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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타경 마음공부 – 페이융
불교도 아니어도 불교에 문외한이어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들어봤을 것이다. 불교의 목적과 이념이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고 한다면, 그 해답은 “조용히 마음을 다해 ‘나무아미타불’을 읊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이 말은 책의 저자 페이융(費勇) 선생이 부처님 말을 빌려서 한 말이다. 그는 15세 때 상해사범대학에 입학해 석·박사가 된 뒤 지난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990년부터 불경 연구로 불교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금강경을 해석한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법화경 마음공부》,《반야심경 마음공부》등 불교경전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해설한 저서들은 하나같이 불안, 걱정,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초월적 삶을 사는 지혜를 들려준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주변의 환경을 힘으로 바꿀 수 없다면 우리 자신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받아들이고 내려놓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사람은 건강을 원하면서 병은 거부하고, 행복을 원하면서 불행에 저항한다. 또 살아있는 것은 받아들이되 죽음은 외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은 한쪽만 갖고 다른 쪽을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히 건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건강 비결을 찾고, 점쟁이나 풍수가를 찾아 비방을 구하기도 한다. 살면서 우리에게 닥치는 많은 일들 가운데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교통체증만 해도 그렇다. 날 수 없다면 길이 뚫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괴로운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그것은 모두 자기 인생의 일부다. 세상을 원망할 것도, 하늘을 탓할 필요도 없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한 계기는 될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애기다. 피하지 말고 지혜와 용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에 바꿀 수 없는 것은 없다. 고통을 잊고 바꾸면 평온함이 찾아온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어떤 것도 인생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삶은 원래 가볍고 투명하고 깨끗한 것이다. 그저 내려놓으면 된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도 행복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 《아미타경》에서 일러주는 대로 일상에서도 활용하면 된다. 설사 현실과 환경은 바꿀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은 바꿀 수 있다. 내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바꾸는 방법을 모른다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 마음을 다해 “나무아미타불”을 계속해서 불러보라!
무슨 말이야? 불교도가 되라는 것이냐? 출가를 하라는 것이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석가모니가 《아미타경》에서 알려준 방법을 실천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고 생사의 번뇌에서 영원히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다음 세 가지만 실천하면 된다고 하니, 속는 셈 치고 한번 실천해 볼까 ㅋㅋㅋ?
첫째,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음을 굳게 믿어라.
둘째, 그 극락세계에 꼭 가고 싶다고 간절히 발원하라.
셋째, 고요한 마음으로 ‘아미타불’명호를 읊고 아미타불이 꼭 자신을 서방 극락세계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굳게 믿어라.
불교의 최종목표는 성불(成佛)이다. 목표에 도달해 궁극적인 해탈을 얻어야만 더 이상 번뇌하지도 윤회하지도 않게 된다. 겨우 돌아 온다고 해봐야 조금 나으면 신선이, 조금 나쁘면 짐승으로 태어나는 차이뿐이다. 해탈해야만 사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生과 死도 없는 불생불멸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增不減)의 공무(空無)로 갈 수 있다. 그리되면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 극락세계는 어디고, 어떤 세계인가? 하는 의문은 남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아니면 저것? 동쪽으로 갈까? 서쪽으로 갈까?’하고 고민하게 된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을 하려면 자신에게 명징(明徵-깨끗하고 맑음을 증명하는 일)해져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부담이 되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롭고 막막하고 초조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년은 인생의 절반을 살았는데 이것이 정녕 내가 원하는 삶인가 하고 고민하고, 젊은이는 수많은 길 중에 어느 하나만 선택해야 하지만 헷갈려하고 방황한다. 두 갈래 길을 동시에 갈 수는 없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언제나 방황하고 발버둥질한다. 그렇게 방황하고 망설이는 사이 인생은 흘러간다. 그래서 인생은 명징해져야 한다. 결정을 못 하고 망설이고 허비해서는 안 된다. 부처의 제자 중에 ‘주리반타가’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아무리 공부해도 불법을 이해할 수 없고 짧은 게송마저 외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석가에게 물었다. 이에 석가모니가 대답했다.
“차분한 마음으로 바닥을 쓸어라. 불법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비질은 할 수 있지 않느냐? 차분히 바닥을 쓸어라. 바닥을 쓸 때는 ‘비질’만을생각하고 읊으라. 주리반타가는 어려운 도리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고 마음 편히 비질만을 생각하고 비질이라고 읊었다. 잡념을 버리고 ‘비질’이라는 말을 외우는 데만 집중했다. 삶은 단순하고 편안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비질이 속세의 먼지는 물론 마음에 쌓인 먼지까지 쓸어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법으로만 떨쳐 낼 수 있는 줄 알았던 욕심, 분노, 어리석음까지 빗자루로 쓸어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훗날 그는 부처의 큰 제자가 되었다.
‘아미타불’은 누구인가? 《아미타경》을 이해하려면 이것부터 알아야 한다. 석가모니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불멸의 신이나 전지전능한 천신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었다. 아미타불은 생전에 세요왕으로, 석가모니가 유일무이한 부처가 아니듯 그도 그런 부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도 속세의 생로병사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왜 그런가 고민하다가 ‘법장’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출가했다. 법장비구는 그를 이끌어 준 세간자재왕여래가 보여준 불토를 둘러본 뒤 크고 훌륭한 서원을 하였다. 그것이 아미타불의 48대원인데 그는 서원에 따라 열심히 공덕을 쌓고, 마침내 아미타불 부처가 되었다. 인간이 상상하는 가장 완벽한 정토가 이 우주에 생겨난 것이다. 아미타불로 인해 우리 인생에도 최종의 목적지로서 서방정토가 생겨난 것이다. 법장비구는 48대원을 세우고 아미타불이 되었는데 진실한 지혜로 서원을 실천하고 한없고 끝없는 공덕을 쌓았으므로 그의 법신은 장엄한 모습으로 극락정토에 나타난 것이다.
석가모니는 아미타불에게는 일정하게 오는 곳도 없고, 일정하게 가는 곳도 없으며, 생도 없고, 멸도 없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고 했다. 다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이루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십만억불토나 떨어진 서방 극락세계에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아미타경》에 “그 땅에 아미타라는 부처님이 계셔서 지금도 설법하고 계시니…”라고 했다. 법장비구는 48대원을 세우고 아미타불이 되었다. 48대원이란 무엇인가? 처음의 제1원과 마지막 제48대원만이라도 보도록 하자.
제1원 국중무삼악도원(國中無三惡道願)
제가 부처가 될 때 서방정토에 지옥, 아귀, 축생 같은 삼악도가 있다면 저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고 계속 속세에서 중생을 구제할 것입니다.
…
제48원 즉득제인구경원(卽得諸忍究竟願)
제가 부처가 될 때 다른 국토의 수많은 보살이 저의 아미타불 명호를 들은 뒤, 음향인(音響忍), 유순인(柔順忍),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세 가지 법인(法忍)을 얻고, 일체 제법에서 불퇴전(不退轉-물러서지 않음)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면 저는 결코 부처가 되지 않고 계속 속세에서 중생을 제도할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서원은 아닌 듯 보인다. 실천하기도 쉽지는 않겠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48서원을 해냈다. 서원한 뒤 그는 수행을 통해 청정한 세계, 번뇌와 더러움이 없는 세계를 만들었다. 정토가 그곳이다. 정토는 정토종이라는 불교의 한 종파로만 알기 쉬운데 정토종은 염불왕생을 강조하는 종파이기는 하나 이는 특정 종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토는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경지다. 정토에는 아미타불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약사불도 있다. 약사불은 동방정토를, 아미타불은 서방정토를 상징한다. 불교에서 죽음은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태양이 수평선 밑으로 사라졌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듯이…, 미륵정토도 있다. 미륵불은 미래 어느 때가 되면 도솔천에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정토를 만들 것이라고 한다. 미륵불이 인간 세상으로 돌아올 때 전륜성왕이 출현해 무력이 아닌 덕행으로 세상을 하나로 만들 것이라고 한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은 모두 자비의 상징이다. 관장하는 영역이 다를 뿐이다. 관세음보살은 각종 재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고, 아미타불은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해 생사에서 해탈하고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사람들은 병이나 재난이 닥치면 관세음보살에게 기원하고, 사후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길 바랄 때는 아미타불에게 축복을 기원한다. 아미타불 명호를 부를 때 우리는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광명의 천당이 있음을 믿는다. 그것에 대한 신념과 갈망이 있기에 세상의 어떤 고난과 역경도 참아 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세계를 극락세계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그 세계는 어떤 고통도 없고 갖가지 기쁨만 있기 때문에 극락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속세엔 수많은 바다가 있고 바다가 결국에는 고통의 바다인 고해(苦海)가 되고, 수많은 열매가 있지만 그것은 모두다 쓰디 쓴 열매인 고과(苦果)다.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믿지 못하겠다면 훗날 임종을 맞을 때 아직 정신이 또렷할 때, 지나온 삶을 돌아보라고 저자는 말한다. 승자가 있는가? 패자가 있는가? 완벽한 시작이 있었는가? 완벽한 결말이 있었는가? 아니면 유구한 역사에서 누가 이겼고 누가 졌는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는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집에서 어서 빠져나와 자유로운 세계로 돌아오라고 한다. 《아미타경》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극락세계를 묘사한 뒤 그곳에 태어나기를 발원해야 한다고 한다. 그곳에 가야만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얻고 자유로워진다고도 했다.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면 인생은 궁극적이고 완벽한 목표가 생긴다. 목표가 생기면 속세에서 겪는 모든 고통은 그저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것은 수련이 되고, 눈앞의 사소한 일에 연연하거나 초조해지지도 않는다. 인간은 모두 육신 안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영혼’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영혼이 무수히 많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음을 망각한다. 속세에서 비극은 무한한 영혼으로 유한한 육신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육신이 무한한 영혼을 압도하려는 데서 생긴다. 육신은 제약할 수 있겠지만 영혼은 속박할 수 없다.
《아미타경》에서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그 명호를 마음에 굳게 지니며(…), 온 마음을 다해 귀의한다면 그가 임종할 때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의 여러 성중과 함께 그 앞에 나타날 것이다. 이때 만약 그 사람이 평소에 염불할 때처럼 평온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해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염불한다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마음을 다한 염불? 이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염불이란 무엇인가.
염불에는 4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지명(指名) 염불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입으로 읊고 귀로 들으면서 하는 것을 말하고, 둘째는 관상(觀像) 염불로 아미타불을 보고 마음에 새기고, 셋째 관상(觀想) 염불은 극락세계의 장엄함과 서방 삼성(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32상을 관상하면서 구품중생(九品衆生)이 어떻게 서방 삼성의 인도를 받는지 관상하면서 하는 염불을 말한다. 넷째 실상(實相)염불은 인연이란 공空에 의해 일어남을 알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한마음으로 관상하는 것을 말한다. 실상을 새기면서 하는 염불인 것이다. 이 네가지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실상 염불이고, 쉬운 것이 지명 염불이다. 언제 어디에서든 누구든 한 번만 배우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지명 염불이다. 중국의 고승 연지대사가 말했다.
“염불 법문은 누구나 행할 수 있습니다. 천년 암실에 등불이 하나 있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백정도 관리도 그 일을 하는데 방해되지 않고, 농부가 농사짓는데 부녀자가 일을 하는데, 승려가 참선하는 데도 방해되지 않으며 어떤 일을 해도 서로 방해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염불해도 되고 바쁜 일과 중에 틈을 내어 염불해도 되며, 천 번, 백번 해도 되고 삼백 번, 오백 번을 해도 되고, 열 번을 해도 됩니다. 회향(回向-자신이 기도한 공덕이 함께 나누어지기를 바라며 그 공을 타인에게 돌리는 일)하고 발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면 왕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한번 왔으면 떠나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마지막엔 누구나 결국 죽는다. 죽음을 모른 척하고 즐겁게만 산다면 그건 너무 불안정한 즐거움이다. 죽은 뒤를 통찰하는 낙관이야말로 진정한 낙관(樂觀)이다. 나에게도 언젠가 그런 순간이 왔다고 상상해 보자. 당황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자. 죽음이란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다. 속세의 어떤 것에도 미련을 갖지 말고 철저하게 홀가분해져야 한다. 아무리 미련을 가져도 그것들을 가지고 떠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야 한다. 자기 몸이 가벼워져서 광명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시간의 터널을 지나서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그 세계 연꽃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아직 피어나지 않은 연꽃과 꽃봉오리들을 생각해 보자. 연꽃이 천천히 벌어지면서 만개하는 상상을 해 보자. 눈앞에서 갑자기 수많은 부처와 보살이 허공에 떠다니고 물·새·나무·숲 모든 것들 속에서 부처들의 설법이 들린다. 이렇게 관상하는 것을 ‘무량수불과 극락세계를 보았다’고 하는데, 이런 전체적인 모습을 관상하는 것이야말로 보관상(普觀想)이다.
마지막 장은 ‘어떻게 죽음을 초연해 이생에서 천국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인데 귀담아 듣고자 하나 잘 들리지 않고 읽어도 깊이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은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어쩌면 나와 우리 모두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하고 정진한다면 극락세계에 가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아직은 한참 멀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석가모니는 똑같은 왕생이지만 업력과 수행의 정도에 따라 왕생의 등급을 아홉 개로 나누었다. 상배상생에 상품상생, 상품중생, 상품하생이 있고, 중배생상에 중품상생, 중품중생, 중품하생이 있으며, 하배생상에 하품상생, 하품중생, 하품하생이 바로 그것이다.
하배생상은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도 선지식(덕이 높은 수행자)을 만나 염불 법문을 꾸준히 수행하면 서방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대업왕생이라고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기만 하면 서방에 왕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회두시안(回頭是岸)이라는 말이 있다. ‘고개를 돌리니 바로 극락이더라’는 말로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뜻이 담겼다. 염불하기만 하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극락세계로 가는 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선지식이 그를 위해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해 주거나 불법을 설해주고 그가 자신의 죄를 깊이 후회하고 참회한다면 과거의 죄업이 사라지고 정토왕생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불설무량관수경》에서 석가모니는 말했다. “저 나라에서 태어나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세 가지 복을 닦아야 한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며,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섬기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며 살생하지 말아야 하고, 열 가지 선업을 닦아야 한다. 둘째,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여러 가지 계를 지니며 위의(威儀)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인과의 이치를 깊이 믿고 대승경전을 독송하며, 다른 수행자들에게 부지런히 권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청정한 업이라고 하며, 이 세 가지 업이 과거·현재·미래 삼세 부처의 청장한 업의 바른 인(印)이다.”라고.
죽음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고 생명의 진실한 모습이자 누구나 반드시 겪어야 하는 단계다. 《아미타경》에서는 죽을 때가 다가와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설령 우리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발원하고 후회하더라도 서방정토에 왕생할 기회가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정토에 갈 것인가이다. 서방에만 정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방세계 모두에 정토는 있다. 정토는 석가모니가 가장 높은 이상인 ‘청정함’과 ‘온전함’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미타불이 계신 서방정토 외에도 미륵정토도 있고 약사유리의 동방정토도 있다.
미륵불은 인간 세상을 번영하게도 안락하게도 아름답게도 하는 부처다. 미륵은 중생을 기쁘게 하는 자(慈)로 사랑의 상징이고, 석가모니는 비(悲) 로서 연민의 상징이다. 즉 중생의 고통을 없애고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한다. 미륵정토에는 석가모니의 또다른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죽은 뒤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이지만, 인간 세상의 찰나에 생명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 찰나에 정토에 닿을 수도 있다. 우리가 왕생하기 위해 선근(善根)과 공덕(功德)을 쌓는 과정이 인간 세상의 정토를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누구나 아집을 버리고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몰두한다면 몸이 어디에 있든 정토에 있는 것과 같다. ‘중생이 곧 정토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는 말은 이런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아미타불이 48대원을 세운 것은 중생이 사후에 서방 극락세계에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동방에 정토를 세운 약사유리광여래이 12가지 큰 서원을 세운 것은 중생이 속세에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약사유리광여래의 12가지 서원 중 일부를 보면,
서원1 : 바라옵건데 미래에 제가 부처가 되었을 때, 제 몸이 광명의 횃불이 되어 활활 타올라 무량한 세계를 비춤으로써 모든 중생이 부처처럼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을 갖고, 32상과 80가지 수형호를 갖게 하소서.
서원2 : 바라옵건데 미래에 제가 부처가 되었을 때, 제 몸이 깨끗한 유리처럼 안팎이 투명하고 티 없이 순결하며, 광명이 널리 비추고 공덕이 우뚝 솟고 몸이 묘하게 훌륭하며, 청정한 가운데 안주하여 해와 달보다 더 찬란하고 장엄한 빛이 나오게 하소서, 그리하여 몽매한 중생도 제 광명을 보고 어두운 마음이 열려 자기 마음대로 온갖 일을 이룰 수 있게 하소서.
서원3 : 바라옵건데 미래에 제가 부처가 되었을 때, 무한한 지혜 방편으로 무궁한 부를 창조하여 세상의 모든 중생이 써도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
(…)
서원12 : 바라옵건데 미래에 제가 부처가 되었을 때, 어떤 중생의 생활이 곤궁하여 옷이 없거나 모기, 개미 따위에 시달리거나 밤낮으로 번뇌가 많더라도 제 명호를 듣고 오롯한 마음으로 제 명호를 부르고 제 법을 받들어 행한다면 제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좋은 의복과 보배로 만든 장식품, 꽃, 향료, 가무 등을 주어 그들이 바라는 바가 모두 충족되게 하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서원인가? 불교에서는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자기 스스로 심신을 청정하게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가장 근본이라는 말인데 어떻게 해야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서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천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알고 있으면 실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것을 본다.
1) 중생의 번뇌가 다 사라지지 않는 한 모든 부처에 대한 예배와 공경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2) 청정한 身, 口, 意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기를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영원히 지치지 않겠습니다.
3) 가장 아름다운 것을 부처님께 영원히 공양하겠습니다. 특히 법공양을 중히 여겨 중생을 이롭고 기쁘게 함으로써 공양하고 중생을 도움으로써 공양하며,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음으로써 공양하고, 선근과 공덕을 부지런히 닦음으로써 공양하며, 보살행을 닦음으로써 공양하고, 보리심을 지킴으로써 공양하겠습니다.
4) 제 무수히 많은 과거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 무명(無明)이 있었고 身口意로 세 가지 악업을 지었습니다. 청정한 身口意로써 진실로 참회할 것입니다. 허공 세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무명과 번뇌에 다함이 없는 한, 영원히 쉬지 않고 참회할 것입니다.
5) 모든 부처의 공덕을 따르며 기뻐하겠습니다 (…)
6) 허공 세계가 사라지지 않고 중생의 세계가 사라지지 않으며, 중생의 혹업(惑業-이치를 몰라 의혹에 빠지고 그로 인해 짓는 업)과 무명 번뇌에 영원히 다함이 없다 해도 부처님께 설법을 계속 청할 것입니다.
7) 중생의 혹업과 무명 번뇌에 영원히 다함이 없다 해도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8) 허공 세계가 사라지고 중생 세계가 사라지고, 중생의 혹업과 무명 번뇌가 다 할 때까지, 설령 이것들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9) 병고에 시달리는 모든 중생을 위해 그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될 것이고,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을 위해 그들의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될 것이며, 길고 긴 밤 중생을 위한 횃불이 될 것이고,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중생이 보배 창고를 얻게 할 것입니다.
10) 이 아홉 가지를 통해 얻은 공덕을 모든 법계의 모든 중생에게 아낌없이 돌려줄 것입니다. 제 유일한 바람은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쁜 생각을 품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나쁜 일을 할 수 없고, 선한 생각을 가졌다면 즉시 선업을 쌓기를 바랍니다. 삼악도로 통하는 모든 문이 그들에게 닫히기를 바라며, 삼선도(三善道-선업을 쌓은 중생이 가는 곳 - 아수라, 인간, 천상)로 통하는 문이 그들에게 활짝 열려 그들이 부처가 되는 길로 들어서길 바랍니다. 허공 세계가 사라지고, 중생의 혹업과 무명 번뇌가 다 한다 해도 저는 쉬지 않고 계속 회향할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