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번도 시도되지 않은 조선시대 봉수제도와 춘천권역 봉수연구 논문입니다.
논문은 제37회 전국향토문화자료공모전(논문부문)최우수상 수상논문에 조선시대 봉수제도연구를 추가하여 1, 2부로 구성된 합본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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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 熢燧制度와 春川圈域 烽燧硏究
[국문요약]
이 글은 1차적인 문헌기록은 없으나 근·현대에 들어와 봉수로 특정지어 지거나 명칭으로 인해 봉수로 추정될 수 있는 춘천권역 5개 시·군의 25개 미상유구 조사연구이다. 이를 위해 5년여의 기간 동안 89종의 문헌과 선행연구 논문, 한국고전종합DB에서 ‘춘천 봉수’, ‘봉수·烽燧’·‘봉화·烽火’·‘후망·堠望’·‘요망대·嶢望臺’로 검색되는 12,730건의 검색자료 분석과 40여차례에 걸쳐 83.2km의 춘천분지 산맥과 춘천권역 63개 산봉우리를 답사하며 조사한 기록이다. 문헌자료가 없는 춘천권역의 봉수를 이해하려면 필연적으로 전국의 봉수망과 용례(用例)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조선시대 문헌의 전국 봉수현황과 선행연구를 살펴보며 선행연구에서 나타난 오류와 누락된 부분을 비교 검토하였다.
춘천권역은 고려시대부터 여러 차례 큰 변란이 있었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도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춘천권역은 조선시대 춘천부 관할이던 부·군·현 중, 현대에도 상호 연관되는 지역으로 화천, 가평, 양구, 홍천을 포함한다. 춘천권역은 거란과 몽골의 침략이 이어지던 고려 고종대에는, 철원-김화-낭천-춘천에 이르는 노선이 있고, 회양에서 분기된 동쪽의 진입로가 회양-양구-춘천으로 이어지며, 임진왜란 때는 원주-홍천-춘천에 이르는 노선이 개설되어 있는 지역이다. 서울로 이어지는 영로는 석파령(席破嶺)으로 많은 문인들의 시와 기행문에 보인다.
수많은 변란을 격은 춘천권역에서 이곳을 관장하던 춘천부에는 시급한 경보체계의 필요성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현대 이전, 춘천권역 봉수와 관련한 1차 사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지지류에서도 춘천권역의 봉수와 관련한 문헌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봉수로 특정된 유적의 존재가 기술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토대로 현대의 여러 자료에는 미상의 유구들이 봉수로 특정되고 있다.
춘천권역 봉수에 관한 문헌자료가 없다보니 체계적으로 기술된 선행 연구는 없다. 문헌이 없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풀기위해 89종에 이르는 문헌과 논문, 12,730건의 관련 자료를 분석하고, 근·현대 자료에 등장하는 미상의 유구들을 현지 조사한 결과 춘천권역에는 15개소 이상의 봉수가 설치되어 운용되었음이 확인된다. 현지 조사에서 보이는 일부 유구를 보면 춘천권역에 봉수가 설치되는 시기는 조선시대 이전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헌적 근거와 고고자료 근거가 담보될 수 있는 시기로 한정하면 조선 중후기 이후이다.
춘천권역의 봉수는 역사 지리적 환경, 산맥 및 영로, 지방군제의 확립에 의한 봉수 입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춘천권역은 역사 지리적으로 봉수의 필요성이 있으며, 산맥 및 영로의 위치는 효용성을 높여준다. 지방 군제의 개편은 관방과 영로의 정비를 수반하게 되므로 이런 시기적 변화의 고찰을 통해 문헌상 용례가 없는 부분을 해석할 수 있다. 춘천권역 봉수는 국가봉수제도에 속하지 않는 권설봉수로 1기의 연도를 가진 간봉의 형태이며, 일부의 봉수는 연도가 없는 요망대의 성격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으로 남아 있는 봉수의 정비 및 운용 시기는 조선중후기인 인조16년(1638)정비되거나 신설되어 순조대까지 약 180여년간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연구를 통하여 화천군 사내면에서는 지역의 역사를 다시 고찰해야할 흔적들이 보인다. 어떤 기록을 통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보루(保壘)와 그곳에서 발견되는 철마(鐵馬), 보루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고대의 교통로 문제, 옛 지명에서 나타나는 군사 조련장, 고려 초기 이전의 유물이 일부 발견되는 등 고고학적 조사가 필요하다.
주제어 : 춘천봉수, 요망대, 후망, 봉의산 봉수, 봉수와 창고, 봉수와 역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