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나무 파수꾼
《녹나무 파수꾼》이라는 이 소설은 일본의 인기작가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가 데뷔 35주년을 맞이해 2020년 출간하였다. 일본을 비롯해 한국·중국·대만 등 4개국에서 동시에 출간되었고, 시대의 감회와 새로운 세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번역은 전문번역가 양윤옥 선생이 했는데, 그녀는 이미 무라야마 하루키의 《1Q84》를 번역한 적이 있다. 작가는 “한국 독자 여러분께”를 통해서 “옆 사람과 서로 마음을 열고 만나기를 빌어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소원을 100% 들어주는 신비한 나무의 이야기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이로써 소설 내용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겠다. 그냥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일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다.
작가는 『비밀』이란 작품을 통해 1999년 제5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가까워졌다. 엄마의 영혼이 딸에게 빙의된다는 다소 충격적인 소재를 다루었지만, 청순한 이미지가 한국인에서도 인기 높은, 히로스에 료코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녹나무 파수꾼』은 치밀한 구성과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독자들을 방심할 수 없게 만든다. 빙의나 의료 사고 등 녹록치 않은 소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당대 첨예한 사회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추리소설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는 늘 새로운 소재와 치밀한 구성, 생생한 문장으로 매번 높은 평가를 받는 저력 있는 작가로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답게 작품 중 19편이 영화와 드라마로 독자들과 관객들을 만난다. 한국에서도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으며, 전세계적 팬덤(소비공동체)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덤불 숲을 빠져나가면 문득 시야가 툭트이고 그 앞쪽에 거대한 괴물이 나타난다. 정체는 녹나무다. 지름이 5미터는 되겠다 싶은 거목으로, 높이도 20미터는 넘을 것이다. 굵직굵직한 나뭇가지 여러 줄기가 구불구불 물결치며 위쪽으로 뻗어나간 모습은 큰 뱀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압도되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p.12
“그렇죠. 라고 노부인은 온화한 웃음을 띠며 등을 꼿꼿이 세우고 턱을 끄덕였다. “나는 그쪽의 어머님 미치에 씨의 언니예요. 이복 자매지만, 아까 나한테 아줌마라고 했는데, 실은 그쪽의 손위 이모입니다.”--- p35
“진짜 수상하다.”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레이토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분명 여자야. 애인이 생긴 거라고. 틀림없어. 업무 중에 빠져나와 밀회를 하다니, 여간 대담한 게 아니네.”--- p.62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왜 기념(祈念)이라고 하지? 소원을 비는 거라면 보통은 기원(祈願)이라고 하잖아.”글쎄, 라고 레이토는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건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나? 기원이든 기념이든. 말뜻은 별 차이도 없잖아. 여기서는 기념이라고 한다고 해서 나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야.”--- p.70
“녹나무님의 영험이야 당연히 믿고말고. 내가 몸소 감지했으니까. 하지만 소원이 이루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어. 우선 그건 내 힘만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 p.139
새삼스럽게 이 역할이, 녹나무 파수꾼이라는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깨달았다. 나아가 이런 일을 맡겨준 치후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 p.412
천애고아로 아무 직업도 없었던 그는 절도죄로 유치장에 수감 중이다. 그야말로 막장 인생 그 자체인 청년 레이토에게 일생일대의 기묘한 제안이 찾아온다. 변호사를 써서 감옥에 가지 않도록 해줄 테니 그대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인 레이토 앞에 나타난 사람은 지금까지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이모라는 사람이다. 그녀는 레이토 만이 할 수 있다며 ‘월향신사’의 녹나무를 지키는 일을 맡긴다. 녹나무는 이른바 영험한 나무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기도를 하러 온다. 그러나 단순히 기도를 한다기엔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있다. 일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레이토는 순찰을 돌다가 여대생 유미와 마주친다. 유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여기서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하는지 파헤치려고 뒤쫓아 온 것이었다. 레이토는 반은 호기심, 반은 어쩌다 보니 유미에게 협력하게 된다. 이야기의 도입부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세대를 뛰어넘는 마음, 그렇게 과거와 미래가 이어진다. 어느덧 2010년대도 지나가고, 새로운 2020년대의 날이 밝았다. 그러나 여전히 유토피아는 오지 않고, 황금빛 미래는커녕 기후변화, 노인문제, 젠더갈등, 빈부격차, 세대갈등이 심화되는 사회문제들이 우리 앞에 산적해 있다. 이전과는 분명히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그만큼 새로운 문제들이 부상하고 있다. 지금 시점에, 어느 누구도 완벽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한 점 후회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모든 이에게는 태어난 이유, 살아갈 가치가 존재하며 그것은 다수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전해질 것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라는, 다소 황당해 보이는 설정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가다운 솜씨를 발휘해 그 나무의 능력을, 그리고 그 나무에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의 사연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 어딘가에서 감동이 번져오게 될지 모른다.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2022.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