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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8일째
김동원
8일째 그분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있으라!
태초에 데이터가 있으라!
죽은 것들은 부활하고
잠자는 것은 깨어났네
토막 난 0과 1은 자르고 쪼개고 붙였네
그렇게 나는 신神이 되었네
8일째 그분은 빛에 영靈을 불어넣었네
불같은 신념이 타올랐네
오오, 나는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수 있네
산과 안개가 될 수 있네
바다와 섬이 될 수 있네
깜깜한 어둠이 붉은 노을로 번질 때
홀연,
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잠시, 죽거라 하였네
생각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예언하였네
부활하리라!
3일 후 부활하리라, 하였네!
달과 구들장
김동원
난간 앞에는 꽃나무를 심으리라
그녀가 좋아한 백모란 흑모란을 심으리라
남향으로 난 기와집 앞엔 연못을 둘러 두리라
후원 뒤뜰엔 열 한 살에 간 형이 좋아한 매화 두 그루도
옮겨 놓으리라 겨울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 따뜻한 구들장 밑에
두 모자母子가 발을 넣고, 빙그레 웃으시는 아버지 바라보며
도란도란 옛이야기 들리는 대청을 두리라
툇마루를 밟고 밤마다 꿈속에 올라가 보름달 한 켠에
옛 고향 집을 다시 지어 드리리라
그믐달을 파고, 초승달을 놓고, 상현달을 건너
하현下弦을 지나, 봉황산 붉은 노을로
북창엔 당초 무늬 격자창을 내리라
서안書案엔 내가 지은 시집도 올려두리라
그리고 그리고 겨울이 오면, 수천만개의 흰 눈이 바닷물 속에
녹는 것을, 사랑하는 어미가 보게 하리라
〈자선 대표작〉
시검詩劍
김동원
천하를 갖고 싶으냐!
쉬지 말고 광활한 초원에 말을 달려라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어라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구나
바람만 칼끝을 보고 있다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직유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귀신도 모르게 은유를 쳐내는구나
불이 내렸도다!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구나
말이 말을 닫으니 일어나는 말이 없구나
달려도 달려도 이미 와 있는 말
검劍을 찾을 자者 영원히 없을 지니,
무無를 베라, 천지사방 색色을 베라
무덤은 산 자들의 퇴고가 아니냐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칸나
김동원
거울 속 꽃은 지는데,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돌아보면 부서져 버릴 사랑
칸나, 칸나, 칸나
불이 붙어 다 타 버리라지, 뭐
거울 속 꽃은 지는데,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빨강, 미쳐 버리라지, 뭐
칸나, 칸나, 칸나
붉은 라인은 왜 그리 외로운 거야
꽃대에 젖어 빗물은 흐르는데,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바다와 시니피앙
김동원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
질문, 혹은 몇 개의 풍경
김동원
시검詩劍
왜, 나는 시에 혹하는가. 천지만물이 나와 불이不二한 까닭이다.병病은 생사의 면벽 수행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 낀 풍경은 ‘환幻’이다. 어릴 때 나는 집 앞 바다가 우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 달빛에 스민 혼령인 듯, 그 천길 물속에서 우는 곡소리는 슬펐다. 생에서 죽음이 싹트는 엄혹한 사실 앞에서, 죽음에서 생이 열리는 영감을 느꼈다. 내시는 병의 문을 열고 바라본 앞마당 가득 핀 꽃의 이야기요, 피의 이야기다. 수만 생을 윤회한 나의 또 다른 환생의 조각보다. 하여, 나는 늘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렸고 외로워 흔들렸다. 놓쳐 버린 물의 무늬로 흔들렸고, 불 속 그림자로 흔들렸다. 밑도 끝도 없는 기미와 기척에 흔들렸고, 불안한 목소리에 흔들렸다. 언제나 서정은 ‘나와 타자와의 동일성의 시학’이자 꿈꾸기다. 나는 법고의 뼈와 살을 발라 먹고 창신의 새 길을 연다. 만물의 음양을 받아들여 시의 형과 상을 빚는다. 전통의 불신과 전복이 아니라 계승과 성찰을 통해, 시의 요체를 꿴다. 현실 공간인 몸과 시의 공간을 하나로 본다. 격물을 궁구하여 치지로 나아간다. 직유를 통해 사물의 극을 치받고, 은유를 통해 물아가 된다. 하여 밤낮없이 비극과 역설, 아이러니와 모호성, 풍자와 해학의 행간에 바장였다. 시의 급소, 그 사랑과 이별의 통증은 신명과 지극으로 풀었다. 소리를 쫓다 숲을 잃었고 언어를 쫓다 시를 들었다. ‘이름이 없는 천지의 처음, 무명無名’과 ‘이름이 있는 만물의 어미, 유명有名’(도덕경 1장) 사이를 헤맸다. 어둠에 손을 넣어 달을 만졌고, 바다에 머리를 넣어 해를 먹었다. 공을 뚫다 색을 얻었고, 색을 품다 공을 보았다. 시는 ‘천하에 천하를 감추는 작업’(약부장천하어천하若夫藏天下於天下)(장자)’임을 알겠다. 하늘은 감추고 시인은 들춘다. 간절히 묻고 또 물었다. ‘세상을 향해 가장 아파하는 자만이, 가장 아름다운 시를 얻는다’ 하였다.「시검」은 천하를 베는 칼이다. 해와 달 위에서 무현금을 들으며, 한바탕 춤춘 검무다. 베고 베도 베이지 않는 무검이다. 심연의 현이자 혼의 가락이다. 하여,「시검」을 빼들고 날마다 새벽까지 말馬을 타고 말言의 목을 베었다. 오! 천하에 뿌려진 말의 비린 흰 피여! 지칠 때까지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었다. 말馬과 말言의 동음이의를 부려 천의무봉을 꿈꿨다. 바람의 심장을 상징의 끌로 각한 음영이, 나의 시다. 말의 그림자를 잡아 다겹의 이미지로 허공에 매달았다.「시검」은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다. 사람의 혀끝은 검이다. 몸을 베는 섬뜩한 저잣거리의 말들. 독언毒言은 세상의 귀를 썩게 한다. 하여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일갈하였다. 귀신도 모르는 바람의 은유. 말 한마디로 천하 마음을 움직인다.말言은 창조의 기물.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다. 입을 막고 혀를 감추면 천하의 명시가 숨는다. 말을 잘 쓰면 검을 피하고, 옳은 말은 무언행이다. 하여 “검을 찾을 자 영원히 없을 지니,” 시검이여!“ 무를 베라, 천지사방 색을 베라”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시인이여!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칸나
음악은 하늘에서 흘러나와 사람의 몸에 붙은 것이다. 바닷물 속에서 붉은 현을 켜며 올라오는 해는 그 자체가 악기이다. 한밤중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 달은 얼마나 신비로운 선율인가. 천지 만물은 모두 소리의 악기통이다. 하늘과 땅은 음양의 리듬으로, 오행은 행간의 악보로 드러난다. 겨울의 흰눈은 봄의 들꽃 피는 소리에 숨고, 물의 음악은 초록의 여름 나뭇가지를 타고 허공의 생각을 만진다. 온갖 색채가 가을 단풍 속에 제소리들을 숨기고, 낙엽은 늙은 몸을 끌고 땅속 뿌리에 스며 은유의 소리로 부활한다. 강물은 스스로가 물의 연주자요, 바다는 강물들의 교향곡이다. 바람의 지휘자를 통해 천지는 한바탕 무위를 드러낸다. 하여, 자연은 형상을 창조하여 색의 음악을 만들고, 변화의 음을 통해 매 순간 무화시킨다. 때론, 화산 폭발과 번개의 리듬으로 불의 음악을 펼치기도 하고, 때론 해일과 폭우로 물의 음악을 선사하기도 한다. 삼라만상은 상징의 율을 통해 이미지로 드러나고, 구상과 추상의 악기를 바꾸어가며, 색과 공의 법칙으로 우주를 탄주한다. 하여 음악은, 지수화풍토地水火風土란 경이로운 음계를 버무려 일월의 조화음을 만든다. 그 사이 인간은 희로애락의 고저장단에 사주팔자의 추임새를 얹어, 한바탕 각자의 시공의 방식으로 몸을 통해 놀다 가는 악기인 셈이다. 시「칸나」는 홀연히 음악의 방식으로 내 영혼 속에 치고 들어왔다. 비극적 음색은 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걸까. 슬픈 음악은 가슴 속에 엉킨 감정의 비애가 악기의 현을 타고 나오는 색채 같다. 시인의 영혼은 존재의 처음을 만지는 음악이라도 되는 걸까. 시는 왜 가장 추악하고 비루한 흔적을 들추는 걸까. 비바람은 몰아치는데 “거울 속 꽃은 지는데” 그 봄날 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2007)의 그 장엄한 비감어린《카루소》를 듣다, 짐승처럼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돌아보면 부서져버릴 사랑” 앞에서, “흑 흑 흑,” 바람처럼 나의 기억은 울고 있었다. 순간, 초등학교 1학년 때 창문 너머로 반한, 그 예쁜 “칸나”가 내 무의식 속에서 붉게 피었다. 빗속에 계속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붉은 라인의 외로운 칸나는 그 옛날 잃어버린 소녀처럼 소리 은유로 서 있었다. 내게 어린 날 잃어버린 첫사랑은, 아무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절대고독의 영역이자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참혹한 이별이 찾아온 건 12살 때였다. 소녀는 심장을 찔렀고, 버려진 나는 빨강을 죽였다. 하여 나는, 이 세계의 빨강은 다 사라져야 한다고 외쳤다. 아니 “빨강, 미쳐버려라지, 뭐”라고, 독언을 퍼부었다. 그 당시 어린 영혼은 늘 위태로웠고, 다친 심장을 움켜쥐고 “흑 흑,” 바람처럼 서성였다.《카루소》의 애절한 비가를 듣는 순간, 한밤중 사랑에 미쳐 “칸나, 칸나, 칸나”를 부르며 뛰쳐나갔던, 나의 내면 아이를 보았다. 들판에 버려진 소년의 심장을 타고, 그 노래는 전신을 불길로 휘감았다. 왜 나는 그때, 이별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 슬픈 긴 음악으로 들었을까. 명곡《카루소Caruso》는 47세로 죽은 이탈리아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EnricoCaruso 1873~1921년)를 추억한, 사랑의 비극을 담은 노래이다. 칸쏘네 가수이자 연주가인 루초 달라(Lucio Dalla, 1943~2012년)가, 죽기 전 카루소가 묵었던 소렌토의 빅토리아 호텔(Excelsior Vittoria)을 밤에 방문하여 작곡했다. 카루소가 묵었던 방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고, 그 테라스에 서면 나폴리만의 푸른 바다가 보이고, 그 너머 도시 나폴리 위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달빛에 눈물을 흘리며 비가를 듣고 있다. 그 호텔 방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 카루소를 떠올리며, 루초 달라는 피아노에 앉아 즉석에서《카루소》를 썼다.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전율하는 목소리와 스테판 하우저의 애절한 현弦의 첼로 연주를, 아! 사랑에 미친 독자여, 꼭 한 번은 들어보라!
바다와 시니피앙
나에게 바다는 늘 새로운 질문이다. 밀물과 썰물의 방식으로 쉴새 없이 꿈틀거리는 바다는, 빛과 어둠, 혼돈과 무질서, 일출과 일몰의 점이지대다. 바다는 고전적이면서 아방가르드Avantgarde하다. 그것은 고백의 성소聖所이자, 스스로 발화의 주체를 설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중의 목소리로 시시각각 시점을 바꾼다. 정형의 틀에 갇히지 않고 매순간 창조적으로 생성한다.움직임으로 형태를 드러내고 상징의 숲으로 기능한다. 물의 안과 밖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 바다는 홀로 드러난다. 순간순간 사라지는 물안개처럼, 무기교의 기교다. 정말이지, 바다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비트겐슈타인: 1889~1951, 오스트리아 철학자) 하는 걸까. 때론 그로테스크하고 때론 환상적이고 시니컬한 바다는, 해와 달을 마주하며 변화무쌍한 빛과 색을 연출한다. 초승달과 보름달의 흐름은 물과 만나 현란한 색채의 오케스트라가 된다. 끝없는 태풍과 번갯불은, 하늘과 바다 위에서 현실을 초월한다. 붉게 번져 올라오는 물속의 햇덩이는 황홀하다. 한순간도 정지하지 않는 채 형체를 바꾸는 해는, 아이러니다. 한밤중 수평선 위에 고요히 떠 있는 은빛 달은, 형이상이자 형이하이다. 현묘한 정중동의 그 아름다운 풍경은 신비롭다. 바다는 떠도는 자의 언어와 물결의 언어가 육지와 만나 비로소 시가 된다. 바다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시점視點을 특정하지 않고 인칭을 구분하지 않는다. 뜨고, 밀고 당기며, 접고 뒤집는 방식으로 전변轉變한다. 일체의 비유도 허락지 않으며 주체와 객체를 초월하는 바다는, 물의 매트릭스와 리듬으로 물고기와 노닌다. 언어의 표면과 이면은 저항뿐, 하늘과 바다는 불이(不二) 하다. 빛과 색의 오르가즘이다. 매순간 실험적이고 전복적이며 묘사적이다. 끊임없는 부정과 긍정의 패러독스다. 바다는 ‘경험의 물방울’이며, 물방울의 시니피앙이다. 바다는 감각과 이미지, 운율과 반복적 리듬의 대서사시이다. 존재와 비존재, 의성擬聲과 의태擬態, 숨김과 드러냄의 방식으로 은유하는 바다는 물의 신령스런 말이다. 충돌과 반동, 번짐과 점묘의 방식으로 언어를 구성하는 바다의 변주는 환상적이다. 푸른 하늘과 흐르는 바람으로 연聯 구분을 한다. 천둥과 번개의 소리, 그 메타포는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태풍과 해일로 시적 전환을 꾀한다. 바다는 물의 이동을 통해, 소낙비로 지상의 나무와 풀과 꽃의 행갈이를 한다. 이런 만물 생성 시법은, 음양오행, 춘하추동을 빌려 고저장단의 성음聲音과 율조를 만든다. 바다는 지구의 무한한 상상력의 여백이다. 의미를 지우고 무의미를 지우고, 끝내 천지의 ‘아름다운 위험’이 된다. 바다는 시간과 공간의 생멸이 지속되는 환유의 고리이자, 부분으로 전체를 드러내는 제유의 표상이다. 사물의 이치를 극대화하고, 연상과 스밈의 방식으로 관념을 무너뜨린다. 악과 선을 동시에 정화하는 모순어법oxymoron이다. 샘물과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원융圓融과 무애無碍의 세계가 된다. 바다는 물고기들의 원초적 이미지로 한순간도 정지하는 법이 없다. 감각적 물질이자 공감각적 이미지인 바다는, 숭고한 위로다. 걷잡을 수 없는 인간을 치유하는 유일의 명의名醫다. 바다는 고독한 철학의 공간이다. 경쟁과 속도, 굴절과 왜곡, 전쟁과 살인, 상승과 하강을 단박에 ‘수평의 시’로 사로잡는다. 바다는 언어의 구각舊殼을 버리고 언어 이전의 속살을 드러낸다. 유무를 떠나 현상과 본체를 초월한다. 하여, 바다는 밑도 끝도 없는 무명無明의 미학이 된다. 지구의 위대한 작품이 인간이라면, 우주 빅뱅의 놀라운 마스터피스(masterpiece, 걸작)는 바다다. 하늘(天)이란 개념으로 하늘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낼 수 없듯이, 바다는 바다란 말(言)로 그 현묘한 이치를 다 담을 수 없다.
이상하게도 ‘바다’를 호명하는 순간, 이순耳順의 나의 ‘바다’는 사라지고 어부 ‘아버지’가 보인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생각의 주인은 언어’(라캉)가 아니라, 항상 ‘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다와 죽은 아버지는 시니피앙(기표)이면서 시니피에(기의)였다. 내게 바다는 선친의 음성과 언어의 형태로 겹쳐있었다. 훗날, 소쉬르(1857~1913, 스위스 언어학자)의 ‘인간은 언어가 지배한다’는 글을 만났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한 번도 ‘언어’가 먼저 있고, ‘세계’가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겐 ‘세계와 언어’가 한 몸이었다. 소쉬르의 등장은 말의 체계와 사물에 대한 관점,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았다. ‘마당의 개는 짖지만, 책 속의 개는 짖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했다. ‘사물과 언어는 필연적이지도 동일하지도 않다’는 그의 주장은 기존 문명을 전복하였다. 또한 ‘무의식이 언어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무의식을 불러낸다’는 라깡(1901~1981, 프랑스 정신과의사)의 말 역시, 동일성의 시학을 해체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언어를 ‘시를 실어나르는 뗏목’ 즘으로 여겼다. 지금도 시의 본체는 언어 이전의 세계가 진짜이고, 언어 이후는 시가 걸친 옷으로 인식한다. 시는 언어의 눈동자를 통해 들어온 신神이다. 물론, 언어를 통해 언어 이전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소쉬르의 말도 인정한다. 하여, 나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 그 어디쯤이라고 우긴다. 시「바다와 시니피앙」은,언어로써 언어를 뛰어넘는 ‘시의 본질’을 꿰뚫은 시도이다. 그러하다. 네 살 때부터 내 무의식 속엔, 아버지의 빈 자리로 인해 ‘규칙과 법칙, 구조와 문법’의 세계보단, 랑그(langue, 시니피앙, 기표)가 거세된 엄마의 파롤(Parole, 시니피에, 기의)이 형성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 시가 왜? 불(남자/陽)의 서사보다, 물(여자/陰)의 서정을 추구해 왔는지를 짐작케 한다.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비극과 결핍’의 상태로 흔적을 남기며, ‘묘사’보단 ‘압축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시상詩想을 촉발한다. 아침마다 본 일출은 ‘생생生生’(주역)의 ‘변變/역易’이 우주의 이치임을 가르쳐주었다. 어린 내게 물결은 새롭고 ‘낯선 리듬’의 악보였다. 순간순간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물안개는, 시적 모호성의 극치였다. 그 끝없이 반복되는 바다는,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를 환상을 심어주었다. 바다의 파토스는 사라진 것에 대한 내 서러움이나 그리움을 고통으로 잉태한다. 하여 나의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될 때, 비로소 무無가 된다. 실재하는 대상은 이미지로도 언어로도 포착되지 않는다. 마치, 노자가 설파한 “道可道도가도, 非常道비상명; 名可名명가명, 非常名비상명.(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처럼, 바다는 언어가 침묵할 때 그 순간 시가 된다. 내게 시의 바다란? 언어 이전도 언어 이후도 아닌, “玄之又玄현지우현, 衆妙之門중묘지문.(가믈코 또 가믈토다! 뭇 묘함이 모두 이 문에서 나오는도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