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95. 이덕일의 실언,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이 재야의 궤변“ 주장에 낙랑군과 그 속현 및 대방은 모두 고구려 서쪽국경 수양제 침략경로에 있었다
***한국사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기술은 매우 잘못되어 있다. 사기와 진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은 중국의 북부지방인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까지 통치한 거대왕국이었다. 춘추전국시대 6국의 하나인 연나라는 강대국 고조선에 진개를 인질로 보냈다. 고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던 진개가 연나라로 돌아가 군대를 일으켜 고조선을 침략하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를 빼앗고 그곳에 연장성을 쌓아 고조선과 경계를 삼았고, 진시황은 이 연장성을 연결하여 지금의 진황도시 갈석산에서 북경의 팔달령을 이어 서역으로 뻗어나간 만리장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추모왕(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비류수 지역도 압록강 중류의 비류수가 아니라 요서지방의 비류수이다.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서 후한과 상곡, 어양, 우북평 지역에서 싸워 이겼고, 요서 10성을 쌓았는데, 이는 고구려가 요서지방에 세워졌음을 분명히 밝힌다. 태조대왕이 압록강부근에 요서10성을 쌓은 것이 아니다.
이병도는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고, 만리장성이 황해도 수안까지 뻗어 있었고, 황해도와 경기도가 대방이었다고 논문을 발표하였지만, 삼국사기 영양왕조의 수양제 침략견로에 보면 대방군의 모든 지역과 낙랑군에 속한 대부분 지역이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어서 한사군과 후의 낙앙군 및 대방은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밖에도 수없는 잘못된 기록이 있어서 필자는 이같은 한국사학자들의 잘못된 기술을 바로잡고자 이 글을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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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xx닉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246) 조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현도를 침범해서 낙랑으로 퇴각했다“가 아니고
”동천왕 20년(246) 가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만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나와 침입하였다....(중략)....마침내 나라(樂浪, 고구려를 말함)에서 물러갔다“이다.
고구려 11대 동천왕 20년 추팔월에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군대 일만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출발하여 내침하였다. 동천왕이 보병과 기병 2만명으로 비류수(沸流水)에서 역습하자 위군이 패했으며, 위군 삼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二十年 秋八月 魏遣 幽州刺史 毌丘儉 將萬人 出玄菟 來侵 王 將步騎 二萬人 逆戰於 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중략)....
”유유가 음식 그릇에 칼을 숨기고 적장에게 나아가 칼을 빼어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찔러 살해하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이 혼란에 빠지고 그 틈을 타서 고구려 동천왕이 군사를 3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나라 군사들이 큰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스스로 낙랑(樂浪)으로 퇴각하였다.(紐由 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三軍 爲三道 急擊之 魏軍 擾亂 不能陣 遂自 樂浪而退)“란 삼국사기(三國史記) 기사의 인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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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묻는다. 팔공산이란 자가 말한 낙랑(樂浪)이 고구려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팔공산은 관구검이 낙랑으로 물러갔다고 해야 하는 것을 굳이 남을 속이는 말로 낙랑이 고구려이고 낙랑(고구려)에서 물러갔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팔공산이란 자는 손톱만큼의 양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남들을 속이려 드는 사람이다.
○현도를 압록강 중.상류라고 주장한 - 이병도와 그 추종의 무리들
- 이병도는 현도를 압록강 중.상류라고 하였고, 이병도를 추종하는 - 무리들은 지금도 현도를 압록강 중.상류라고 책자에 버젓이 그려놓고 있다. 그런데 관구검이란 자가 고구려 11대 동천왕 때 압록강 중.상류에 있는 현도를 출발해서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 고구려가 있을 자리에 현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즙안을 통과해서 압록강 중류에서 합쳐지는 비류수(沸流水)에서 고구려와 싸웠다는 것도 -들이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리하여 -들은 현도가 압록강 중.상류에서 무순(撫順)으로 옮겨갔다는 해괴한 논리를 조작해서 또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현도(玄菟)는 지금의 진황도시(秦皇島市) 남쪽을 흐르고 있는 난하(灤河)를 건너 바로 현도가 있었으므로 지금의 진황도시 부근이 바로 현도이었다.
고구려 보장왕조를 보면,
보장왕 4년(AD 645년) 1월 이세적군이 유주(幽州: )에 이르렀고, 3월에는 당태종이 정주(定州: 河北)에 이르렀으며, 이세적군이 유성(柳城: 지금의 熱河)를 출발하였다.(寶藏王 四年 春正月 至幽州 三月帝至定州....李世勣軍 發柳城)
또 여름 사월에는이세적이 스스로 통정(通定)에서 요수(遼水: 지금의 灤河)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고구려의 성읍 주민들이 크게 놀라 성문을 닫고 수비에 들어갔다.....오월에 이세적이 나아가 요동성 아래에 이르렀다(夏四月 世勣自通定 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五月李世勣 至遼東城下)
당나라 이세적이 요수(遼水: 지금의 灤河)를 건너 바로 고구려와 싸운 땅이 현도이었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서 출발한 지점도 바로 지금의 난하 부근에 위치해 있던 현도이며, 물러간 곳 낙랑(樂浪)은 -들이 말하는 평양이 아니다.
더군다나 낙랑이 평양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손톱만큼 양심을 보이려고 낙랑(樂浪)이 “나라”라느니, 또는 낙랑이 “고구려”라느니 하는 해괴한 조작을 해서 남들을 또 속이려 드는 팔공산닉은 아마도 손톱만큼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진다.
***참고: 낙랑과 대방에 속했던 각 현은 한반도에 있지 않고, 수양제가 고구려 평양을 공격하기 위한 침략루트에 80% 이상이 들어있다. 이는 침략루트에 기록되지 않은 속현들도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지역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앞으로 한국사학계는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표시된 지명에 대한 정확한 위치만 확인해 보더라도 낙랑군이나 대방군은 한반도에 있지 않고 대륙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수양제는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위와같은 기록을 보면 낙랑, 현도, 임둔, 옥저, 대방, 동이가 모두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수양제가 113만 3800명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때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玄菟道)로 나오고, 우어위장근 장근은 양평도로 나오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도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 모두 압록수(鴨淥水) 서쪽에 모였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낙랑과 대방에 속한 여러 속현들이 거의 대부분80% 이상 수양제의 좌12군, 우12군 및 친위 6군에 기록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사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이같은 분명한 기록을 외면한 채 한반도 내 한사군이 있었다는 이병독 같은 놈의 주장을 추종해선 안된다. 반드시 한사군 대륙존치설로 바꾸어야 한다.
***첨고: 대방은 수양제 우12군의 11번째 침략경로에 있어서 이병도란 자가나 이병도란 자를 추종하는 사이비사학자들이 말하는 황해도가 아니라, 고구려 서쪽 국경지대의 수양제 고구려 침략경로 우12군 11번째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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