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문학사(B.A) 학위를 받으면서 졸업하였다.
한국 여성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스크랜톤 부인(M.F.Scranton)을 도와 영어와 성경등을 가르치며
불우한 환경의 여인들을 깨우쳐나가기 시작했다. 1908년 앨벗슨(M.M.Albertson)이 이 학교 교사로 들어오면서 하란사는 앨벗슨과
함께 이학교를 단순한 영어학교가 아닌 성경학교로 전환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전도부인 양성을 목적으로 한 성경학교로
교과 과정을 정리하였다. 이 학교는 후에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되었다가 남자 협성 신학교와 합동하여 오늘의 감리교 신학대학이
되었다. 초창기 한국 감리교회의 여성 지도자인 양우로덕.
신알베르트 손메레 등이 모두 하란사에게서 영어와 성경을 배웠다.
그는 단순한 교실의 교사만은 아니었다.
학생들과 함께 거리와 시골로 나가 전도하는 활동가였다.
1915년 하란사는 큰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몸에서 난 딸 자옥(세례명은 도로시)이 이화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다. 딸 자옥이 그만 갑자기 죽고만 것이었다. 이 무렵의 하란사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강연과 강의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07년 이화학당 교사로 있던 이성회가 조직한 이문회라는 학생 자치단체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유관순도 이문회 회원으로 하란사의 지도를 받았다.
그 이문회는 3.1운동 때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딸 자옥을 잃은 슬픔을 딛고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로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한다.
그는 신흥우와 함께 세계 감리교 총회에 참석한 뒤 미주 전역을 돌며 강연을 하였면서
교포와 미국인들로부터 헌금을 몸아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해 1918년 정동교회에 기증한다.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설치로 기록된다.
이 파이프오르간의 펌핑실(지하)는 1919년 3.1운동 당시 정동교회 교인들이 3.1운동을 준비했던 공간으로 유명하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51년 교회의 강대상이 폭격으로 무너지면서 파이프 오르간도 함께 부서지고 말았다.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은 2003년 10월 복원됐다
이번 복원은 1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 남부의 파이프 오르간 제작 명가인 ‘플로이겔즈’사의 기술력에 의해 이뤄졌다. 복원된 파이프 오르간은 독일 낭만파 오르간의
일종으로 2개의 손건반,20음색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 복원 사업은 정동교회 권사였던 고 이종덕(현 세아제강) 부산파이프 창업자의 아들이자 세아제강 회장인 이운형 집사가 정동교회측에 복원 경비 전액을 헌금,이루어졌다. 정동제일교회는 이 파이프 오르간으로 교회 주변 직장인 대상 ‘정오음악회’, 월 1회 전문연주가 초청 ‘정기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고종은 깊이 숨겨 두었던 이른바 한일 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 문서 원문과 외국 의원들에게 보낼 호소문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어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려 했다. 그 중대한 임무에 하란사가 발탁되어 일은 추진되었다.
하란사가 미국 유학 당시부터 의친왕과 교분이 있는 것을 알고 고종은 하란사에게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일을 착수시켰다. 하 란사는 용기가 솟았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녀의 가슴을 뛰었다.
일의 시작에서부터 운명은 하란사와 국운 쪽에 이로운 것 같았다. 운명은 끝내 돌아서고 말았다.
1919년 1월 하순 고종께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시고 만 것이다. 이화 학당에서 프라이와 신홍우 박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하란사는 황제의 급보를 듣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궁중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 하란사는 의친왕을 통하여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고종 황제가 승하한 지 얼마 안 되어 하란사는 북경을 향해 떠난다.
2월 중순, 동경 유학생 황 에스터는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여성 대표로 하란사를 출국시키려고
서울에 왔으나 하란사가 이미 북경으로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하란사가 국가를 대표할 만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에 도착하자 그 곳에 있던 교포들의 환영이 대단했다. 하란사는 어느 교포가 개최하는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다.
이 만찬회가 생애에서 마지막 가져 보는 자리였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빌미가 되어
하란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죽음의 세계를 향해 치달았다.
마침내 그녀는 폭약을 먹고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어 갔다.
그녀의 시체는 시커먼 색으로 변질되어 독살의 의혹을 짙게 했다.
장례에 참석했던 성서 공회 책임자 베커의 말이 독살당했으리란 심증을 굳게 하였다.
하란사의 남편 하상기도 북경가서 어여쁜 아내가 독살당해 퍼렇게 멍든시체를 안고 귀국한다.
그는 독립 운동을 방해하는 친일배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단정했다.
일제의 스파이로 활약했던 배정자가 하란사의 뒤를 미행하여 독살시켰다는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온 선교사 벡커(A.L.Becker)가 돌아와서 그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었다고
말한 점은 주목할만 하였다. 또 그의 남편 하상기가 북경을 다녀와서 주위에
"북경가는 도중 봉천에서 어떤 동지를 만나 속 뜻을 이야기한 것이 오히려 그녀가 음해를
받은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 사실도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는 점을 뒫받침하고 있다.
일본 스파이로 활약한 배정자가 미행했다는 소문이 하란사의 죽음 직후 세간에 나돈 것 등은
그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나 자연사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독살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독살설은 나돌았지만 분명하지 않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