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면 꽃댕기 매고 놀~던 옛 친구 생각난다 그 시절 그리~워 동산에 올라보면 놀던 바위 외롭고 흰구름만 흘러간~다 모두 다 어디갔나 모두 다 어디갔나 나 혼자 여기 서서 지난 날을 그~리~네 그 시절 그리~워 동산에 올라보면 놀던 바위 외롭고 흰구름만 흘러간~다 모두 다 어디갔나 모두 다 어디갔나 나 혼자 여기 서서 지난 날을 그~리~네 |
![]() |
|
오방리(五方里)
1. 오방리(五方里)의지세, 연혁, 산이름
밀양군의 서쪽에 있는 함박산을 등에 지고 좌. 우로 뻗은 산줄기가 감싸주어 하나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동남쪽으로는 넓은 초동평야를 바라볼 수 있는 탁트인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범평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방리라는 법정 마을이 되었다. 동으로는 신월리, 남으로는 범평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함박산의 능선을 경계로 하여 무안면 성덕리, 연상리와 연접해 있다. 서로는 청도천을 사이에 두고 창녕군 부곡면과 군계를 이루고 있다. 지금 마을 앞으로 지방국도가 남·서로 달리고 있어서 교통도 편리한 곳이다. 원래는 웃마, 양지마, 절골마, 아래마 등 네 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아래마는 1914년에 범평리에 병합되었다.
(1) 오방리 (五方里, 五榜里, 五坊里)
종래의 웃마, 양지마, 절골마 등을 합친 마을이며 오방리의 본동이다. 오방리의 옛 이름은 오방동이다. 일찌기 이 마을에서 살았던 박씨가문에서 5형제가 한꺼번에 과거에 동방급제하여 그 영광을 기리기 위하여 5형제의 '五'자를 따고, 동방(同榜)이라는 '榜' 자를 따서 오방동(五榜洞)이라고 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문헌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밀주지에는 생원 박림장(朴林長)이 소거한 사실이 있으나, 그 사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조선 명종 14년(1559)에 취원당(聚遠堂) 조광익(曺光益)이 창원부(昌原府) 지개동(芝介洞)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후 지금까지 창녕조씨 일파가 세거해 오고 있다. 또 현종 때 윤계삼(尹啓三)이 청도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후 지금까지 파평윤씨 일파도 세거해 왔다.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재사로는 오봉서원(五峯書院)과 조중문 양대 사부자(曺重文兩代四父子) 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한 영모당(永慕堂)이 보존되고 있다. 또 파평윤씨 시천조 묘하재숙소인 오산재(五山齋)가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전대미문의 미담이 얽혀져 있는 효자 취원당 조광익 지려(孝子聚遠堂曺光益之閭)와 강동구(江東邱)의 사적이 전한다. 또 면사무소와 경찰지서가 위치하고 있으며, 아래 마을인 범평리에는 초등학교와 농업협동조합, 시장이 있어서 초동면의 행정 중심지가 되고 있다.
■ 웃마
오방리 가운데 절골에서 흐르는 물이 쌍유등 좌측 벼리끝 좌쪽에 있는 마을이다.
■ 양지마
오방리 절골에서 모인 물이 흐르는 벼리끝 우측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 절골마(寺谷)
오방리 절골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 광제암이 있다.
■ 조효자문(효자 취원당 조광익 지려 : 孝子聚遠堂曺光益之閭)
오방리 동구 앞 좌측 길가 갈곡에 있으며, 취원당 조광익의 출천(出天)의 대효(大孝)를 현창(顯彰)하는 정려이다. 원래는 취원당의 출생지인 창원부에 정려를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34년에 오한 손기양(孫起陽)의 발문으로 사림에서 취원당의 이거지인 이곳으로 옮겨 중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를 하였으며, 창녕조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강동구(江東邱)
오방리 동구 밖 좌측 한길가 갈곡에 있으며, 취원당 조광익의 효행과 우애를 표창하고, 그 덕풍을 기념하는 비각도 있다. 취원당 조광익은 효행으로서나 형제간의 우애에 있어서도 남다른 행적을 남겼다. 그 아우인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이 선조 때 경상도사 최황(崔滉)이 公에게 軍籍을 감독하는 자리에 임명하고는 역정(役丁) 50명을 독납토록 명했다.그러자 당시 공의 父가 71년에 母가 72년에 卒하여 부모님의 3년 喪을 끝내지 못했다. 당시 국상시는 개인 상은 부득불 연기해야 했다. 즉 명종 비 인순왕후 승하로 거기다 자신의 신병까지 있어 군적 자리를 謝絶하자 '명령에 항거했다' 하여 江東 지금의 평안도 바닷가 변방 지역으로 전 가족이 귀양가게 되었다.
형인 조광익(曺光益)은 그 아우가 귀양가 있는 평안도 도사를 자원하여 아우의 귀양지에서 형제가 서로 만나 시주(詩酒)로써 정회를 풀다가 이내 병을 얻어 객관(客館)에서 별세를 하고 말았다. 강동 사람들이 취원당과 지산 두 형제의 우애와 덕의에 감복(당시 귀양살이는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고 먼 변방 오지에 보내 일정 기간 동안 그곳 사람들을 교화하도록하여 자숙하게 했다)하여 그곳의 흙을 싸가지고 수천 리 길을 걸어 장례에 참배하려고 이곳에 오니, 이미 장례가 끝난지라 싸 들고 온 흙으로 묘 앞에 둔덕을 쌓아 대나무를 심고 갔는데, 후인들이 그 뜻을 기념하여 강동구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헌종 연간에 ‘강동구’비를 세웠다. 근년에 후손들이 강동구를 수축·단장하고 비각도 중수하였다.
■ 오봉서원(五峯書院)
오방리 웃마 서쪽 산기슭에 있다. 오봉이라고 부른 것은 이 서원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있는 함박산, 덕대산, 종남산, 화악산, 화왕산 등 다섯 명산이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오봉서원의 사적에 대해서는 밀양루정록(密陽樓亭錄)에 실려 있다.
■ 함박산(芍藥山)
오방리 마을 뒷산이다. 이 산에 함박꽃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 ‘작약산’이라고도 하는데, 함박꽃이 바로 작약이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운산(雲山)
오방리 동쪽에 있는 산이다. 그 너머 덤밑 동네가 있다. 이 산의 형상이 마치 구름같이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앞분등
오방리 마을을 감싸고 있는 함박산 애기바위 동쪽산 등성이다. 마을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등의 아래쪽에 쌍유등(안산)이 있다.
■ 쌍유등(雙乳嶝)
앞분등의 아래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이 바로 오방동의 안산이다. 이 등이 젖가슴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솔밭등(松田嶝)
절골 우측에 있는 앞분등 위 산등성이이다. 이곳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동네골(洞內谷, 동네앞골)
오방리 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동네 앞에 있다고 해서 동네앞골이라고 부른다. 또 이곳에는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전하나, 그 창건 연대와 폐사 연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 새갓등(新山嶝)
백성골(白姓谷)의 오른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함박산 가운데 절골과 백성골 가운데 능선이다. 이곳에는 초목이 무성하여 땔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삼발등(三發嶝)
광제암의 위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 가는등(細嶝)
절골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등성이가 가늘게 내려 왔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너븐등(廣嶝)
절골(寺谷)의 동쪽에 있는 솔밭등 좌측 산등성이다. 등이 넓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고사리등(고사리밭등)
굴밭등 아래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에는 고사리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일명 고사리밭등이라고 한다.
■ 살맷등
가는등의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 등은 그 형상이 마치 썰매를 닮았다고 하여 썰매등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살맷등으로 변음이 된 것이다.
■ 굴밭등(窟巖嶝, 굴바우등)
오방리 뒷산 정상부 애기바위 밑에 있는 신산등 중간에 있는 산등성이다. 이곳에는 굴바우(窟巖)가 있다고 해서 굴바우등 혹은 굴밭등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굴(窟)이 있고, 또 그 안에는 약샘이 있다. 이 샘물을 마시면 속병이 완치된다고 전해오고 있다. 애기바우는 생긴 모양이 마치 애기를 업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탕건을 쓴 모양 같기도 한데 만약 탕건바위라고 불렀다면 이 마을에 많은 관원이 배출되었을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 무등(茂嶝)
오방리 웃마 뒷동산 윗쪽에 있는 백성골 동쪽 산등성이이다. 이곳에 초목이 무성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큰등
오방리 마을 뒤에서부터 서쪽 인교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함박산 애기바위 서쪽 산등성이다. 이 등의 등성이가 크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 백성골(百姓谷, 백산골)
무등과 갓등의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은 옛날에 평민들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일명 백산골이라고 한다.
■ 홍두깨등
백성골 위쪽에 있는 산등성이로서 그 형상이 홍두깨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갓등(邊嶝)
백성골의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마을에서 가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참나무등
갓등의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로서 참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가매실고개(轎峴)
오방리의 동쪽에 있으며, 신월리 듬밑 마을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가마(乘轎)를 타고 이 고개로 오르내렸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서록(西麓)
취원당 묘소가 있는 오봉서원 뒷산이며 그 위 성터로 나가는 숨박곡 등성이 있다.
@ 유곡(酉谷) 닭실 골짝:초동농공 단지가 있던 골짜기 곧 장등과 성암 뒷산 사이
@ 장등(長嶝) 진등: 오방리 앞 찻길 건너 나란히 야특마하게 초동농공단지까지 뻗은 산
@ 외곡(욋골):성암들 좌측 산 운정, 이대골 아재 및 3대조 묘소가 있는 산
@ 노례산(魯禮山) 水越峴(수월현): 4대조비, 비봉할버지 내외 등 성암에서 반월로 나가는 고개
@ 혈암산(血岩山): 성암부락 뒤산
새로고침 ![]() | |||||||
![]() |
![]() |
![]() |
첫댓글 내가 어릴때 어머니께서 광제암절에 다녔어요. 풀내음이 나는 하얀 무명옷 입고 다녀오시는 어머니 손에는 하얀 백설기 떡 !! 이것먹어면 머리영리해 진다면서 주시는 떡 그렇게도 맛이 있을까......
시골도이젠 많이발전되어 초가집도볼수없고 사진보니 정말옛 생각이많이나는군요 고향에 1년에 한 두번밖에못가는신세라 오방산은 어릴때 소풍코스였는데 이젠 모교도 민속박물관으로 바뀌버렸고 동창들 얼굴도 이젠히미해지네요 좋은자료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