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교의 탄생』
깊이 믿지는 않지만 어쩌면 내 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종교, 그중에서 불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던 차에 만난 책이 이 책이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등과 같이 만든 사람이 명확하지만, 잘 믿기지 않는 것이 불교다. 인도 북부 작은 나라 왕자이던 석가(싯다르타)가 생노병사를 고민하다 만든 것이 불교라지만, 그 전부터 전래 되어오던 사상을 석가가 말하고 그것을 제자들이 모아 《경전》을 만든 것이 불교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책 저자는 미야모토 케이이치(宮元啓一)일본 고쿠가쿠인(國學院)대학 교수이고, 번역은 경북대 한상희 교수가 했는데, 두 분 모두 불교를 깊이 연구한 학자이다.
불교의 성립 배경은 ‘윤회설’이다. 그와 함께 생겨난 것이 ‘해탈론’인데, 윤회설은 ‘스스로 행한 행위의 과보는 반드시 스스로 받게 된다’는 자업자득을 골자로 하는 ‘인과응보’의 법칙과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이런 상황에 있게 되는 것은 각자의 전생 행위에 대한 과보로 내세의 모습 또한 이 생에서의 행위가 좋고 나쁨에 의해 결정된다는 관념에서 시작되었다.
윤회설은 기원전 1500년경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로 침입해 오기 전부터 인도아대륙에 살던 농경 민족들 간에 전승돼 오던 것을 토대로 성립되어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른 것은 아리아인들에 의해서였다. 엄격히 출신 계급을 중시한 그들은 이것을 ‘베다종교’라고 했는데, 살아서는 계급이 존재하지만 죽은 뒤에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 한 가지로 신분상 차별도 없고 누구나 동등하게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여긴 데서 시작되었다. 최초의 사자(死者)는 ‘야마’라는 남자였고 야마에게는 여동생 ‘야미’가 있었다. 근친상간 사이였던 그녀는 오빠의 죽음을 너무나도 탄식하며 슬퍼했다. 그래서 신들이 그녀의 슬픔을 달래 주기 위해 날(日)과 달(月)이라는 흘러가는 시간을 만들었다. 최초의 사자인 야마는 명부(冥府)의 왕이 되었으며, 염마대왕이 야마의 한역(漢譯)이다. 왕은 죽은 자를 엄정하게 재판하는 역할이 아니라 온유하고 자비심이 충만한 왕이었으나, 점차 문명화되면서 사회질서의 기본으로 계급 구분이 엄격화 되면서 명부의 모습도 크게 변화되었다.
기원전 8세기경 제사 행위의 기원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신화와 설화의 형태로 설명한 ‘베다성전(聖典)’이 만들어졌으며 제사는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지만, 의미 없이 지내는 제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고 행위보다 지식을 중시하는 경향은 단시일 내에 막을 수 없을 만큼 가속화되어 마침내 지식만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생전에 무지로 인해 이러저러한 죄를 저지른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 그에 상응한 과보를 받는다는 인과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태어나고 죽어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과는 다르지만 자업자득과 인과응보는 책임 윤리의 원형이 명확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라문(婆羅門-인도의 카스트 중 최상위 계급 - 성직자 등)들에게는 인과응보 윤리사상이 널리 자리 잡아갔던 것이다.
윤회는 전생을 되풀이하여 재생하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죽음을 되풀이 하는 일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생을 얻은 자는 바라는 대로 살 수만은 없는 데서 오는 갈등과 죽음으로 대표되는 상실의 비애로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윤회전생은 괴로움 외에 그 무엇도 아니며 거기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해탈은 어떠한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목표가 되었다. 해탈하면 이제 더 이상 태어나는 일이 없고, 이 생에서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더는 죽음을 되풀이하는 일도 없다. 그와 같은 상태를 불사(不死, 아마따)라고 부른다. 이와는 다르지만 열반(涅槃, 빕바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열반은 자이나교와 흰두교에서도 사용되는 표현이다.
해탈과 열반은 ‘윤회를 반복하는 괴로움의 세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이는 차안(此岸)이 아니라 ‘해방된 궁극의 평안, 적정의 경지, 불사’를 말하는 피안(彼岸)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럼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윤회 이전을 정확히 봄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윤회전생(인과응보)를 일으키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선악의 업이야말로 윤회전생의 원동력이며, 그 지향을 품고 있는 자기(自己 - 아트만), 즉 자기동일성의 원리, 자아, 영혼, 생명 원리야말로 그것을 짊어지는 주체이다. 또한 업은 행위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이고 실체적인 힘으로 변해 축적된다는 생각도 그렇게 완성되었다.
(윤회와 열반, 전생과 인과응보, 자아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된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다음을 읽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는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원체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있으므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도에서 출가자는 여러 가지 의미와 호칭을 가지는데, 한역 유행(遊行)이란 표기가 그것이다. 걸식(乞食)과 탁발, 탁발승도 같은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출가자는 금전이나 음식 등 재산을 모으지 않으므로 그날그날 양식은 발우(鉢盂) 하나로 근처 집들을 돌아다니며 얻고, 원칙적으로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원래는 출가자는 ‘고행자’를 의미했다. 철저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슈라마나’는 한역 사문(沙門)에 해당한다.
인간의 2대 욕망은 성욕과 식욕이지만, 먹을 것에 대한 원망은 무서울 정도로 식욕을 컨트롤하기는 매우 어렵다. 세속의 가치관을 불식시키기 위해 불교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수행의 근간에 두고, 특히 음식에 대한 금욕 규정을 눈에 띄게 많이 두고 있다. 그날 오전에 발우 하나에 얻은 음식만 허락되고 두 번 얻을 수 없다. 병에 걸렸을 때가 아니면 일부를 저장해 두고 오후에 먹는 것도 금지된다. 식욕을 억제하는 것은 선악의 피안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 즉 해탈을 향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중요시 된다. 거주와 의복 등도 마찬가지다.
해탈로 가는 최단코스가 출가라는 결론을 얻는 것은 논리적으로 인도의 고대 인텔리들에게는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윤회설이 전면에 등장하고, 출가하는 사람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문헌에는 출가이념을 확실히 세운 후에 세속 생활을 버리고 출가한 최초의 인물은 ‘야즈니발카’로, 그는 비데하 국의 지나카 왕에게 “바라문들이여, 베다 독송에 의해, 공희(供犧-신에게 바치는 희생물)에 의해, 보시에 의해, 고행에 의해, 단식에 의해 그것을 알기 바랍니다. 바로 이것을 알면 성자가 됩니다. 이 세계를 바라면서 출가자는 출가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야즈니발카는 자손을 두지 않았고 아내에게 전 재산을 주고 출가했다. 그를 비롯해 적지 않은 바라문들이 출가자가 되었다. 비(非)바라문 계로 사문이라 불리는 출가자도 다수 출현했다. 그러나 북인도의 지배적 종교였던 베다교는 세속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종교로 자주 제사를 주최하여 신들을 공경하고 베다 학습에 힘써 성전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 세대에 제사를 집행할 아들(딸에게는 자격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을 얻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 했다. 출가한다는 것은 이런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수적 바라문들에게는 용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출가는 바라문 중심 시스템을 파괴하고, 바라문들의 생활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뜻밖의 존재였다.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간주 되는 『숫따니빠따』에는 고행에 전념하는 석존에게 악마 ‘나무찌’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대가 베다의 학생으로서의 청정한 행위(범행)를 하고, 성스러운 불에 공물을 바침으로써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나니(고행에) 노력하고 애써서 무엇이 되겠는가?”
나무찌의 말은 세속 생활, 특히 가장으로서 집안의 번영을 꾀하는 생활기를 최고의 선(善)으로 간주하는 바라문들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무찌는 바라문들의 견해가 석존의 시대에, 게다가 바라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타락한 지역의 사회에서도 지극히 상식처럼 통용되었던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풍조 속에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출가자가 계속 늘어나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자, 바라문들은 출가 생활의 이념적 타협점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궁리 끝에 만들어진 것이 『마누법전』(기원전 2세기∼기원후 2세기)이었다. 출가 생활을 유행기(遊行期)라고 부르며, 자신이 세상을 떠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유재산을 모두 버리고 유행(遊行)을 떠나 해탈을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 것인데, 이상적인 생활기를 충실히 이행한 자에게만 출가할 자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라문의 중심주의 시스템이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사문이라 불리는 비바라문계 출가자의 다수 출현은 불교가 성립하기 전 갠지스강 중류(중인도)에서였다. 이미 이 지역은 쌀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지역으로 상업경제가 발달했다. 거대도시가 차례차례 출현해 후대 유럽의 길드와 유사한 동업자 조합이 조직되었고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 부를 바탕으로 연합국가의 단계를 넘어선 고도의 통치 형태를 가진 강대국이 탄생했으며 불교가 성립할 즈음에는 16국이나 되었는데, 북쪽에 석존의 탄생 국인 사꺄국도 여기에 해당한다. 남쪽의 릿차위국 등은 상설군대를 갖출 정도로 강대했다. 힘을 가진다는 것은 부와 권력으로 누구라도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수적 바라문 사회의 이념은 희박해지고, 바라문 계급이라고 반드시 최고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라문들은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타락의 땅으로 여기며 싫어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을 배경으로 베다의 종교 전통에서 벗어난, 자타가 사문이라 칭하는 출가 사상가가 계속 널어나 매우 많은 수의 크고 작은 교단이 생겼다. 저자는 그 모습이 중국 전국시대 ‘제자백가’와 유사해 학자들은 이를 ‘자유사상가’라고 부른다고 했다. 오래된 불전에는 그들을 묶어 출가수행자라는 의미로 ‘사문바라문’이라고 불렀으며, 불교가 성립한 시기에는 사문이나 비정통 바라문 교단 및 유파가 62개나 되었다고 하고, 자이나교의 경전에는 363개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백화제방(百花齊放)이라 할 만큼 활기를 띄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에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출가자들을 부양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보수적인 바라문들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지역에서는 그런 여력이 없었다. 출가자의 대량 출현이 보수적인 바라문들의 생활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것일 뿐이었다. 바라문들이 출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이유다. 불교 성립 시기, 특히 영향력이 있었던 대표 사문은 ‘뿌라나 깟사빠, 막칼라 고살라, 아지따 께사깜발린, 뻐꾸다 깟지야나, 산자야 벨랏타뿟따, 나간타 나따뿟따’등 여섯 명이었는데, 이들 사문들의 행적은 여기서는 생략한다.
(지금까지 제1장의 불교 탄생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제2장 석존의 생애에 대한 것이다)
불교는 예수교(예수), 이슬람교(마호메드)처럼 석가모니를 개조(開祖)로 한다. 일본 신도나 힌두교가 특정 개조를 갖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석존(석가모니)은 정말 역사에 등장한 실제 인물인가’라는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인도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는 다량 존재하는 편년체 역사서(正史)가 전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승불교에 등장하는 석존은 역사상 실재했다는 인물로는 생각할 수 없도록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석존의 가계가 태양족이라는 것은 힌두교의 최고신 비슈누(태양신)와 관련한 유사성으로 신화적인 가공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고학 연구로 초기불교의 전승이 상당히 잘 전하고 있다는 점은 밝혀졌다. 그래서 오늘날 석존의 역사적 실재성을 의심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석존의 유물 일부를 담은 것으로 보이는 ‘석가족의 성자’라고 새겨진 항아리가 석존의 탄생지와 가까운 불탑에서 발견된 것은 그 유물이 석존의 것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연대로 보아서 그에 매우 가까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석존은 언제 태어났고 또 언제 입멸한 것일까? 전승에 따르면 석존은 80세에 입멸했다고 한다. 인도 고대사 연대론은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로 인해 이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라서 아쇼카로부터 몇 년 전에 석존이 입멸했는지를 확정할 수 있다면, 석존의 입멸 연대를 정확하게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 전승은 두 가지 계통이 있으며 1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남방불교에서는 석존의 재세 연대가 기원전 563∼483년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세계 학자들도 이 연대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북방불교는 기원전 466∼386년을 석존의 재세 연대라고 하여 차이가 있다.
석존은 지금의 네팔에서 세력을 펼치고 있었던 사꺄(사키야, 석가)족의 고따마 성에서 태어났다. 가계는 왕족 계급에 속하였고 태양족의 흐름을 이어받아 전설의 왕인 익슈바쿠를 초대 선조로 한다. 석존이 아리아인의 혈통을 잇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수 없고, 인종 문제에 있어서는 이란인이라는 설애 대해 논의된 바 있으나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사꺄족은 남쪽 대국 꼬살라의 속국인 작은 공화 국가로서 수도는 까빨라왓투(카필라)이고, 석존의 아버지는 숫도다나(정반왕)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다. 부모의 결혼 형태는 교차사촌혼(交叉四寸婚, 성별이 다른 형제자매의 자녀)으로, 모계를 따른 흔적이 남아 있다. 석존의 아내가 되는 야소다라도 석존의 사촌이었다.
석존의 성을 ‘고따마’라고 하는 데는 이견이 없고, 이름은 싯다르타(싯달타)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이는 상당히 늦은 시기가 아니면 찾을 수 없는 이름이다. 전통적으로 ‘석가족의 성자(사꺄무니)’라 불렀기 때문에 석가모니 혹은 석존이라고 한역 된 것이다. 흔히 석가,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이는 석존(석가모니, 세존)의 약칭이다. 석존은 ‘깨어난 사람(覺者)’이라는 의미로 ‘붓다’라고 부른다. 붓다라고 불리는 사람은 역사상·신화상 다수가 존재하는데, 자이나교도 최종 목표를 달성한 사람을 붓다라고 부른다. 따라서 고따마 성을 가지고 붓다가 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고따마 붓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합리적 호칭이라 할 수는 있으나, 오래된 문헌에 등장하는 호칭은 아니다.
석존의 출생은 마야부인이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왕가의 유원(遊園)인 룸비니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에 공원에 아쇼카 나무(혹은 살라 나무)의 꽃이 만개해 있었으므로 부인이 꽃봉우리를 따려고 오른손을 뻗을 때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마야부인이 석존을 낳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상적인 출산이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석존이 태어나자 ‘천상에서 꽃비가 뿌려졌다. 태어나자마자 우뚝 서서 동서남북을 차례대로 둘러보고 북쪽을 향하여 일곱 걸음 나간 뒤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향해 ‘신들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자는 없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말은 일상어가 되었지만 ‘겸양정신 제로’로 나쁜 의미를 갖고 있다. 불교학자들마저 해석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잘 못 해석하면 석존이 불손하고 오만한 인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지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석존이 깨달음을 얻고 설법을 결심한 뒤 바라나시로 향하던 길에 만난 우빠까라는 인물을 상대로 한 첫 설법을 하려다 꺼낸 말이라고 한다. 우빠까가 석존을 상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첫 설법은 실패했지만, 후대에 만든 불전은 석존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우빠까에게 한 것을 석존이 태어나자마자 말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한다.
마야부인은 출산 후 죽었으므로 언니를 대신해 동생인 마하빠자빠따가 숫도다나의 후처로 들어가 석존을 키운 어머니다. 석존에게는 난다라는 의붓동생이 있으나, 석존이 의붓동생을 괴롭혔다는 등 기록은 전혀 없다. 소년기와 청년기에 석존은 내향적 성격으로 내버려 두면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왜 그랬는지는 여러 가지 전승과 해석이 있으나 자신을 낳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흙에서 나온 애벌레를 새가 쪼아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목격한 일 등 숙명적 괴로움에 고뇌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석존이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 데는 아마도 견문과 경험을 통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성장하며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출가를 결심하게 된 데는 여러 설이 있으나,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본 부왕이 어느 날 시중들에게 기분전환을 위해 성 밖을 산책하도록 권했고 기분은 나지 않았지만, 시중들의 권유로 동쪽으로 나갔다가 비틀거리는 노인을 보게 되었고 다음 날은 남쪽 성으로 나갔다가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보았다. 또 다른 날은 서쪽 성 밖으로 나갔다가 안타깝게도 죽은 사람을 보고 말았다. 그다음 날은 북쪽 문으로 나갔는데 이번에는 사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에 직면해 고뇌가 한층 깊어진 석존은 북쪽 문밖에서 본 사문의 삶이야말로 괴로움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사문들의 출가가 이어지고 있었고 석존도 사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석존은 16세 되던 해 13세의 사촌 야소다라와 결혼했다. 두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도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석존에게 자녀가 생긴 것은 20대 후반으로 29세 때에 출가하기 전이었다. 석존은 태자였기 때문에 후사가 생기지 않은 일로 사람들로부터 마음 쓰이게 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석존은 야소다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라훌라를 낳고는 출가를 결심했다. 이는 후계자를 둠으로써 쉽게 출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한밤중에 몰래 애마 칸타까를 타고 성을 빠져나온 석존은 화려한 옷을 버리고 누더기를 걸치고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요즘처럼 백구를 친 것이 아니라 스포츠 머리 모양으로 잘라내고 남은 머리카락은 돌돌 말아 두피에 달라붙게 했다. 이런 머리 모양이 평생 똑같았다고 하는데, 이는 나발(螺髮)을 설명한 것으로, 출가자는 언제부터 인가 매끈하게 삭발하게 되었지만 초기 출가자는 반드시 삭발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스포츠형 머리 정도면 충분히 세속인과 구별된 것이다.
출가자가 된 석존은 남쪽으로 내려가 마가다 국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이미 인도 최강의 부자나라로서, 수도 라자가와(王舍城)에서 걸식을 하는 것을 안 빔비사라 왕이 자신의 가신이 되어달라고 청하였지만 거절하고, 선정에 의해 해탈을 구하는 길에 나서 이미 경지에 이른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를 차례로 찾아가 배움을 구했다. 그러나 석존은 그들의 경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들 곁을 떠났다. 그러면서 계정혜戒定慧라는 삼학(三學) 체계를 세우게 되는데 계는(좁게는 율) 수행 생활에서의 금지조항을 말하고, 정은 직접 마음을 단련시키고 마음의 평안과 청정을 흔들림 없이 만드는 것으로 그렇게 잡념과 망념으로 흔들리는 일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지혜가 완성되는 혜로서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이 괴로움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에 대한 끊기 힘든 욕망(貪-탐)과 그 이면의 혐오(瞋-진,성냄)때문이다. 이를 번뇌라고 하는데, 번뇌는 ‘마음을 오염시켜 괴롭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요소를 소멸시키는 수단으로 널리 행해진 것이 고행이었다. 석존은 숲속에 들어가 최초 제자가 되는 다섯 명 고행자들과 고행을 시작했다. 고행에는 지식(止息)과 단식도 있는데, 숨을 멈춘다는 것은 강한 의지로 괴로움을 참음으로써 괴로움의 심적 요소를 단절하는 것으로, 이 때문에 석존은 가사(假死)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이렇게 6년을 고행한 석존은 고행으로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출가 전 청년 시절 초선(初禪)의 경지에 이른 일을 다시 떠올리며 역시 선정(禪靜)만이 해탈에 이르는 바른길이며, 지혜를 얻기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고행을 포기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이때 마음은 단련되어 완벽한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심적 메카니즘(사물의 작용원리,구조)을 완전히 단절하고 초월적인 평안함을 얻은 것이다. 강한 의지만으로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할 수 없다는 것과 세속에서의 유혹과 끊임없이 대결해야 하던 방황을 끊을 수 있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마을로 내려온 석존은 앙상하게 말라 뼈만 남은 육체로는 선정을 닦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영양가 많은 우유죽 등 음식을 섭취했다. 이 음식을 석존에게 드린 이는 마을에서 소치는 사람의 딸 수자따였다. 기운을 회복한 석존은 네란자라 강가의 아슈밧타 나무 아래 앉아서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혜를 얻어 붓다가 되었다. 깨달은 사람이 아닌 ‘깨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로 한자로는 각자(覺者), 음역하면 불(佛) 또는 불타(佛陀)가 되었다. 석존이 붓다가 된 곳이 가야라는 곳으로, 여기를 붓다가야 또는 보드가야하고 하고 아슈밧타 나무는 그것을 기념해 보디(보리-깨어남)나무로 불리게 되었다. 보디나무는 보디만달라(둥근바퀴)로 한역되어 보리수하(菩提樹下) 또는 보리도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의 보리수와는 전혀 다르다. 이 보리수는 피나무과지만 인도의 보리수는 뽕나무과이다.
흔히 붓다를 ‘깨달은 사람’으로 이해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붓다는 무엇을 깨달은 사람, 무언가에 눈뜬 사람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에서 깨어난 사람을 말한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 혹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집착에 얽매여 우왕좌왕하는 그런 한심스런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전승에 의하면 붓다가 된 뒤에도 악마는 여전히 석존을 유혹했다고 한다. 그래서 석존은 오른손 손끝을 땅에 대고 대지의 여신으로 하여금 석존이 확실히 붓다가 되었음을 증명하게 하고 악마를 물러가게 했다고 한다. 붓다가 된 것을 성도(成道)라 하고 ‘성불하세요’하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다.
붓다가 되고도 석존은 보리수 아래서 5주 동안 선정하며 해탈의 경지를 맛보았다. 그러나 석존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에는 주저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언가 성취하고 난 이후에 오는 우울증 같은 것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연구도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결국 석존은 대중을 향한 설법을 결의하게 되고 우주 창조신인 브라흐마(범천)가 세 번에 걸쳐 간곡히 부탁한 때문이라는 유명한 ‘범천권청’이야기도 있기도 하지만 설법을 결의한 석존은 인도 최대 상업도시이며 수행자들이 많이 모여 있던 바라나시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지위카 교도인 우빠까를 만났으며, 석존의 청아한 모습을 보고 “당신은 누구를 스승으로 하여 무엇을 바른 가르침으로 신봉하는가?”라며 말을 걸었다. 이에 석존은 “나는 모든 것을 이겨낸 자이며, 모든 것을 아는 자이며, 나에게는 스승이 없고, 신들 가운데도 인간 가운데도 나에게 비할 자가 없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기원이다. 우빠까는 석존이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뭐 그런 거겠죠”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가버렸다. 석존의 첫 번째 설법은 이렇게 실패했다.
미가다야(鹿野苑)에 도착한 석존은 이전에 고행림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처음 석존을 만났을 때 저런 타락한 자와는 상대도 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했지만 가까이서 보자 범상치 않은 석존의 모습에 그만 약속을 잊고 반가운 마음에 ‘고따마여’라 불렀고, 석존은 ‘나를 부를 때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질책했다고 한다. 석존은 다섯 비구를 상대로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를 설했다.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꼰단냐 등 다섯 비구가 석존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제자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석존의 가르침을 받드는 출가수행자 집단인 상가(僧伽)가 성립되었다.
이후 석존은 바라나시 시내로 들어가서 거기서 동업자 조합장의 아들 야사에게 가르침을 설하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야사는 함께 어울려 지내던 친구 50여 명을 데려와 제자가 되게 했다. 또 그들의 부모를 각각 재가자로서 상가(승가)에 봉사하는 우바새(信士), 우바이(信女)로 받아들여 사중四衆이 되게 했는데,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그들이다.
이 무렵에 석존의 이름을 단번에 더 높이는 일이 일어났다. 마가다 국에는 큰 세력가로서 불을 숭배하던 교단의 우두머리 우루웰라 갓사빠가 있었는데, 석존과 문답을 주고받다가 그가 제자가 되기를 청한 것이다.
맏형이 석존의 제자가 된 것을 보고 두 명의 동생도 제자가 됨으로써 갓사빠 형제들을 따르던 이들이 석존 밑으로 들어와 그 수가 1,000명에 달했다 한다. 제자들을 데리고 왕사성으로 들어가자 달려온 빔비사 왕은 재가 신자가 될 것을 표명하고 죽림원을 교단에 기증했는데, 이는 불교 최초의 정사(精舍)였다. 비를 피할 수 있고 길에 다니는 벌레 등을 밟아서 죽일 염려가 없는 정사에서의 생활은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인도에만 있는 자이나교도 살생을 금하는데 정도가 불교보다 심해 오늘날 전세계로 확장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다.
불교의 교육 연구시스템은 선진화된 것으로써 도시의 재력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원후 4세기 인도 고전 문예의 황금기를 이루던 굽타왕조가 100년 정도 지나 급속히 쇠퇴한 가운데, 중국 한나라와 서유럽 제국의 쇠망으로 동서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인도의 상공업 경제는 단번에 축소돼 중세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불교 교단은 점차 쇠퇴하였는데 13세기 초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된 것은 바로 이 때문으로 불교는 전형적인 도시형 종교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석존이 살아 있을 때 최대 후원자는 수닷따(수달장자)로서 급고득장자라고도 하는 그는 꼬살라 국의 수도 사왓타(사위성) 최대 부호였다. 그가 어느 날 마가다 국 왕사성을 방문했을 때, 석존과 만나 곧바로 귀의해 재가 신자가 되었다. 그는 사위성 제따 태자 소유의 원림원을 막대한 돈으로 사서 시설을 지어 석존에게 기증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제따와나(기원정사 또는 祇樹給孤獨園 - 기댈 곳 없는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다.
불교가 아닌 다른 교단에서도 여성 출가자를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불교는 석존 재세 당시부터 비구니를 받아들였다. 첫 번째 비구니가 된 사람은 석존을 길러준 어머니 마하빠자빠띠(고따미)고, 두 번째가 부인이었던 야소다라였다고 한다. 석존의 제자들은 대략 갓사빠 삼형제 아래 집단 개종자, 사라뿟다(사리자)를 비롯한 예전부터 같이 한 산자야 제자들, 그리고 사꺄족 출신 등 세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이외도 제자들이 아주 많았다. 석존보다 나이가 많았던 사리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교단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출가자들을 통솔한 이는 마하깟사빠(마하가섭)으로 그는 석존 입멸 후에 머지않아 석존의 가르침이 사라지거나 잘못 전해질 것을 우려해 불교사상의 첫 경전결집을 주재했다. 그는 중국, 일본에서는 선종의 초조(初祖)로 여기기도 한다.
혈족이기도 한 사꺄족 사람들은 석존이 성도해서 고향인 까발라왓투를 찾아오자 크게 환영하며 많은 청년들이 교단에 들어갔다. 사촌인 아난다(아난)와 데와닷따, 이복동생 난다(난타), 궁정 이발사 우빨리(우바라)등이 그들인데, 특히 아난다는 석존이 입멸할 때까지 석존 곁에서 시중을 들며 시자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석존은 아들 라훌라도 출가시켜, 사리자에게 지도를 부탁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분신이라 여기던 사리자가 먼저 죽자 석존은 보기 드물게 슬퍼하고 탄식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석존은 성도 후에 45년간 가르침을 설했다. 하지만 사촌인 데와땃따가 교단에서 반기를 드는 등 그동안 여러 일이 일어났으며, 세력을 자랑하던 고살라 국은 군사를 일으켜 석존의 고국인 사꺄족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고살라 국도 내분으로 얼마 가지 않아 멸망하고, 마가다 국이 갠지스 강중류지방 모두를 정복해 최초의 본격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이 무렵 석존은 아난다와 같이 왕사성을 떠났다. 이 마지막 여행에 동행한 이는 아난다뿐이었다. 그만큼 교단을 다른 제자들에게 맡길 수 있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었다.
갠지스강 북쪽 웨살라에서 우기로 잠시 정주(안거)하고 있을 때 석존은 심한 병에 걸렸으나, 회복되자마자 웨살라를 떠났다. 빠와 마을에 이른 석존은 쭌다가 바친 수까라맛따와를 먹은 후 심하게 설사를 했다고 한다. 수까라맛따와가 무엇인지 해석의 어려움이 있으나, ‘돼지 후각을 이용해 땅속에서 파낸 버섯’(송로버섯의 일종)이라고 하는 버섯류로 보고 있다. ‘선혈을 쏟았다.’는 것으로 보아 직장암으로 내장 조직의 일부가 터졌다는 해석도 있다. 여행을 계속하던 석존은 꾸시나라 교외의 살라 나무 숲 속 사라쌍수 아래서 머리를 북으로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하여 손으로 턱을 괴고 누워 입멸했다. 입멸은 열반과 같은 의미로 열반은 적정, 적멸, 현대어로는 평화와 같은 의미였다.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등불을 바람에 확 불어 끄는 것)에 두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인식과 언어 표현을 초월한 진리가 있다. 혹은 그러한 의미의 진리로 이루어진,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후대 대승불교와 밀교의 해석에서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죽음을 앞두고 석존은 유언이랄 수 있을 가르침을 설했다. 그중에서, “자신을(피안으로 건널 때 수단이 되는) 섬으로 삼아라. … 바른 가르침(법)을 수단으로 삼아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신이 죽고 가르침을 줄 사람이 없어졌다며 제자들이 망연자실할 것을 경계한 말이다. 한역에서는 이를 섬이 아닌 등불로 번역해 ‘자명등법명등’으로 전해졌으며, 다른 하나는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게으름 없이 열심히 정진하라.”는 것으로 이는 존재의 무상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짧고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이것을 잘 이해하여 가능한 한 빨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촌음을 아껴 수행에 매진하기 바라는 정도의 의미다.
석존의 유체는 꾸시나가 밀라 족 손으로 다비(茶毘)되었다. 유골 소유를 둘러싸고 부족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자칫 난투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여덟 부족에게 나누어졌고 각 부족이 사리를 모시는 사리탑을 지었다. 근대 이후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 오래된 전승은 아마도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지금까지 제2장 석존의 생애에 대해 살펴보았다면, 이제부터는 마지막 제3장 초기 불교의 사고방식, 즉 초기 불교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불교는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라고 하는 주장과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본래 불교는 석존을 따라 깨어난 사람(붓다)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깨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번뇌와 괴로움이 소용돌이치는 윤회의 세계에서 해탈해야 하고 그것에 의해 얻어진 평안과 적정의 경지가 열반으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석존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석존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염세를 추구하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간주 되는 『숫따니빠따』는 첫머리부터 버리고 가야 할 것, 떠나야 할 것들이 죽 열거돼 있다. 화냄, 성냄, 애욕, 교만, 증오, 미망, 애집, 애착, 시기, 질투, 말다툼, 처자식 등등 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들인데, 팔만 사천 법문과 팔만 사천의 번뇌가 있다는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염세(厭世)라는 말이 가지는 막연한 의미를 넘어 스스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부정임을 말하고 있다. 불교는 최종적 목표로 삼는 것이 그리고 석존 자신이 도달한 것이 ‘생존에 대한 욕구를 끊는 것’이었다. 이것이 허무주의라는 것이다. 고행 중이던 석존이 악마 아무찌에게 했던 말을 보면 알게 된다.
나는 이와 같이 머물러 최대의 고통을 받고 있기에
나의 마음은 여러 욕망을 뒤돌아보는 일이 없다.
보아라 심신의 청정함을.
나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탐)이고
두 번째 군대는 혐오(진)이고
세 번째 군대는 기갈(갈애)이고
네 번째 군대는 망집(妄執)이라고 불린다.
너의 다섯 번째 군대는 혼침과 수면이고
여섯 번째 군대는 공포라고 불린다.
너의 일곱 번째 군대는 의심이고
너의 여덟 번째 군대는 위선과 고집이다.
잘못 얻어진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
또한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이란
나무찌여, 이것들은 너의 군대이다.
검은 악마의 공격군이다.
용자가 아닌 자는 그를 쳐부술 수 없다.
(용자는) 승리하여 즐거움을 얻는다.
이러한 내가 문자(munja)풀을 입에 물겠는가?
(적에게 항복하겠는가?)
이 세상에서의 삶은 싫구나.
나는 패배하여 살기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낫다.
- 나까무라 하지메 역 -
석존은 삶에 대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어떠한 사정이 있어 불가항력적으로 삶에 대한 허무주의에 빠진 것일까. 의도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고 생존할 수 있었을까. 석존에게는 살아갈 의욕이 사라졌다 해도 절망과는 다른, 오히려 거기에서 고요한 평온을 얻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석존에게 무엇이었을까. 생존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고, 생존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번뇌가 소멸된 경지, 즉 적정한 열반을 찾은 것이었는데 생존에 대한 욕구를 끊어버렸던 사람이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
생존에 대한 욕구를 끊는다는 것은 진화론적으로 기원이 가장 오래된 뇌인 사상하부라고 한다. 이 오래된 뇌는 개체 유지를 위한 조절 중추와 식욕 중추, 그리고 자손 유지를 위한 성욕 중추,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생물학적으로 완전한 기능 부진의 상태가 되거나 물리적으로 파괴되면 금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영구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철저하게 합리적인 이념, 즉 지혜를 얻어야만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석존이 끝내 고행을 버리고 지혜를 얻기 위한 명상의 길을 택한 것은 실로 지당한 일이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상태와 모습은 그들이 쌓은 선악의 소산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선과 악을 끊임없이 쌓아가는 일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물론 그들 중 어느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기(無記)도 있다) 그런데 석존의 가르침 가운데는 선을 행하고 악을 그만두라는 내용이 상당수 있다. 이 가르침을 대표하는 것이 ‘칠불통계게’로서 한역하면 다음과 같다.
諸惡莫作 모든 악을 만들지 마라
衆善奉行 많은 선을 반들어 행하라
自淨其意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라
是諸佛敎 이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다.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라면 불교는 단순한 도덕교인가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선악은 윤회적 존재로서 산다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므로 생존에 대한 욕구를 끊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불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석존은 성도했을 때, 즉 생존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끊어졌을 때 그때까지 쌓은 선악의 업을 소멸시키고 이후 더 이상 선악의 업을 쌓지는 않았다고 한다. 『숫따니빠따』에 있는 말이다.
오래된 업은 이미 다했고 새로운 업은 생기지 않는다.
그 마음이 미래의 생존에 잡착하는 일 없고,
씨앗을 소멸시켜 그것이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는
그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진다.
이 뛰어난 보배가 상가 안에 있다.
이 진리에 의해 행복하기를.
평안으로 돌아가 선악을 바라고 더러움을 떠나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
이러한 사람이 바로 그런 이유로 도인(道人)이라 불린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피안으로 건너 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쪽 언덕(차안)은 생존과 욕구에서 생겨나는 온갖 미혹과 괴로움이 소용돌이치는 세계며, 저쪽 언덕(피안)은 그 생존에 대한 욕구를 끊고 생의 허무주의에 도달한 자의 평안한 경지로서 적정한 열반에 이른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좋고 싫음은 말할 것도 없고 선악조차도 없다. 석존은 자신의 가르침은 피안으로 건너가기 위한 뗏목에 비유했다. 뗏목은 피안으로 건너간 다음에는 필요가 없는 단순한 수단,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석존이 세간을 일부러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간의 일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석존의 가르침은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것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초대였다. 연목구어와 같은 석존의 초대란 일반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우러러 받들어야 할 것만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용된 불교의 모든 것은 석존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그것이 방편의 비대화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만 옳다. 비대화 한 방편이 궁극의 목표를 감추어 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대승불교는 방편을 일시에 확장 시켰고, 밀교에 이르러서는 놀랍도록 방편을 목적으로 삼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초인적 부처(보살도 더해졌다)를 숭배하고 기원하면 그 무한한 자비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구제사상을 낳은 불교로 ‘기도하면 구원 받기’때문에 더없이 간편했다. 요컨대 불교는 이행도(易行道)의 종교로 변신해 갔던 것이다. 대승불교는 그 위에 개화한 민중의 종교다. 여기서는 지혜라는 것도 쉽게 다루어져 지극히 주술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일심으로 부처와 보살께 귀의한다면 그 보답으로 자동적으로 지혜를 얻는다거나 단순한 생리적, 심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삼매에 이르며 자동적으로 지혜가 갖추어진다는 식이다. 이것은 당연히 초기 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더없이 유용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불교의 다른 가르침 중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게 있다.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 괴로움의 근원으로 여겨지기 때문인데, 석존이 설한 무상은 세상의 무상성, 일체 순간적 존재성 등 후세의 불교가 빠져든 형이상학적이고 풀기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라, 경험적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지도 않은 짧은 시간 안에 죽음을 맞는 존재임을 말 한데서 시작된 것이다. 기껏 살아도 100살로 그것을 넘겼어도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설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는 수행이 지지부진해진다.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이 머릿속에 들어 있으면 열심히 수행에 몰두하게 된다는 이런 단순하고 당연한 문제로 석존은 무상을 강조했다.
석존은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집합적 요소를 다섯 가지(五蘊)로 나누고, ‘아트만(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무아설을 내세운 불교가 윤회의 주체로서 아트만이 없다면, 윤회나 인과응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은가 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심하게 되고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학문적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다름 아닌 천 년 이상 긴 세월에 걸쳐 인도 사상계를 리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존 당시에는 수행자들이 격렬히 벌이고 있던 학문적 논의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는 『숫따니빠따』가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학자들은) 각자의 견해에 머물며 서로 다른 집착된 견해를 품고(스스로 진리에의) 숙달자라고 칭하며 가지가지로 논한다.
‘이렇게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다. 이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직 완전한 사람(여래)이 아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다른 집착된 견해를 품고 논쟁하며,
‘다른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고,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야말로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말하는데,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진실일까.”
경험론에 허무주의가 합쳐지면 여기서는 실용주의가 탄생한다. 석존은 제자들을 궁극의 경지로 재빠르게 이끌기 위해 실효성이 있는 것이 바른길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바르지 않은 길이라는 판단했다. 세상에 대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던 허무주의자이면서도 원칙을 고집하는 것에는 엄격히 경계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타락주의나 무원칙주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석존은 성도에 이르는 과정에서 체득하고 또한 제자들에게 요구한 기본적인 균형 감각을 가지려 했는데 그것은 중도였다. 이 중도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사변적인 것으로 변화해 가지만 석존의 중도는 거의가 고락 중도다. 이는 고행주의에서도 쾌락을 추구하는 세속적 생활에서도 멀어지는 것이었다. 석존이 출가했다는 것은 쾌락에서 멀어졌다는 뜻이다. 6년간 거의 모든 시간을 고행을 추구하는 데 소비했다. 그러나 고행이 부질없음을 통감하고 마침내 고행을 버리고, 명상과 사색에 열중하는 수행을 통해 성도를 얻었다.
석존 자신이 정리한 것인지, 나중에 다른 이가 정리한 것인지 문제가 남아 있으나 예로부터 고락 중도의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또는 팔성도(八聖道)라는 것이 있었다. 정견(正見 - 바른 견해(지혜), 정사(正思 - 바른 사고방식, 선악의 분별), 정어(正語 - 바른말, 거짓말 또는 거친 말이 아닌 말), 정업(正業 – 바른 행위, 살생 등을 하지 않는), 정명(正命 – 바른 생활규율),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념(正念 – 바른 기억), 정정(正定 – 바른 정신 통일)으로 이것들은 그냥 일상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수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석존에게 중도는 삶에 대한 허무주의에 이르는 길이었고,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세상에 방편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으로 설법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가 주술적으로 변하고, 어쩌면 겨우 살아남은 것이 기도불교(생을 찬송하는)와 장례불교뿐이라는 말이 당연시되고 있는 요즘이고 보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석존의 허무주의와는 거리가 먼 가치 불교만이 횡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계율이란 무엇인지, 명상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줄일까 싶다. 사실 재가 신자 입장에서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나무 위에서 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어려울 지 모른다. 그러나 명상은 누구나 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겉으로 보면 고행과 명상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유래와 목적이 다른 것으로 고행은 베다종교를 관장한 바라문 사이에서 전래된 것으로, 고행의 목적은 흥분상태가 되는 것이었지만, 점차 재해석되어 초인적인 힘을 얻는 것으로 변화했다. 고행의 원어인 타파스는 육체를 괴롭히는 행위에 의해 축적된 영험한 능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윤회사상이 유행하고 출가자가 다수 출현하기에 이르면서 세속의 향략을 부정하고 윤회의 원동력인 선악의 업을 일으키는 근원인 탐욕을 굴복시키기 위해 새 의미를 부여해 고행에 전념했다. 석존도 한때 과격한 고행자였다.
이에 비해 요가로 이어지는 명상(선정)은 아리아인이 침입해 오기 이전부터 인도에 널리 퍼져 있던 선주민족행법으로 다양한 잡념을 고행처럼 억지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잡념이라는 마음의 작용 그 자체를 고요한 정신집중을 통해 진정시키는 것으로 고행과 명상 가운데 어느 것이 해탈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적합한지는 석존 시대에는 고행 쪽이 우세했다. 그러나 석존은 고행을 버리고 선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선정은 수백 년 동안 거의 불교에서 고안, 개량되면서 마침내 요가 체계로 꽃을 피우게 되었고 인도에서는 이 명상이 고행을 압도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불교를 창시한 석존은 엄격주의자가 아니라 실용주의자였다. 엄격주의자처럼 계율을 외칠 만큼 석존은 계율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석존이 생의 허무주의자였던 것에 유래한다. 계율은 제자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석존 자신에게는 사실 어떻든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석존이 엄격주의자로부터 타락한 현실타협주의자라는 의심을 받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석존과 제자들은 현실타협주의적인 입장에 의해 계율이 규정되어 갔던 것이다. 나중이지만 13가지 항목으로 정리되었던 것을 보면,
1) 버려진 누더기를 잇대어 만든 옷을 입는다.
2) 대의 상의 내의만을 착용한다.
3) 음식은 걸식에 의해서만 얻는다. 접대음식은 먹지 않는다.
4) 순서대로 걸식을 한다. 건너뛰거나 음식을 줄 것같은 집을 겨냥해서는 안 된다.
5) 일단 자리를 뜨면 더이상 식사를 하지 않는다.
6) 한 발우 이상의 밥을 먹지 않는다.
7) 오전 중 한 번의 식사 시간 이후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
8) 마을과 떨어진 곳에서 생활한다.
9) 큰 나무 아래를 생활 장소로 삼는다.
10) 침상 위 지붕 아래가 아닌 곳에서 생활한다.
11) 묘지를 생활 장소로 삼는다.
12) 어떤 것이든 손에 들어온 것과 장소에 만족한다.
13) 항상 앉아 있고 절대 눕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