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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精神에 관한 談論
Discourse on the spirit of independence
죽산 최한규박사
- 목 차 - Ⅰ 序論 Ⅱ. 구국운동의 발전단계(救國運動의 發展段階) 1. 救國運動의 發展段階 2. 정확한 역사교육 Ⅲ. 국가망국의 담론 1. 國家 賣買事件 2. 식민사학자들의 역사 왜곡과 진실 3. 해방공간의 한국 역사학의 3학파 4. 민족주의 역사학계의 두파 5. 식민사학자들의 人脈 Ⅳ. 북한역사의 형성 Ⅴ. 윤휴와 침묵의 제국 Ⅵ. 결론 -참고문헌- |
Ⅰ 序論
歷史를 잊은 민족에게 未來는 없다. 아직까지도 뽑지 못한 식민사학의 뿌리가 있다. 첫째 식민사관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다. 둘째 역사를 팔아먹는 놈은 나라도 팔아먹는다. 셋째 식민사관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이다. 넷째 일제강점기에 조선편수사회가 해손하고 망가뜨린 한국사는 심각 하리만큼 회손 되었으므로 이제는 돌파 구조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친일화구조, 민족 반역파, 일본 동조파, 친일본 동조파, 일제 침략 동조파,등을 색출하고 단죄(斷罪)해야 한다.
그리고 歷史를 바로 세워야 國家의 未來가 永遠히 存在한다.
◈ 1945년 8월 15일 광복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정, 군사통치, 미군정 체제 3년 ☛이승만 정권 등장 ☛친일세력 재 등용 ☛다시 일제 강점기로 회기 ☛이때 독립운동가 들은 철저히 왜면당하고 폭력 당했다. ☛이것이 한국의 근대사다.
정치계 법조계 등 다양한 분야해서 민주화가 진행되었지만 역사학 분야만은 독야 탁탁(獨也濁濁)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교리 수준으로 기세등등하다.
이는 아직도 일본의 공작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 된다. 그리고 이에 동조한 세력이 국내에 존재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일본 장학생, 신일본인이 한국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할 것이다. 미국에 램지교수 등등 일부는 1945년 해방 이후 일본으로 가지 않고 한국인으로 둔갑해서 정착하고 있는 일본인이 있을 것이다. 이를 조사해야 한다. 일설에 의해면 임진왜란 때부터일 수도 있다. 1945년 해방이후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이 역사학계 또는 지식사회에 있을 것 갔다는 것이다
“역사를 망각(忘却)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선생이 한 말이다. 단재선생을 또라이 정신병자로 말하는 자도 있다. 간도는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자, 또는 지금도 일본을 옹호하는 세력이 한국사회에 있다, 대한민국을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 등이 아닐까 생각 생 된다. 대한민국 지도에 독도를 빼고 간도(만주)도 빼고 그린 놈들, 조선의 상고사를 신화로 말하는 자들 이들이 조선의 첩자들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일제가 정리한, ‘식민사학’자들의 역사다. 그러니 단군은 한 사람으로 수천년을 지배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며 단군을 곰의 자식으로, ‘단군신화(檀君神話)’로 치부해버린다. 이는 역사말살이다.
한민족 원로 회는 누가 더 잘나서가 아니라 '한민족'이라는 그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나이가 좀 더 많은 우리가 나선 것이다. 역사 교육 아무리 강조해도 소용없다. 일본이 만든 둔갑된 역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역사, 한민족의 역사를 교육해야 한다. 이 땅에 좀 더 오래 살았던 한민족으로서 앞으로 미래 세대들의 살길을 찾기 위한 어느 늙은이의 외침이다."
조선후기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학이 한 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역사관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Ⅱ. 구국운동의 발전단계(救國運動의 發展段階)
1. 救國運動의 發展段階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단재 신채호) ◈ 의병활동 의병전(義兵傳) ☛1894년 의병활동시작 ☛1894년 東學農民運動~東學革命胎動, ☛1913년 경북풍기광복회출범 ☛1915년 대구광복회출범 ☛1940 광복군(임시정부 정규 군대) ☛1919년 31運動, ☛3 15의거 마산민주화운동, 1960년3월 15일부터 4월 13일 ☛1960년 4 19혁명 民主學生革命, ☛1980년 518光州民主化運動, ☛1987년 87民主抗爭. ☛ 2016년 10월 촛불운동 정신은 독립정신이고 ☛동학정신 이었다. 살만 나는 세상을 만드는 위대한 자는 民이였다. 그리고 민초들의 희생과 정성 수고로움이 있었다. 따라서 동학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 東學보다 더 심오한 思想은 없다. 이를 계승해야 인류의 주도국이 된다.
인류의 주도국이 되려면 다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아직까지도 뽑지 못한 식민사학의 뿌리가 자라고 있다 것. 둘째 식민사관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으로 조작되었다는 것. 셋째 역사를 팔아먹는 놈은 나라도 팔아먹는다는 것. 넷째 일제강점기 조선편수사회가 조작한 한국사는 심각하게 훼손 되어있다는 것.
다섯째 친 일본화 구조에는, 민족 반역파, 일본 동조파, 친일본 동조파, 일제침략, 동조파가 있다는 것. 6 정치계 법조계 등 다양한 분야해서 민주화가 진행되었지만 역사학 분야만은 조선총독부 역사관으로 공고히 건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바로 세워야 국가의 미래가 영원히 존재한다.(최한규박사 논문집). 둘째, 촛불민심은 가짜, 위선자, 반민족행위자, 국가와 국민을 우롱한자를 용서 하지말자는 것이다. 셋째, 국가와 민족, 인류의 평화를 가슴과 심장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대동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정확한 역사교육
제대로 된 역사, 민족의 역사를 교육해야 한다.
독립운동가 설립 학교, 1.신익희(1892~1956) 국민대학교. 2.장 형(1889~1964) 단국대학교 설립. 3.이시형(1868~1953)성제학원 신흥대학(경희대학교). 4.유석창(1900~1972) 건국대학교. 5.대종교 홍익대학교 설립. ☛ 이승만 독제치하에서 다른 데로 넘어 감? ☛ 제대로 된 역사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없다. ☛ 검찰개혁, 언론개혁을 못하면 식민사학의 뿌리를 뽑지 못한다.
역사교육(歷史敎育)은 과거를 앎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보다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행해지는 교육이다. 인류가 있으면서부터,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변천되어 온 역사적 과정을 미루어 현재와 미래를 바로 인식하고 예측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역사교육의 핵심이 된다. 역사교육도 다른 교육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역사의식 발달단계에 맞추어 적절하게 조직되어야 한다. 개인·가정, 가까운 지역사회 등의 변천 과정에서 국가와 세계의 변천 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보도록 하여 무엇이 역사의 변천요인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떤 양상(樣相)으로 나타냈었는가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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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국가망국의 담론
1. 國家 賣買事件
첫째, 조선후기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학이 한 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역사관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식민사관의요체가 무엇이냐. 이는 일제가 한국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역사관이다. 그리고 지금도 대륙사관과 반도사관이 대립하고 있다.
셋째, 한국사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이는 힘없는 조선왕조로부터 시작되었고. 특히 노론의 조선왕조 무시와 사대부의 일부 노론이 君弱臣强을 만들어 권력독점 하는데 정치지형의 토대를 만든다. * 君弱臣强 : 왕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
2. 식민사학자들의 역사 왜곡과 진실
그리고 철저히 역사 왜곡에 기반하고 있다.
1. 임나는 가야다(잡소리)~야마토왜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잡소리)
2.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잡소리).~ 북한은 고대부터 중국 땅이었다.(잡소리).
3. 고려는 한반도의 2/3만 차지하지 못했다.(잡소리)
4. 정조는 독살당하지 않았다.(잡소리)~일제 때 근대화되었다.(잡소리)
5. 독도는 일본 것이다.(잡소리)~독도를 한일간에 공동영유 해야 한다.(잡소리)
6. 일제 때 근대화가 되었다.라고 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고 독도는 일본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독도는 한일간에 공동으로 영유해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개소리)
7. 일본군 성폭행 피해자 할머니들, 뭐 세칭 위안부는 자발적이었다라고 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개소리)
8. 어떤 것들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지만 어떤 것들은 논리가 복잡하고 옛날 것이기 때문에 알기가 힘들다. 그리고 특히 여기서 핵심이 무엇이냐면 진실을 이야기해야 될 한국의 강단 역사학자들이 오히려 교묘한 방법으로 조선총동부 역사관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 국민들이 진실을 알기가 더욱 어렵다는 데에 있다.
9. 따라서 우리가 일제 35년 강점을 마치고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 민족 우리 국가의 역사관은 어떤 역사관이 되었을까?
10. 그 부분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다 역사학자였다.
11.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셨던 백암 박은식선생, 석주 이상룡선생, 단재 신채호선생, 등 대부분 역사학자이다.
☛백암 박은식선생은 한국통사라는 아픔의 역사를 쓰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초대 석주 이상룡선생 이분도 역사학자이다.
☛단재 신채호선생도 역사학자이다.
☛이외에 무원 김교헌 선생, 성재 이시영선생, 희산 김승학선생, 이라든지 대단한 학자들 이었다. 왜냐하면 이 역사학에서 독립전쟁 그 항일전쟁의 논리가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분들의 역사학을 가르치는 대학 사학과가 한국 내에는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이다.(이덕일)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것은 프랑스로 치면은 항일 레지스탕스들의 역사학 마르크스 블로크 같은 사람들의 역사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0개고 프랑스 모든 사학과가 나치를 계승하는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라고 하면은 상상이 안 간다.
☛그러나 우린 그 상상이 안가는게 지금 현실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백암 박은식선생은 『한국통사』라는 아픔의 역사를 쓰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선생 이분도 역사학자다. 단재 신채호선생도 역사학자이다. 무원 김교헌선생, 성재 이시영선생, 희산 김승학선생, 이분들의 역사학을 가르치는 대학은 한군데도 없다.
☛그럼 현재 강단사학이라고 불리는 한국 역사학계가 누구를 계승하고 있느냐 하는 이야기다. 이게 과연 핵심적인 질문이다.
☛우리가 살펴 본대로 박은식, 이상룡, 신채호의 역사관을 계승했다면 아직까지 식민사학 논쟁이 있을 리가 없다. 근데 말로는 다 극복했다. 그래놓고 나서 막상 본론에 들어가 보면 다 조선사편수회 역사학을 지금 가르치니까 지금까지도 식민 사관이라는 말이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니 어떻게 해방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지금까지 생명력을 유자하고 전부다 조선총덕부 조선사편수회 역사관만 가르칠 수 있는가? 이런게 현실속에서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것도 역사속에서 그 답을 찾아야 된다.
☛우리가 해방공간이라고 불리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역사학계는 어떤 일이 있었나.
3. 해방공간의 한국 역사학의 3학파
1.민족주의 역사학계 ~ 항일 민족주의 역학계
2.사회주의 역사학계 ~ 사회경제사학자, 일제강점기에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역사연구하고 독립운동한 그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3.일제 식민사학계
~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면서 일본인들의 예쁨을 받으면서 자국사를 난도질하던 이 일제식민사학계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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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족주의 역사학계의 두파
첫째, 민족주의 역사학계 사회주의 역사학계 두 개학파로 이끌고 나가야 했다.
둘째, 항일 민족주의 역사학 제거
1. 위당 정인보(1893~1950) 남부조선연구(南部朝鮮硏究)
2. 민세 안재홍(1891~1965) 남북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監)역사학 겸 독립운동가 납북되었다.
3. 계보 : 무원 김교헌,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봉, 단재 신채호, 성재 이시영, 희산 김승학, 등 독립 운동가들이 역사학자들이다.
4. 특징 : 일제와 총과 붓을 들고 싸웠던 무장 투쟁가 겸 역사학자들이다.
5. 경과 : 해방 후 분단 상황의 가장 큰 피해자이다.
5. 역사관 : 조선총독부의 반도 사관에 맞서 대륙사관 해양사관 주장
*민족사관 = 통일사관 대륙 해양사관
*625때 납북되었다.
5. 식민사학자들의 人脈
☛남한 강단사학의 태두 이병도(1896~1989)의 말이다. ~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씨와 그의 친구인 이케우치 히로씨의 사랑을 받아…….일본인 이지만 매우존경 할 만한 인격자였고...비판적인 만큼 날카로운 점이 많았다.(광장)1982,4)
☛남한 역사학계의 태두 신석호~역사를 새롭게 고찰한다고 개관을 몰각한 주관이거나 어느 한 편벽된 사관에 치우치거나 또는 사실을 고립적 표본으로 고찰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개잡소리)
“항상 객관을 토대로 삼아 시야를 넓히어 다각적으로, 또 종적(縱的:시간) 행적(橫的:공간) 심적(心的) 물적(物的)인 관련 아래 공정하게 고찰하여야 한다. 이병도『한국사대관(大觀:1983』이런 역사학이 존재한다.” 이는 코매디다.(개잡소리)
이병도는 막상 낙랑군에 대해서 서술 할 때는 낭랑군은 뭡니까?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 수도자리에 세웠던 고대 한나라의 식민통치기관이다. 이를 동방에 알렉산드아라고 써났다(이병도). 그러면 고대 한나라의 통치기관을 동방의 알렉산아라고 써났으면 이게 객관입니까? 주관이죠. 주관도 대단한 주관이다.(이덕일)
결국 그거는 일제강점기가 바로 동방의 알렉산드리아라는 이야기하고 똑 같은 이야기를 한다.
거기서 또 조선편수사회 출신의 두 대부가 있다.
하나는 이병도 이 사람은 주로 서울대학교에 있으면서, 학술원 회장을 20년 가까이 하고, 심지어 허정 과도내각 때 문교부장관 까지 했다.
문교부장관 때 주로 한 이유가 그 당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교원노조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병도가 그 짧은 시간에 교원노조 파괴였다. 동시에 이병도보다 8살 연하인 신석호인데 이 사람은 고려대학교에 있으면서 국사편찬위원회 오래 근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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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역사학계의 태두 신석호 ~경성제대 사학과 졸업,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 일본 기원 2800년 기념장 수여(1940)
“조선인 김찬균 군은 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가고 , 나는 지도교수 이마니시박사의 추천으로 조선편수사에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의 전공을 살리기 위해서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8.15 해방과 조선편수사회」『신석호전집』(하)
☛신석호의 국사편찬위원회 재직기간이 1929. 4 ~ 1965. 1.22
☛이기백 서강대교수는 한국사 세 학파로 구분한다. 1.민족주의 사학. 2.유물사관. 3.실증주의 사학
*민족주의 역사학, 사회주의 역사학이 있다(유물사관),
☛일제식민사관이 사라지고, 실증주의 사학으로 둔갑했다. 따라서 해방 이 후에 간판을 바꿔 단게 일제식민사학을 갖다가 실증사학 이렇게 바꿔 달았다.
☛이기백이 말하는 실증사학이란 이에 대해서 실증사학은 한국사의 발전을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이에 맞추어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실증적이 태도로 객관적인 태도로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에 접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999)
이게 글이냐 하는 이야기다. 이거 역사학에서는 이 따위 글은 글이 아니다. 이것이 실증적인 태도입니까.
☛실증적인 태도로 주장 하려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료를 갖고 와 발아. 0개에요. 이는 100% 거짓말이다.
☛임나가 가야라는 사료 갖고 와보라. 0개다.
☛그러면서 실증이라는 것이다. 왜냐, 역사학계를 자기네가 100% 장악했으니까 자기네만 주장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이는 학문하는 기본자세은 없다.
☛역사학계를 장악한 이 사람들이 총론으론 이름표를 실증사학이라고 바꿔 달았다. 각론에 들어가면서 식민사관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했다. 임나일본부설을 극복 했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서 각론, 본론에 들어가면서 일제식민사관을 반복하는 그 구조다.
Ⅳ. 북한역사의 형성
☛그 반면에 북한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면
-백남운(1895~1979)~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의 월북과 북한역사학의 형성
1. 1945년 10월 10~13일 : 이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1. 분조선 분국 설치 및 민주기론 채택. 2. 남북 체제 경쟁의 시작. 3. 195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김일성은 대표를 남한에 파견한다. 보내 남한의 우수한 역사학자들 북으로 초청 한다.
☛ 백남운, 박시형, 김석형, 전석담, 등 이에 응해 월북.
-조선력사편찬위원회 결성(1947년 2월 7일,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내 위원장 이청원) 력사재문제, 조선민족해방투쟁사(1949. 10) 조선력사 간행
2. 북조선은 일제 식민사학 청산을 주요 과제로 삼는다.
3.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만들어 진다. 한나라에는 코민테론 제3국제공산당 1국1당주의 1국2당체제 `남한은 미국이 점령 했고,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북한에만 따로 조선 공산당을 사실상 만든 것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위 말하는 민주기지론이라는 노선을 채택합니다. 그래서 북한을 먼저 사회주의화 한 다음에 남한을 채택한다.
이 전략을 가지고 북한에서는 남한에 대한 정부수립을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북한은 이 당시 역사학을 아주 중요한 채재경쟁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
1948년부터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이 내려 보낸 파견 원들이 남한의 유수한 역사학자를 접촉하면서 월북을 종용하는 것이 곧 북한에 김일성종합 대학이 만들어 지는데 여기 역사학과 교수로 근무하지 않겠느냐 또는 우리가 곧 조선력사편찬위원회를 만들건데 여기에서 한번 우리 역사학을 제대로 해보지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니까 해방지후에 미군정이 다시 친일세략을 끌여들어가지고 실망했던 많은 역사학자들이 북한으로 올라갔다.
이때 쟁쟁한 인사들이 이때 다 북으로 올라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남운, 전석담, 김석형, 이청원 등 그 당시 역사 계에서는 일류급 인물이자 대부분 독립운동 하다가 감옥에 갔거나 고초를 겪었던 그런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이 대부분 월북을 해가지고 이들을 중심으로 1947년에 조선력사편찬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조선력사편찬위원회에 이청원이란 인물이 위원장이 된다.
4.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의 월북 역사학의 형성
1 1945년 10월 10~13일 이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 북조선 분국 설치 및 민주기지론 채택. ~ 남북체재 경쟁시작
2 1946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김일성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역사 학자들을 초청한다. ~ 백남운, 박시형, 김석형, 전석담, 등 이에 응해 월북한다.
3. 조선력사편찬위원회 결성 1947년 2월 7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내, 위원장 이청원. ☛력사문제 조선민족해방투쟁사(1949. 10) 조선력사, 등 간행. ☛일제 식민사학 청산을 주요 과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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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학을 재조명하고 청산해야 된다라는 걸 주요한 목표로 내건다.
☛그러면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주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한번 역사학을 연구해보자라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조선력사편찬위원회를 만들었다고 책이나 논문들을 보면 나와 있다.
☛그래서 제가 한번 나중에 제가 조선력사편찬위원회서 나온 (력사제문제)를 결번도 있습니다만 구해서 좀 봤다.
☛봤던니 거기서 대단히 놀란 구절을 발견한 게 뭐냐면 이 북한이 해방직후에 역사학계를 재편할 때 누구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는가. 자기내는 단재 신채호선생과, 약연 김두봉 선생을 지주로 삼는다.
김두봉선생은 국어 학자이자 이두학학자 이기도 하다. 그런대 원래는 국어학과 역사학은 같이 가고 지리학과 세 가지는 같이 가는 것이다.
역사학, 지리학, 국어학은 원래 같이 가는 것이다. 한국만 완전 동떨어져서 따로 떨어져 있다. 거기에다가 이 두 분의 단재 신채호 선생과 약연 김두봉 선생의 역사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에다가 제가 생각 할 때는 6.25이후에 아까 말씀드린 위당 정인보선생 같은 분들이 납북 당했다. 그럼 이분들을 찾아가서 또 물어 봤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역사관을 가지고 역사학을 정립했어요.
☛그 반면에 남한에서는 이병도 같은 사람을 갖다가 스스로 이게우치 히로시, 쓰다 소기치가 날 사랑했다. 그분은 인격자였다. 이런 사람을 갖다가 국사학계의 태두로 섬기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 들어간 것이 아주 참 다행이다라고 하는 신석호 같은 사람이 역사학계의 대부가 되고 그러니 역사학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까 지지난 정권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한국학술진흥사업단 연간 300억 정도의 국고 갖다가 주무르는 자리인데, 그 사업단장이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자로 말하면 또라이고 네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생각해보자.
☛단재신채호 선생과 약연김두봉 선생의 역사관이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고라고 하는 학자들과 단재 신채호는 세자로 말하면 또라이이고 네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역사관이 어떨 것인지 뭐 미루어 충분히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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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강만길자서전,(역사가의 시간) 망언
☛그래서 제가 놀란 글 중에 하나가 이 력사재문제에 나와 있는 홍기문, (조선조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 했다.『력사재문제 1949』
☛1949년에 홍기문 이 홍기문선생은 벽초 홍명희 선생의 아들이다
☛홍기문 북한 사회과학원장 리조실록번역총괄 향가 및 리두권위자
☛증조부 홍우길은 이조판서 ☛조부 홍승목(洪承穆 1847~1925) 대사성 및 참판
☛부친 홍범식(洪範植 1871~1910)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해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
☛벽초 홍명희(1888~1968) ☛3대 독립운동가 이다.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이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한 개 자기의 식민지로 일본 만들기에 성공함에 따라서 일시 그들의 소위 역사학자들은 조선역사에 대해서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
혹은 고적과 고분 등을 발굴하고 혹은 문헌을 고증하여서 조선역사로부터는 일찍이 듣지 못한 여러 가지의 사실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그들이 입증한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이란 과연 어떠한 것들인가?
첫째, 서기 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5백 년 동안 오늘의 평양을 중심 삼아서 漢人의 식민지인 낙랑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요(낙랑군 평양설)
둘째, 신라, 백제와 한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던 加羅가 본래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요(임나일본부설)
셋째, 신라 백제는 똑같이 일본의 부용(附庸)국가로서 그 중에도 백제는 그가 멸망하기까지 시종일관하여 일본에 복속했다는 것이요.
넷째 고대의 중국문화가 결코 조선인의 손을 거치어 일본에 소개된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나 또는 그의 식민지인 낙랑으로부터 직접 일본이 받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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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원 참의를 지낸 홍승목의 증손 홍기훈씨도 같은 내용, 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했다는 우편물을 보냈느냐?의 전화를 걸어 왔다.
홍승목은 소설(임꺽정)의 저자이며 행방 후 북한에가서 부수상을 지낸 벽초 홍명희의 조부다. 벽초 홍명희의 부친은 한일합방 후 자결을 했는데, 조부는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를 지내 이번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없다.(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강만길자서전,(역사가의 시간) *홍승목의 집안 3대가 독립운동가.
치욕스러운 역사에 이병도, 신석호는 빠지고...홍명명희 잡안은 들어갔다.
셋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문제인데. 치욕스러운 역사를 철저히 밝혀서 가르침으로써 역사반성의 폭을 넒힐 수 있어야 한다...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서 역사적 단죄를 하지 않고는 사회 정의가 서지 않는다...친일반민족행위 규명과 역사적 단죄는 평화통일의 추천과정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Ⅴ. 윤휴와 침묵의 제국
☛백호 윤휴 -300년이 지난 후에도 후손이 말하기를 꺼려한다. -당시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난이 있었다.
☛신분제도가 예학 중심의 사회신분이 예학으로 간다. 長幼有序
☛예학(행동규범) 사상에 철학, 성리학, 양반사대부로 재편하겠다.
☛양반사대부는 병역의무, 군포의무도 없었다.
☛일본이 쳐들어오니까 조선의 병역 군대가 도망갔다. 일부는 일군으로 투항한다.
☛조선의 백성은 목숨 걸고 싸우고 십지 않았다.
☞이유는 양반 사대부는 아무 짓도 안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압녹강을 건너려고 한다. 어가가 나라를 벗어나면 안 된다(류성룡).
☛이때 유성룡이 면천제도법을 통과 시키고, 간신이 나라를 구하게 된다.
☛왜놈 머리를 배어 모면 양인으로 승격해 주겠다. 그러면서 전쟁에 동원시킨다.
☛병자호란 때 의병이 이러나지 낳는다.(평민들이 침묵했다)
☛유학에서는 효충사상이 유학자의 기본자세이다.
☛인조반정 광해군를 내쫓았다.
☛조선왕은 명나라다. 우리왕은 제후에 불과하다.
☛君弱臣强 임금은 힘이 없고 신하는 강하다.
☛親明反靑 명나라를 받들고 청을 반대한다.
☛임금이 병자호란 때 인조가 3배 9복을 한다.
☛서인들이 북별하자 하면서 임금을 협박한다. 이는 임금 협박용이다.
☛예성노쟁 효종이 죽었을 때 상복을 1년보제를 주장한다.
☛부모가 상복을 장남이 죽으면 3년 차남은 1년 (송시열 송준길)
☛백호윤유에게 ‘취규(就規)이류’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효종이 죽었는데 1년복을 주장한다고 하니까 그 사람 상례비류를 다시 바야 갰네, 우암을 질타한다.
☛대동사회 소강사회 난세(모든 사람이 원망을 가지고 떠드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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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윤휴 처형후, 조선의 침묵
-윤후 후손이 30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말하기를 꺼려한다.
-신분제를 유지 할 것이고 폐지하는 것으로 가느냐의 문제다.
-예론 갔다. 예론을 강하시킨다. 로 유지된다.
-군필(병역세) 양반사대부는 면제된다. 군포, 세금면제
-일본이 쳐들어오니까 평민들만 싸웠다. 양반사대부는 도망가가기 바쁘다.
-유성룡이 선조에게 어가가 조선 땅을 벗어나면 안됩니다.
-윤두서에게 뭇는다. 적병에 반이 한국인이다. (적병으로 투항)
-인조반정 광해군을 몰아낸다. 서인(노론) 君弱臣强 신하는 강하고 임금은 약하다.
-병자호란
-효종이 찐짜 북벌을 할려고 하니까 사대부가 반대한다.(서인들이 반대 송시열 송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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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윤휴 사상(숙종때 58세에 출사한다)
-이때는 주자학만이 유일사상이다. 주자학의 신봉자는 우암송시열 이었다.
-백호가 중용을 읽다가 장과 절을 구분한다.
이를 우암이 네가 감히 주자에 맞서느냐,
-이에 백호를 사문난적으로 우암이 몰아간다.
=천하의 위치를 어찌 주자는 알고, 나는 모른다고 하느냐(윤휴)
-주자가 다시 태어나면 주자가 맞고, 자사가 다시 태어나면 내가 맞다.
-우암에게 제자가 뭇는다. 백호의 죄가 무엇인지요.
-성현을 능멸한 죄다. 주자에 맞서는 죄다.
-공자, 마구간에 불이 난 는대 사람은 안 다쳤냐.
말하고 말은 묻지 않았다. 주자
-백호 윤휴는 죄가 없다. 그러나 노론이 죽인 것이다.
-상께서 결단 하시지요. 노론이 협박하고 임금이 시행한다.
-국가에서 유학자를 안 쓰면 되지 죽일 것 까지는 없지 않습니까.(우암 제자 말)
-윤휴를 죽인 이유~예성론쟁, 불벌론, 주자에 맞섰다는 이유다.
-윤휴는 실제로 북벌을 추진하려 했다. 윤휴 죽은 뒤 우암 이름으로 북벌론으로 둔갑한다.(만주는 조선 땅이다. 명나라 황제(강희제)가 측량 해 준 것이다). 프랑스 루이14세 황제가 강희제의 부탁으로 명나라를 측량 해준다. 그 때 만주(간도)를 조선 땅으로 측량해주었다.
-윤휴는 양반 사대부들도 평민처럼 똑 같은 의무를 지는 대개혁을 실시하려던 것이다
-아무 죄가 없는 윤휴를 죽인 뒤 그 누구도 주자와 맞서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은 침묵의 제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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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40살 독살, 현종 34살 독살, 소현세자, 사도제자, 경종, 정조가 독살된다.
-노론에 협조 하는 임금은 고종명(명대로 살았다. 정권도 유지했다)했다.
-서인은 임금은 양반 사대부와 동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인은 나라의 임금을 임금으로 생각한다.
-양명학이 등장이다.
양명학 반대론자의 대표자는 이황(李滉)으로서, 그는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을 지어 양명의 『전습록』의 이론을 성리학에 입각하여 비판하였다. 여기에 그를 따르던 학자들과 후대의 성리학자들이 참여하여 양명학의 배척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왕양명이 주자학을 비판한 것을 다시 조목별로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유학계를 더욱 성리학 일변도로 만들어 고답적이고 고지식한 경향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Ⅵ. 결론
역사(歷史)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 歷史는 國學이다. 弘益理化 精神은 우리 民族精神의 원류이다. 이를 계승한 것이 민족 독립 정신이었다. 이는 독립정신으로 국가와 人類平和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獨立精神의 核心思想은 東學思想 이었다. 東學思想은 檀君의 弘益理化의 思想的 根據에서 비롯된다. 獨立精神의 核心은 개인으로써는 弘益人間이 되어야 한다. 전체로써는 神性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理化世界가 된다. 이것이 최고의 비결이다.
獨立運動은 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뒤 수많은 민초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들은 나라 안과 밖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져 국가를 찾기 위해 싸웠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3·1 운동,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옮겨갔다. 그리고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고 민족 교육 운동을 펼쳐 민족의 힘을 길렀다. 독립운동은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등 여기에 조선의 백성들이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전투,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는 氷山의 一角이다.
우리는 늘 기역 해야 한다. 역사(歷史)가 살아 숨 쉴 때 우리도 함께 살아 숨 쉬는 것이다, 한民族史가 바로 설 때 조국의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잊고 산다면 살아있는 목석과 같을 것이다. 역사를 바르게 알아야만 오늘과 내일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대의 대화이다.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와 대화이다. 잘못된 역사의 오류를 역사가들이 이를 바로 잡는데 연구를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獨立精神의 核心思想은 東學이 토대가 되었다. 동학의 위대성은 사람이 하느님 이라고 하는 사상이다. 어느 노교수 말씀이 동학보다 심오한 사상은 없다고 말한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주체성과 만민평등사상을 토대로 삼는다. 따라서 東學은 海東의 學이다.
이를 토대로 첫째, 독립운동의 독립정신은 自主, 自由, 平等, 平和의 정신으로 우리 민족이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둘째, 독립운동은 모든 인간이 공감 하고 호응하는 보편적 정신,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다. 셋째, 독립정신의 핵심사상은 평화와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며 상대를 존중하고 수용하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독립 선언문의 명문장 중 일부이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 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조선인의 독립국, 조선인의 자주민, 인류평등의 대의, 민존 자존의 정권, 이를 우리 후손들은 백골(白骨)에 새겨야할 것이다.
본 학술토론회를 통해서 왜 국가가 패망 했을까. 그 이유를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하고 말해야 한다. 조선왕조는 518년 만에 패망하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유는 정치가 개판 이였다. 조선조는 민초들에게는 나라가 아니었다. 양반 8%정도만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었고, 民들은 소 개 닭 말처럼 사고팔았다. 民들에게는 치욕적인 역사였다.
민주주의 기본 원칙은 기회의 균등이다. 그러나 조선의 민초들은 600년 동안 종이나, 노비, 머슴으로 살았다. 민초들은 600년 동안 기회가 없었다. 숨죽이고 살았다.
국가철학의 부재, 나라의 분열 과정(당파싸움, 이념 갈등), 국가의 관습과 전통, 젊은이들의 노동 기회 부재, 마지막 요인은 애국심의 소멸이다. 그리고 패망한다.
독일은 2차 대전 후 독일은 지구상의 국가들 중 현실적으로 가장 성숙한 국가이다. 독일은 68혁명세대가 정치적 민주화, 교육민주화, 사회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문화적 민주화를 이루었다. 이는 독일의 86세대가 이룬 것이다.
한국의 586세대는 독일의 68혁명세대보다 더 용감하게 군부독재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민주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민주화 외에는 이룬 것이 없다.
독일의 빌리브란트 수상은 대통령 후보시절선거구호를Democratizewagen“민주주의를 감행(도전)하자” 그리고 당선되고 민주화를 완성 시켰다.
한국은 언론·재벌 기득권의 그들만의 세상이다. 검찰, 재벌, 언론, 정치, 의료제국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상층부의 시스템이 우리 국민들을 식민지(植民地)화 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相生의 國家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과거의 오류를 되풀이 되지 않는다.
獨立精神의 核心思想은 개인으로써는 弘益人間이 되어야 한다. 전체로써는 神性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理化世界가 된다. 이것이 최고의 비결이다.
弘益人間 精神으로 獨立精神을 發源시키고, 이를 통해 새로운 국가 즉 弘益理化 世界를 만들고자하는 구체적인 활동 및 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독립운동사, 독립운동가의 잘못되고 폄하되고 왜곡된 기록을 바로 잡는 것 또한 후학들의 해야 할 일이다. 백야 김좌진장군 사후 음해가 사실이라면이는 큰 사건이다. 음해의 설계자가 누구인지, 근거는 있는지, 사실관계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위한 구체적인 연구, 역사적의학적과학적행정적사실관계의 증명이 반드시 필요 할 것이다. 그래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도 관심 없는 부분을 연구한 전재진 발제자님께 심심한 감사를 표(表)합니다.
오늘 세미나는 매우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통해 구현(具現)되었던독립정신을 계승발전하기 위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 할 것이다. 그리고 독립정신을 국민정신운동, 국가통합, 사회통합, 남북통일의 토대(土臺)로 이어진다면 조선 문명이 재 발원(發源)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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