일이 없도록, 한 번쯤 점검해 보자는
말은 짓지도 않은 죄를 인정하자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뉴턴은 종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저만 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