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한권의 책이 있다.
지난 봄 싱가폴 키노쿠니아 서점에서 사온 책 <The Real Bill Shankly>.
리버풀의 축구영웅 빌 쉥클리(Bill Shankly. 1913-1981) 감독의
다큐멘터리 화보집이다.
빌 쉥클리를 아는가?
일반인들에겐 생소하지만 축구 마니아들에겐 심장이 떨리는 이름이다.
‘리버풀’ 하면 사람들은 비틀즈를 떠올린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하나 더 떠올려야 한다. 그 이름이 바로 빌 쉥클리.
1913년에 태어나 1981년, 68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59년부터 1974년까지 프리미어 리그 리버풀팀을 이끌면서
리그 챔피언 3회, FA컵 우승 2회, 그리고 한 차례의 UEFA컵 우승을 거머쥔 명장이다.
성적표로만 보면 알렉스 퍼거슨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남긴 모든 업적을
셈하자면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손꼽힌다.
오늘날 리버풀은 프리미어 리그 4강 수준이지만 70년대에는 리그를 휩쓸다시피했다.
리버풀을 그 반석 위에 올려놓은 감독이 바로 빌 쉥클리다.
리버풀 안필드에 가면 그의 조각상이 서 있다.
스카프를 목에 걸친 채 주먹을 쥔 두 팔을 비행하는 자세로 펼친
빌 쉥클리 특유의 제스츄어를 새긴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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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이 사람이 남긴 ‘명언’을 만났다.
축구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가리켜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말한다.
나는 그런 태도가 무척 실망스럽다.
감히 말하건대, 축구는 그보다 더, 훨씬 더 중요하다.
Some people believe football is a matter of life and death.
I am very disappointed with that attitude.
I can assure you it is much, much more important than that.”
놀라운 코멘트다. 그의 말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유명 인사들이 더러 세상에 내놓는 ‘명언’류의 광고카피가 아니다.
그는 실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거나 언론 플레이용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쉥클리의 지휘를 받았던 리버풀 소속 타미 스미스라는 선수는
스승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침에 연습장에 도착해 감독님에게 ‘굿모닝’하고 인사하면 감독님은
‘그래 축구하기 좋은 날이지’하고 대답했죠. ‘오늘은 비가 오네요’하고 인사하면
감독님은 ‘그래 오늘은 공이 미끄러지기 쉬운 날이지’하고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축구는 단지 직업이 아니라 신앙이었다.
축구에 대한 헌신을 통해 신을 경배했고, 도를 깨우쳤다.
모든 것을 축구로 해석하고, 축구로 생각하고, 축구로 행동했다.
성적표는 그 다음 문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생사가 걸린 문제 이상인지,
하고 있는 일을 그렇게 대접하고 있는지.
직업에서의 불행은 거기서 비롯된다.
직업이 돈벌이 수단밖에 안된다면,
겨우 돈이나 몇 푼 벌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라면 권태와 좌절,
일시적인 승리의 자만심에 뒤따르는 자괴감,
그런 감정들이 시시각각 밀려오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직업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건 환상이다.
사고방식이 그런 식이라면 이걸 하나 저걸 하나 재미없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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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빌 쉥클리 다큐멘터리책을 열어보곤 한다.
이런 사람은 삶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고 가르쳐주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가슴을 깨워 흥분시켜주기 때문이다.
늦은 밤 그의 삶이 담긴 책장을 넘기니 다음과 같은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_1981년 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수많은 리버풀 시민들이 몰려와 꽃을 던지고 문 밖에 기도하는 장면
_안 필드의 장례식장. 남녀노소 추모객들의 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_리버풀 구장, 죽은 쉥클리의 생전 모습이 프린트 된 휘장을 들고 응원하는 팬들
팬들과 축구 관계자들이 쉥클리에게 바친 인상적인 말들 몇 개.
“우리는 함께 노래해요. 당신은 결코 홀로 걷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헌신을 통해 업적을 남겼다.”
“해내고자 하는 그의 마음(motivation)은 산을 움직였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심어주었다. 나는 해낼 수 있다는” _케빈 키건
“쉥클리는 단지 축구천재가 아니다. 강력한 카리스마, 하나의 영적인 힘이었다”
리버풀 에코라는 신문은 제1면에 쉥클리의 영면기사를 실으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쉥클리, 용기, 결심, 성공의 상징!”
몇 개만 살펴봐도 쉥클리가 무엇을 남기고 갔는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장례식 날 폴 매카트니가 기타를 들고 와서 추모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있다.
존 레논이 살았더라면 그도 함께 했을텐데.
쉥클리는 언제가 이런 말도 남겼다.
“컨디션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소름이 돋는 말이다. 기분이 흥하거나 운이 좋으면 누구라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그때 뿐이다. 문자 그대로 ‘클래스’라는 게 있다.
리버풀의 클래스를 만든 사람이 쉥클리다.
쉥클리는 집단이든 개인이든 어떤 ‘클래스’를 향해 나아가야 하고,
얼마든지 그걸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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쉥클리의 책을 보니 몰락해가는 이 나라 대통령의 얼굴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며칠 전 그는 “나라가 온통 비리투성이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곡소리가 하늘을 찌를 판인데, 사람들은 잠시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런 코메디가 어딨냐고.
마무리에 이런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빌 쉥클리의 조각상에 새겨진 문구,
리버풀 시민들이 붙여준 찬사를 보고 내가 전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겨져 있다.
“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He made the people happy”
적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그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는 말은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내가 나에게 묻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가?”
첫댓글 지기님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시고 계셔요. 지기님의 글을 통해 저는 위안받고, 길을 찾고, 바른길을 찾음에 안도하고 행복해합니다. 감사드려요.
아~~ 요즘 나의 묘비명을 생각하던 차인데 저도 빌 쉥클리의 묘비명을 사용해야겠어여...좋은글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