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95:1-11 크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1절과 6절의 <오라>는 히브리어로 <할라크>입니다.
이는 대단히 강경한 요구이자 준엄한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와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라>(6절)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살길, 우리가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평안과 행복의 복음을 펼치고 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여호와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는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1.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1-5).
1)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즐거이 찬양하자고 선포한 후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땅과 산과 바다와 육지 등 만물의 창조주십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 자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자주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믿음 안에 있지를 못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불안과 염려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늘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불안과 염려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창조 신앙에 온전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3)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앙은 단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서 온 우주 만물이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범위에는 우리의 삶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까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온전히 주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창조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창조 신앙 안에서 생존의 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뜻이 있어 우리를 지으시고 뜻이 있어 우리를 부르셨다면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 인생 전부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안과 염려는 창조 신앙에 온전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을 바라보기에 주변 환경들이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서 잃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2.우리가 무릎 꿇고 경배할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6-11).
1)하나님께 무릎 꿇고 경배하자고 선포한 후 ‘언약의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목자시고 우리는 그분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분이 주시는 약속과 안식을 누립니다.
2)그러나 광야 므리바와 맛사에서의 이스라엘처럼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분 말씀에 불순종하면 약속과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는 말씀에 대한 경청과 온전한 순종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3)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집니다. 그것이 빈곤이든 풍요든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에 신자는 주어진 환경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빈곤에서의 감사든 풍요에서의 감사든 감사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다고 해도 환경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살린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4) 7절에 보면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환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백성이고 돌보시는 양이라는 관계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 된 우리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며 삶의 조건이고 평강인 것입니다.
3. 언약붙든 신자는 현재의 환경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1)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현재의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환경이 좋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것으로, 좋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고 멀리 계신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편 저자는 완악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2) 8절을 보면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음의 완악이 어떤 것인지는 므리바에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3) 광야는 그 환경이 이스라엘이 노예로 생활하던 애굽보다 더 열악했습니다.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습니다.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가 물이었습니다. 인간은 물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곧 생존 문제에 큰 위협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생존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 같은 환경으로 인도한 것에 대해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4)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시험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계신가 안계신가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여부를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에게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세상의 복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고, 인간의 완악한 마음입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입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우리를 책임지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믿고 인도하신 바를 따라 가는 것이 백성다운 것입니다.
2)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근거로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좋은 환경만 주어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환경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언약의 여정속에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3) 염려와 걱정과 불안한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염려와 걱정과 불안감이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뜻을 가지고 나를 지으시고 부르셨으며 나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관계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한 분이시며 우리를 기르시고 돌보시는 목자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온 우리의 자세는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하고, 이어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온전해지기 위해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 할 부분은 경배와 청종입니다. 온전한 예배 중에 주님께 집중하며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따라 사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