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세기 전반기 독일을 대표하는 토마스 만의 단편 소설입니다.
평소 존경해오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사망 소식과
당시 베니스에서 휴양중이었던 작가의 체험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젊어 일찍부터 그 재능을 드러내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힘입어 귀족의 칭호까지 받은 주인공, 초로의 시인 구스타프 폰 아셴바하의
베니스에로의 휴양 여행과 거기서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는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와의 관념적인 사랑을 다룬 작품인데
동성애와 일종의 (자기)관음적인 경향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소년에 대한 초로의 작가의 동성애적 사랑은
내면의 갈등으로만 타오를 뿐 결국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베니스를 강타한 전염병(콜레라)으로
해변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시인이 운명하는 순간, 절묘한 시점의 이동(아셴바하 →타치오)에 감탄하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사랑했던 이(타치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리 쓸쓸한 죽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작 : 1971 년
감독 : 루키노 비스콘티
배우 : 더크 보가드 / 마리사 베렌슨 / 본 안드레센 / 실바나 망가노
각본 : 루키노 비스콘티 / 니콜라 베달루코
시간 : 130분
1970년대 만들어진 영화였는데 우리나라 정식 개봉에는 30년이 걸렸습니다.
원작인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말러의 사망을 계기로
감각이 아닌 정신을 우위에 둔 예술가의 초상을 일반화한 것이라면
영화는 한술 더 떠 아예 말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말러의 음악을 전편에 깔면서 말러의 가족史를 군데군데 배치하고
감각과 정신과 예술에 대한 논쟁을 통해 말러의 예술관을 드러내 보이며
원작이 말러의 죽음에 착안했던 계기를 좀 더 실감나게 필름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아셴바하가 평생을 추구해 온 예술관을 온 몸으로 체화한 듯 흠없이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
원작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내면에서만 불타오르던 미소년 타치오에 대한 사랑이
영화에서는 좀 더 직접적으로, 다양한 뉘앙스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오프닝에서 엔딩 크레딧까지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가
꿈결처럼 아련하게 흐르면서, 교향곡3번 4악장의 노래가 사용되기도 하는 등
말러의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지배하는 영화였습니다.
말러와 관련한 부분들이 제대로 고증을 거친 것인지는 비록 알 수는 없지만
1911년 말러의 사망 당시 말러의 내면이 이러했을 것이라는 감독의 상상력은
보는 이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마지막 장면...하프와 현이 잘 어우러지는 아다지에토가 흐르는 가운데
파장 무렵의 을씨년스러운 해변에 앉아서
먼 바다를 가리키는 소년의 손끝을 힘겹게 따라가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마는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엔딩 크레딧.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명장면이었습니다.
* 말러 교향곡 제5번 관련 잡담
말러는 5번 교향곡을 4악장으로 구상하고 곡을 써내려가던 중
빈에서 알마 쉰틀러(후에 부인 알마 말러)를 만나게 된 이후
'아다지에토'를 추가하여 5악장의 작품으로 완성했다고 합니다.
멩겔베르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4악장 아다지에토는
말러가 알마에게 바치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멩겔베르크가 남긴 악보의 여백에 따르면,
"이 아다지에토는 구스타프 말러의 사랑의 고백이다.
말러는 편지대신 이 곡의 원고를 보냈고, 알마는 말러에게 오라는 답장을 보냈다."
고 기록은 전합니다.
1904년 5번 교향곡의 초연 이후 이 작품은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말러 본인의 불만과 지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수없이 많은 개정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1910년 심장병으로 쓰러져 이듬해 사망하기까지
말러가 끝까지 몰두한 것도 이 5번 교향곡의 개정작업이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고백 아다지에토
죽음 직전까지 개정을 위해 손에서 놓지 않았던 5번 교향곡의 악보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5번 교향곡을 시종일관 흐르게 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겁니다.
----------------------------------------------------------------------------------------------------------------------
=== 참고자료 === <2014년 3월 31일자 발행 네이버캐스트 / 진회숙 글>
영화 속 클래식
로치노 비스콘티 감독
베니스의 죽음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교과서에 실린 [청춘예찬]이라는 수필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수필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 말이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나 자신이 청춘이었기 때문일까. 너무나 당연한 것을 감격조의 말투로 ‘예찬’ 씩이나 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소중함을 모르는 법이다. 그것을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청춘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길 가다가 젊은이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다. 이제는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 나의 젊은 날,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그 시간들이 그립다.
문득 [청춘예찬]이라는 수필을 찾아 읽어 보았다. 젊은 시절,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 했던 글귀들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박힌다.
보라, 청춘을!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는 생의 찬미를 듣는다. 그것은 웅대한 관현악이며, 미묘한 교향악이다. 뼈 끝에 스며들어가는 열락의 소리다.
글을 읽으면서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구스타프 아센바흐를 생각했다. 작곡가인 그는 휴양 차 베니스의 리도 섬으로 여행을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그리스 조각처럼 완벽한 미모를 가진 타치오라는 소년을 보게 된다. 아센바흐는 순식간에 소년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쉰 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열아홉 소녀처럼 들뜬 마음으로 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다. 호텔 로비, 레스토랑, 베니스의 뒷골목, 리도의 해변, 산 마르코 성당 등 소년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닌다.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 아센바흐는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노력으로 태어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타치오를 보는 순간, 그는 이런 자신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다. 그는 친구 알프레드가 아름다움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도 이것을 믿지 않았다.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알프레드의 생각은 그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알프레드의 말대로 ‘그냥 저절로 아름답게 태어난’ 미모의 소년을 보고 그는 단 한순간에 마음이 바뀐다. 그는 열병처럼 들뜬 마음으로 소년을 바라본다. 아폴로적인 절제와 금욕을 최고의 덕목으로 알고 살았던 작가가 한 순간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에 속수무책으로 내몰린 것이다.
그러던 중 아센바흐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호텔의 투숙객들이 하나 둘 섬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 곳곳에서 이상한 소독약 냄새가 나고, 전염병이 나돌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온다. 아센바흐는 이유를 알기 위해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관광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시당국이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소독을 실시한다는 얘기뿐이다.
하지만 아센바흐는 결국 진실을 알게 된다. 아시아의 어느 곳에서 시작된 콜레라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제 리도 섬에까지 상륙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전해 준 사람은 그에게 하루빨리 섬을 떠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그는 섬을 떠나지도 않을뿐더러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소문을 미처 듣지 못했는지 타치오의 가족은 여전히 섬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것을 보고 아센바흐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사람들이 전염병을 피해 모두 섬을 떠나고 타치오와 자기 둘만 섬에 남는 상상이다.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아센바흐는 무모한 일을 저지른다. 이발사를 찾아가 흰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다. 그리고 입술에는 빨간 연지를 바른다. 그렇게나마 늙은 모습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늙은 얼굴을 서글픈 화장으로 가린 채 아센바흐는 소년의 주변을 맴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찾아온다. 소년의 가족이 섬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호텔 지배인으로부터 소년의 가족이 점심 식사 후에 떠날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아센바흐는 안타까운 눈길로 소년의 행방을 쫓는다. 부자연스럽게 화장을 한 얼굴로 해변의 의자에 앉은 아센바흐. 그는 소년과의 이별에 절망한다. 전율하는 그의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머리와 눈썹, 얼굴과 입술을 물들인 염색약과 화장품이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 추한 모습은 되돌릴 수 없는 젊음을 화장으로 감추려 했던 남자의 소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다시는 소년을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온몸을 엄습하는 순간, 그의 몸에 침입했던 병균이 활동을 시작한다. 소년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동안 아센바흐의 삶도 서서히 꺼져간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온다. 멀리 사라져가는 소년을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센바흐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소년과의 이별이 곧 육신의 죽음이자 정신의 죽음이 된 것이다.
[베니스의 죽음]은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1911년 5월, 토마스 만은 아내, 형과 함께 베니스의 리도 섬으로 여행을 갔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한 미소년을 보고 단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소년은 그가 평소에 상상하던 ‘이상적인 아름다움’, ‘완벽한 아름다움’의 실체였다. 토마스 만은 마치 자석처럼 소년에게 빨려 들어갔다. 베니스에 머문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그의 시선은 그림자처럼 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녔다. 소년을 향한 열망은 작가이자 어른으로서 토마스 만의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토마스 만은 이 열병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썼다.
이 소설은 토마스 만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 만인 1971년에 비스콘티 감독에 의해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본래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는 주인공 아센바흐가 작가로 나온다. 하지만 비스콘티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직업을 작곡가로 바꾸어 버렸다.
그가 염두에 두었던 작곡가는 누구였을까. ‘구스타프 아센바흐’라는 주인공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구스타프 말러였다. 비스콘티가 구스타프 말러를 모델로 했다는 것은 이 영화 전편에 말러의 교향곡이 깔린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아니 그 보다 더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 중간에 친구 알프레드가 말러 [교향곡 제5번]의 4악장을 피아노로 치며 “이것이 바로 자네 음악이야”라고 하는 장면이다. 또 하나는 아센바흐의 회상 장면인데, 이것은 토마스 만의 소설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아센바흐는 아내와 딸과 함께 했던 행복한 시절을 회상한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사랑하는 딸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딸의 죽음 앞에 애통해하는 아센바흐에게서 실제로 어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던 말러를 연상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 소년에 대한 부도덕한 열망으로 괴로워하는 작가 아센바흐의 모습 위로 평생 젊음의 소멸, 삶의 유한함에 대해 애통해했던 말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영화의 주제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이다. 처연하고 비극적인 느낌의 이 느린 악장은 영화에서 스토리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130분 남짓 되는 상영시간 동안 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에 말러의 음악은 상당히 자주, 그리고 길게 등장하며 단순한 배경음악 이상의 의미로 쓰인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에는 말러의 [교향곡 제3번] 4악장도 나온다. 알토 독창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이 악장의 가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먼저 저음 현악기들이 두 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음형을 느리고 우울하게 반복해서 연주하면 이어 알토가 무거운 소리로 노래를 시작한다.
오, 인간이여. 오, 인간이여.
경계하라!
한 밤중의 심오한 목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잠을 잤다. 그리고 이제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이 세상은 심오하다. 낮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다.
오! 인간이여! 오! 인간이여!
깊다. 깊다. 고통은 깊다.
그러나 환희는 처절한 고통보다 더 심오하다.
고통이 말한다. 사라져버려!
그러나 모든 환희는 영원을 갈구한다.
깊고, 깊은 영원을 갈구한다.
이 음악은 아센바흐가 해변에서 타치오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나온다. 붉게 물든 해변의 황혼, 알토의 무거운 음색과 오보에에 이어 잉글리시 혼이 연주하는 새 울음소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장면이다. 새 울음소리를 묘사한 악보에 말러는 ‘밤의 새’라고 적어 놓았다. 밤의 새는 죽음을 알리는 새를 의미한다. 가사에는 죽음이 나오지 않지만 이 곡 역시 근저에 죽음의 그림자를 깔고 있는 것이다.
말러의 아내 알마에 의하면 말러는 살아 있는 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는 사실 그의 아이가 죽기 전에 작곡한 것이다. 그는 행복한 순간에도 늘 죽음을 생각했다. 어린 시절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낸 상처가 일생 동안 그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말러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행복한 순간에도 죽음이라는 화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존재의 슬픔이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도 말러의 [교향곡 5번]의 4악장은 집요하게 죽음을 이야기한다. 말러의 교향곡 편성은 목관과 금관, 다양한 종류의 타악기들을 동원한 대편성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악장만은 예외이다. 여기서 말러는 관악기와 타악기를 모두 빼고 오로지 현악기만 사용했다. 현을 활로 문질러 소리를 내는 현악기의 음색은 본질적으로 비장하고 처연할 수밖에 없다. 갑작스러운 저음역의 포르테에 이어 나오는 비장한 클라이맥스는 아센바흐가 베니스에 도착할 때부터 이미 그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이 음악은 수시로 등장해 인간존재의 실존적 의미에 대해, 젊음의 소멸과 삶의 유한함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에 갑자기 찾아올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말러의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보. 폭풍이 오려나 봐요. 검은 구름이 산을 뒤덮고 있어요.”
멀리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듯 현악기의 처연한 음색이 점점 소리의 강도를 높여간다. 그러다가 마침내 절규하듯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그 절규를 배경으로 아센바흐는 끝내 타치오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4 00:5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25 08:51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5.05.07 11:12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5.05.08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