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오타와 소재 칼튼대 티모시 피첼 교수는 한마디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타협해 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영국 치펜햄에서 오피스 매니저로 일하는 벤 록우드(39)에게도 익숙한 얘기다. 그는 게으른 사람이 아닌데도 직장에서나 일상 생활에서 미루는 습관 때문에 애를 먹곤 한다. 모든 걸 잘하고 싶은 열망이 너무 크다 보니 시작하기 전부터 불안감이 엄습한다.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데 헬스클럽에 가는 식이다. 학자들은 이를 “도덕적 보상(moral compensation)”이라 부른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대신 기분이 좋아지거나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는 심리다.
록우드는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자기 자신이 싫어진다고 토로한다.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이라는 걸 고백하느니 차라리 은행을 털었다고 말하겠다.”
만성적 미루기는 종종 미루는 이유와 미루는 행동이 지니는 의미를 오해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할 일을 미루는 것이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믿는데, 연구에 의하면 만성적 미루기는 완벽주의와는 연관이 없다. 오히려 즉각적인 욕구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하는 충동성(impulsiveness)과 연관이 있다고 피어스 스틸 캘거리대 조직행동학 교수는 말한다.
사람들은 불안감이 할 일을 시작하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충동성이 낮은 사람은 불안감이 일에 착수하게 만드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 반면 충동성이 높은 사람은 불안감을 느낄 때 무기력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강한 감정에 대처하길 힘들어하며 나쁜 기분을 없애기 위해 뭔가 다른 것을 하고자 한다.
어떤 이들은 막판까지 할 일을 미루는 이유가 스트레스 상황에서 일을 더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둘러대지만, 사실 만성적 미루기 환자들은 일이 지연되는 자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실제로 일찌감치 할 일을 시작했을 때보다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전문가들은 만성적 혹은 극단적 미루기로 인한 결과는 심각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결혼이 파탄나기도 하고 일자리를 잃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사기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퍼시아 시로이스 잉글랜드 셰필드대 교수는 만성질환 극복에 있어 미루기가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미루기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습관적 미루기 환자는 우울증과 불안감이 높고 웰빙 수준이 낮다.
하지만 미루기가 육체건강에 미치는 영향, 특히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야기한다는 데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시로이스 교수팀은 고혈압과 심장병이 있는 미루기 환자들이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자신의 질병을 극복하려 하기 보다 현실을 회피하려 하고 자신을 탓하거나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으려 하는 등 부적응 행동을 취한다.
또한 미루기 환자들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야기할 결과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일시적 근시안(temporal myopia)” 상태를 보인다. 미래의 자신에 대한 비전이 더 추상적이고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으며, 정서적 연결성(친밀감)도 덜 했다. 일시적 근시안은 높은 스트레스가 원인일지 모른다. 그래서 먼 미래의 걱정거리보다 일단 눈앞의 일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시로이스 교수는 “정상인들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미래에 혜택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미루기 환자들은 그런 식으로 미래를 그리는 것에 능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피첼 교수팀은 미루기 환자들이 미래를 상상하고 미래의 자신과 정서적 연결성을 강화하도록 개입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미루기 환자를 치료함에 있어서 시간관리 능력을 개선하는데만 치중한다면 문제를 100% 해결할 수 없다. 정서조절 부분도 반드시 다뤄져야 한다.
시로이스 교수와 피첼 교수는 반(反)미루기 전략의 일환으로 단기적 기분 회복에도 초점을 맞췄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사람들이 불안감 같은 강한 감정을 스스로 인식하도록 하되 그것을 판단하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면서 일단 일을 시작하도록 한다.
스톡홀름대 연구진은 중증 미루기 환자들에게 자가 도움 치료가 효과가 있는지를 시험했다. 자기계발서나 실험적 연구가 많이 나와있긴 하지만, 치료자의 개입이 인터넷을 통해서와 같이 광범위하게 실시될 수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피실험자 150명은 자칭 중증 미루기 환자들로, 스스로 혹은 테라피스트의 도움을 받아 치료(개입)를 완수하도록 무작위로 배정되거나 무처치/대기(wait-list) 대조군에 배정됐다. 치료 기간은 10주였다.
치료의 하나는 장기 목표치를 자잘하게 나눠 달성하기 쉽게 만드는 등 목표 세우기에 역점을 둔 것이었다. 일례로 다음주 화요일까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기보다 오전 11시부터 한시간 동안 보고서를 작성한다와 같이 구체적이고 보다 실현가능한 작은 목표를 세운다.
보상도 빼놓지 않았다. 작은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피실험자들은 커피 한잔이나 휴식 같은 긍정적인 보상을 스스로에게 한다.
미루기 환자들을 스트레스 감정이나 생각에 노출시키되 처음엔 시간을 짧게 하고 점차 늘려 나간다. 자신의 감정에 끌려가기 보다 그것을 다스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우기 위함이다.
실험 결과 테라피스트의 도움을 받았든 안 받았든 미루기 습관이 개선되는 걸 알 수 있었다. 연구진은 1년이 되는 올해 말 이같은 결과가 유지됐는지 살펴볼 계획이다.
연구진은 그룹 치료 혹은 인터넷 기반 인지행동 치료를 받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여기서는 학교 성적과 알코올 및 약물 사용 등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조사할 생각이다.
영국에 거주하는 만성적 미루기 환자 록우드는 나름의 전략을 고안해 냈다. 제때에 공과금을 내지 않을 경우 체납 수수료를 내야 하는 만큼, 지금까지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가계수표를 우편함에 넣지 않다는 핑계를 대지 않기 위해 집에 우표와 편지봉투를 넉넉히 사두고 인터넷 결제 시스템도 구축해 놓았다.
록우드는 공과금 납부만이 아닌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미루기 습관을 없앨 수 있길 바란다. 그가 어떤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회사에 휴가신청 내길 꺼리는 바람에 휴가계획도 항상 여자친구가 세워야 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여행계획하기를 좋아한다. 언젠가는 자기가 여행계획을 세워 여자친구를 놀래켜 주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피첼 교수는 “어쩌다 한번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이라면 부정적인 감정(기분)을 떨쳐버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되지만, 만성적 미루기 환자라면 치료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보다 잘 이해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목표를 잘게 나눠서 작은 성과로 부터 자신감을 단계적으로 쌓아가는 것과 보상적 휴식은 일반적인 내용 같지만
미루는 습관이 고착되면 이런 사람들을 '환자'로 취급하는 걸 보니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또 심각한 사람도 많은 것 같네요.
도움이 되셨으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