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실(張起實) 전도사는 평안북도 용천 사람입니다.
사촌간인 장기려 장로님 고향이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녀도 그곳에서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장죽섭 목사님이 4형제였는데 위로부터 장운섭 학섭 일섭 죽섭 이었습니다.
장기려는 운섭의 둘째 아들로 1911년생이고, 기실은 죽섭의 큰 딸로 1904년생입니다.
할아버지 장정식이 4백 석을 거두는 마름이어서 비교적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할머니 이경심은 입암교회 교인이었는데, 후손들이 그 할머니의 믿음을 물려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손자 기려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7세 때까지 할머니 이불에서 자라면서 신앙생활의 젖을 먹은 것입니다.
교회에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침 저녁으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대둔도로 들어가는 사선을 타야하는 흑산도 예리항구와 예리교회
이 교회는 박요한 목사님의 선친 박도삼 장로님이 설립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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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이 아버지 장죽섭은 감리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만주에서 목회할 때 일제가 기독교계 민족운동 세력을 탄압하려고 조작한
'105인 사건'(총독 암살음모) 관련자로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한 때는 러시아 니콜스크지역에 있는 해림교회를 담임했는데,
그곳에서도 교회가 탄압을 받자 다시 만주로 옮겨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한때는 북경에 거주하면서 거류민단장을 지냈습니다.
<사진 - 총회에서 장기근속상을 받은 장기실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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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가문에서 자란 기려는
경성의전을 나와 평양 기홀병원(홀부인기념병원),
그리고 김일성대학 의대교수로 있다가 6·25때 월남하여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우고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주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삶을 산 것입니다.
기실은 정신여학교와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생을 전도사로 살았습니다.
1955년에 제48회로 졸업한 84명 동기생 가운데는 총회신학교 교수였던 김득룡,
총회장을 지냈던 이영수, 기독신문 주필이었던 채기은 목사도 있습니다.
교단의 헌법상 여자라서 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여자에게 목사 안수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전도사이지만 한 평생 주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목사, 장로가 회원으로 모이는 노회가 열려도 방청석에 앉아야했습니다.
목회자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고, 의견이 있어도 발언은 할 수 없었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도움받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목사님들 앞에서 "내가 ◦◦◦ 목사와 동기라고..." 하면서
답답하고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답니다.
그에게 어려운 일 가운데 또 하나는
성례식을 집행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에게 학습이나 세례를 줄 수 없기 때문에 노회가 파송한 당회장을 모셔야했습니다.
그래서 목포에 계시는 목사님이 당회장을 맡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일 년이면 한 두 차례 방문해서 제직(서리 집사)을 임명하고 성례도 행했습니다.
그 뱃길이 문제였습니다. 목포에서 흑산도까지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고, 바람이라도 불면
태풍경보와 함께 뱃길이 끊겼습니다.
대둔도에 들어왔다가 발이 묶여 목포 본교회의 주일예배를 인도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세례 받을 교인들을 목포로 나오라고 했답니다.
그럴 때는 승촌교회가 성찬식도 못하고 한 해를 지나야 했습니다.
논농사가 없는 섬이라서 주민들은 고구마가 주식이었습니다.
그런 섬에서 사는 처녀들이 '평생 쌀 한 말 먹고 시집 가면 호강이라.'는 말처럼 곡식이 귀했습니다.
교역자라고 그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육지에 곡식 흉년이 들면 바닷 것도 흉년으로 양식과 바꿔먹을 해초도 뜯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흥회 강사로 갔던 이영하 목사님(광주백향교회)께
"목사님, 쌀 한 톨 구경 못하고 살았던 해가 많았습니다.
고구마라도 넉넉했으면 원이 없지요." 하며 고생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 교회 이생단 권사님도 어렸을 때 친구들과 전도사님 집에 놀러갔다가
몇 개 남지 않은 고구마를 삶아먹었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아끼고 아껴서 끼니를 이을 것인데
그것을 먹어버렸으니, 전도사님은 말도 못하고 굶었을 것이라며,
지금도 그 때 그 일이 죄송스럽답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내에 피했을 때 까마귀가 공급해주는 양식을 하루 두 끼라도 먹었는데
흑산도 장기실 전도사님은 가난한 섬에서 배를 많이 곯은 것 같습니다.
장기려 장로님은 자기 급료까지도 가난한 사람들 치료비로 내놓았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집도 없이 병원 옥상에 있는 사택에서 살았습니다.
장기실 전도사도 '베풀고 섬기며'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70 고령에는 승천교회에 다른 교역자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를 맡은 유종화 전도사에게 장 전도사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내가 죽으면 묘지를 만들지 말고 평토장을 해주시오." 하고
부탁했답니다. 교회 외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청빈한 생활을 했던 예수님의 여종은 교인들 위해 모든 것 다 바치고 빈 손으로 간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은 사람이요, 양을 위해 자신을 다 주셨던 예수 닮은 목회자였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