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17세 소년으로 교회에 나가면서 지극한 사랑을 받았답니다.
"저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시고, 사랑으로 보살펴 주신 은혜를 잊을 수 없지요."
김장로님은 이 한 마디로 전도사님을 회고합니다.
그의 부인 이생단 권사님을 만나서 간증을 들었습니다.
도서지방 사람들은 큰 뜻을 세우고 뭍으로 나갑니다. 그들도 목포로 나갔습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세상을 잘 모르고 장사에도 경험이 없어서 금방 바닥을 쳤습니다.
실패자의 모습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믿음이 흔들리고 방황했답니다. 아내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비록 몸은 목포에 있었지만 모교회를 잊지 못했습니다.
'일꾼 없는 우리 교회, 지극한 사랑으로 길러주신 전도사님...' 그런 생각으로
마음은 늘 대둔도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내 고향 대둔도. 본 제단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이 문제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믿음을 회복하고, 고향 교회를 잘 섬기면 큰 복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왔습니다.
내외는 믿음을 소망으로 붙들고 대둔도 도목리로 돌아갔습니다. 교회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일이 금방 잘 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연단은 계속되었습니다. 주일 오후면 바다에 나갔습니다.
물때에 맞추어 고기 그물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고기는 못 잡고 오히려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토요일의 축복도 거두어버린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일은 예배드리고 교회를 섬기라는데,
어찌 욕심을 부리느냐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주일 성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믿음이 성장한 것입니다.
어느 해에는 엄청난 도전을 했습니다. 지금껏 흑산도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는
가두리양식을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바다가 깊고, 풍랑이 심해서 이곳은 안 된다고 포기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남이 하지 않은 고생을 하면서 열심히 하면서 경험이 쌓이고 드디어 성공을 끌어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바다에서 만선의 기적을 체험했던 것처럼
그는 흑산바다 가두리양식장에서 질 좋은 생선을 엄청나게 길러냈습니다.
지금은 교인들과 인근 주민들도 양식업을 해서 질 좋은 생선의 상당량을 출하하고 있습니다.
김장로님은 흑산도어업협동조합장이 되어 어민 소득을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장기실 전도사가 뿌린 복음의 열매, 교인들이 가난했던 섬마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장 전도사는 고향 평안도로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마음은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그 소망이 '흑산면 대둔도 승천교회'라는 길다란 교회 이름에 담았습니다.
1986년 9월, 83세로 소천당할 때는 섬에 들어온지 27년 만이었습니다.
본인 소원대로 예배당과 마들이 내려다보이고,
흑산도 예리항구가 건너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그를 무덤을 썼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