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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이사야(1)/선지자
제목 : 이사야는 누구인가?
성경 : 사 1:1
찬송 : 267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11222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지난주까지 성문서인 아가서 강해를 마치고 오늘부터는 선지서(예언서) 강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선지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입니다. 대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서(5권)입니다. 그리고 소선지서는 호세아부터 말라기(12권)입니다. 무엇 때문에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나눌까요? 그것은 선지자가 위대하고 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선지자가 예언을 기록한 분량을 기준으로 정한 것입니다. 예언의 분량이 많은 성경을 대선지서라 부르고, 분량이 적은 성경을 소선지서라 부릅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사야서는 가장 분량이 방대합니다(1~66장).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거의 50년이 넘도록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면서 예언했던 것을 집대성한 예언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사야서를 읽으면 우리는 이사야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안목이나 정치적 관점이 너무나 광대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들 중에는 주로 시골에서 자라고 시골에서 경험한 것을 배경으로 예언한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모스인데, 아모스는 뽕나무 배양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시골 냄새를 실컷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주로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 그것도 주로 왕궁에서 유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아주 정치적이면서 지적 수준이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사야서는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고 세상을 따라서 멸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 그리고 그 후 축복의 시대까지 방대한 내용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한 사람이 한평생에 걸쳐서 예언한 것이 어떻게 이렇게 논리적으로 일관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 ‘아모스의 아들’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본에서는 아모스서를 남긴 선지자 ‘아모스’와 이사야의 아버지 ‘아모스’가 동일하게 ‘아모스’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서로 다른 철자를 사용합니다. 이사야가 다른 조상들의 이름은 나열하지 않고 간단히 ‘아모스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아마도 그가 매우 유명한 「집안」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빌론 탈무드에 반영된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모스는 아마샤 왕(주전796~767)의 조카, 곧 왕족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사야가 왕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사실을 근거로 한 추측으로 생각됩니다. 오늘날 사실 여부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선지자가 50여 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사역했던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이 책을 출판했을 때쯤에는 예루살렘 종교계에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언제였습니까?
대부분의 선지자들도 책을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저 자신의 사역 시대를 알려주는데, 이사야도 예외는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를 독자들에게 밝히는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들이 선포하는 메시지와 예언을 문맥과 역사를 무시한 채 해석하지 말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해석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도 이 같은 선지자들의 의도를 의식했기 때문에 역사서(여호수아서~열왕기하)를 전(前)선지서, 예언서(이사야서~말라기)를 후(後)선지서라고 부르며 역사서와 예언서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네 명의 왕이 활동하던 시대였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였습니다. 딜레(Thile)의 연대에 따르면 웃시야는 주전 792-740년에, 요담은 주전 750-732년, 아하스는 주전 735-716년, 히스기야는 주전 716-687년에 유다를 통치한 왕들입니다. 만일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은 해(주전 740년)에 사역을 시작했다면(6장 참조), 그는 아마도 50년 동안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이사야서를 해석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이 접했던 네 왕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모두를 지적하는 것은 그의 책의 성격을 암시해줍니다. 이사야서는 선지자가 짧은 시간에 선포했던 메시지를 정리해 놓은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아마도 40~50년)동안 진행된 사역을 통해 선포했던 메시지들 중 일부를 선별해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즉 이사야서는 선집(選集)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이사야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지서들이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선지자의 오랜 사역의 결정체이자 그 사역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했던 시대 네 명의 왕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1)웃시야(주전 792-740년)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6:1). 유다의 웃시야 왕은 획기적인 경제부흥을 일으킨 왕이었습니다(대하26:6~15). 웃시야의 통치는 주전 792년-74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유다는 안정적인 정치를 기반으로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유다가 이 시대에 이처럼 놀라운 성장을 이룬 것은 당시 근동의 슈퍼파워였던 아시리아의 내부적 갈등이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웃시야가 유다를 다스리는 동안 아시리아를 지배했던 앗수를 왕들(살만에셀, 아슐단, 아술니라리)은 매우 약한 리더십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기근, 반역 등이 끊이지 않으므로 아시리아는 국제무대로 눈 돌린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같은 상황이 웃시야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었던 것입니다.
웃시야는 경제적 부흥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엘랏이라는 항구를 새로이 개발했으며(왕하14:22), 농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대하26:10). 이스라엘의 경제가 부흥하자 웃시야는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들을 수리했고(대하26:90), 30만 명 이상의 훈련된 정예군을 두었습니다(대하26:13). 또 온갖 새 무기도 만들었습니다. 웃시야는 국제무대에서도 유다의 입지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블레셋, 마온 사람들, 아랍 사람들, 암몬 지역 등을 쳐서 복종시켰습니다(대하 26:6-8).
웃시야가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대하 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형통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말년에 나병이 벌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가 왜 나병이 걸렸을까요? 제사장 역할을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분수와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제사장의 사역을 하겠다고 고집 부리자 이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2)요담(주전750-732)
요담은 나병을 앓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왕입니다. 나중에는 그의 아들 아하스와 같이 통치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요담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그러나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타락한 나라를 물려받았습니다. 요담은 이렇다 할 획기적인 종교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되어 가는 유다의 영성을 방관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성전에 들어가서 나병에 걸린 뒤에 요담은 성전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왕이 된 것입니다.
3)아하스(주전 735-716년)
요담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하스는 종교적으로 매우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대하 28: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대하 28:2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대하 28:3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대하 28:4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대하 28:5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대하 28:6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대하 28:7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과 총리대신 엘가나를 죽였더라
아하스는 또한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자신의 정치적인 능력과 활동에 나라의 운명을 맡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시리아(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주전 738년부터 가나안 국가 대부분에게 씌워진 앗수르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독립국이 되자는 계획에 동조할 것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친 앗수르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의 종속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음모에 동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시리아)과 이스라엘은 아하스를 몰아내고 그의 자리에 다른 인물을 세우려고 유다를 침략한 것입니다. 이에 아하스는 무척 두려워했습니다(7장). 선지자 이사야가 그를 찾아가 두려워 말라고 권면했지만 그는 선지자와 그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앗수르의 왕 디글랏에게 사신과 돈을 보내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대하 28:16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 주기를 구하였으니
디글랏이 그를 도와(왕하16:7) 다메섹을 파괴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에게는 엄청난 벌금을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욕심 많은 디글랏은 아하스와 유다 마저 속국으로 삼아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습니다.
대하 28:20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대하 28:21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훗날 북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자 디글랏의 아들 살만에셀이 주전 725년에 북왕국을 점령하고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사마리아가 포위된 상황에서 살만에셀이 죽고 그의 아들 사르곤이 대를 이었으며, 그는 주전 722년에 사마리아를 완전히 초토화시켰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포로로 앗수르에 끌려갔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이 앗수르의 진노를 피해 남왕국 유다로 피난해 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는지 이때 유대의 인구가 상당히 늘어났다고 합니다.
4)히스기야(주전 716-687년)
이사야서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유다 왕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으며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이사야를 찾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 믿음의 모범이 되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추진했습니다(왕하18:4, 22). 망해버린 북 왕국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초대하여 성대하게 지킨 유월절(대하 30장) 행사는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이 들고 앗수르의 침공을 받았을 때 이사야가 놀라운 기도를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사야는 히브리어로는 “예사야후”인데 그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이사야는 주전 740년에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습니다(6장). 그는 결혼했고(8:3절 참조), 최소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여 선지자”(우리말 성경에는 아내로 번역)로 불렸습니다(8:3). 첫째 아들은 “스알야숩”(남은 자는 돌아오리라)이고, 둘째는 “마헬살랄하스바스”(먹이가 급히 사라진다, 노획물이 빨리 없어진다)입니다.
이사야는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므낫세 왕 초기에 왕에 의해서 톱으로 두 동강이가 나 순교했다고 합니다. 위경에 이사야의 승천기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 역시 므낫세가 이사야를 죽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왜 순교를 당했을까요?
히스기야가 나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결코 아버지 같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 반역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자 왕위에 오른 어린 므낫세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사야와 몇몇 선지자들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거짓 선지자 벨키라가 이사야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므낫세는 부하들에게 그를 잡아들이라 했습니다. 므낫세의 부하들로부터 도주하던 이사야는 길가에 거목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거목의 가운데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그 거목 안으로 몸을 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목의 껍질이 자라나 이사야를 숨겨준 것입니다.
부하들이 왕에게 돌아가서 이사야가 거목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므낫세는 그 거목을 통째로 잘라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부하들이 그 나무를 잘라왔으며, 므낫세는 이사야가 들어 있는 부분을 찾아 가운데를 자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사야는 므낫세의 종들이 휘두르던 톱에 의하여 두 동강이 나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일까요?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가 혹시 이사야가 아닐까요? 오늘날까지 알려진 유대인들의 전승 중에서 톱에 잘려 순교한 것으로 기록된 사람으로는 이사야가 유일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사야의 순교를 염두에 두고 이같이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사야서의 구조를 간단하게 생각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사야서를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39장, 우상 숭배에 빠진 유다가 망할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제1 이사야서라 부릅니다. 이 부분 후반부(36~39장)는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40~66장을 제2 이사야서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이 뒷부분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망한 유다를 회복시켜서 돌아오게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사야 끝 부분인 55~66장까지 다시 분리해서 제3 이사야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자들이 제 2 이사야서를 이사야가 쓰지 않고 후대의 다른 사람이 썼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사야 45장에 유다 백성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할 때 ‘내 종 고레스를 시켜서 하겠다.’고 했는데 이때는 고레스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태어나지 않은 사람도 그 이름을 정해서 예언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가 바로 요시야 왕이 태어나서 종교개혁을 이룰 것을 수백년 전에 예언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앞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로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돌려보낼 것을 알려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읽으며 놀라게 되는 것은 장차 태어나실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메시아가 오셨을 때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사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특히 이사야서에는 네 번에 걸쳐서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종이 왜 고난을 받는 종으로 오셔야 했는지 선지자에게는 큰 미스터리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나 다른 사도들도 이사야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누구도 이사야서를 이사야 외에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20세기에 와서 어떤 양치는 목동에 의해서 사해 언덕 한 동굴에서 많은 두루마리 책들을 발견했는데, 그중에서 거의 완벽한 형태의 이사야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해 사본을 통해서 학자들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 성경이 얼마나 완벽하게 보존되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의 메시지는 격동하는 시대에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얼마나 중요한 교훈을 주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자신이나 우리나라 위정자들이 이사야서를 다시 경청할 수 있다면, 현재의 위기에서도 얼마든지 나라를 지키고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