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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治皇帝 出家詩 (순치황제 출가시)
순치 황제는 중국에 실재한 역사적 인물이다. 황제 전생에 인도의 수도승으로 있었는데 그 나라 임금님의 폭정에 백성들이 시달리자, 수행(선정) 가운데 잠깐 생각하기를 '나 자신이 왕이었다면 백성을 위하여 왕도로서 정치를 할 것이거늘,' 하고 찰나 생각을 한 인과로 중국의 제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황제 자리를 버리고 출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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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절에 노스님 한분이 계셨다. 덕이 높고 수행이 깊은 노스님은 여간해 아프시지도 않고 대중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살아 가셨다. 어느 날 짖궂은 손자 상좌들이
"노스님 언제 옷 벗으실 겁니까?"하고 여쭸다. 언제 돌아가실 것이냐 물은 것이다. 그 때 스님은 "뒷산 바위가 무너지는 때에 옷을 벗으마"하셨다.
하루는 상좌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 하시고 사람 얼굴을 그린 후에 눈동자는 남겨두며 하시는 말씀이 "사십년 후에 이 그림을 걸개로 하여 중원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기 영 찾으시오.' 하고 소리를 치고 다니면 내가 나타나 눈동자를 그려줄 것이라"고 하시고는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단정히 하고 좌탈 입망(앉아서 돌아가심)하시니 갑자기 뒷산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사십년 후에 청나라에는 제 3대 순치(順治) 황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18년동안 마상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여 중원 천하를 통일하여 베이징(북경)에 도읍을 정하고 자금성에 앉아 있는데 성밖에서 문득 “자기 영(靈 ) 찾으시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에 이끌린 듯 소리 나는 곳을 보니 어느 스님이 걸개그림을 들고 있는데 눈이 없어 황제가 붓을 들어 눈동자를 그려주었다.
그 스님은 “사십년 만에 스승님을 뵙습니다.” 하면서 큰 절을 올리고 연유를 말하니 순치는 홀연히 자신의 전생을 깨달았다. 그 길로 곤룡포를 벗어 던지고 산으로 들어가 출가하며 시를 지으니 그것이 유명한 순치황제 출가시(順治皇帝出家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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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이 총림(叢林)이요, 쌓인 것이 밥이어니 대장부 어데 간들 밥 세 그릇 걱정하랴 !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을 아지 마소. 가사옷(僧服法衣) 얻어 입기 무엇보다 어려워라. 이내몸 중원천하(中原天下) 임금 노릇 하건마는, 나라와 백성걱정 마음 더욱 시끄러워 인간의 백년살이 삼만 육천 날이란 것 풍진 떠난 명산대찰 한나절에 미칠 손가. 당초에 부질없는 한 순간의 잘못으로 가사장삼 벗어 치고 곤룡포(袞龍袍)를 감게 됐네. 이 몸을 알고 보면 서천축(西天竺) 스님인데 무엇을 반연하여 제왕가(帝王家)에 떨어졌나 ?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뉘이런가 자라나 사람노릇 잠깐동안 내라더니 눈 한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뉘이런가 백년의 세상일은 하룻밤의 꿈속이요 만 리의 이 강산은 한판 노름 바둑이라 대우씨(大禹氏) 九州 긋고 탕임금은 걸(桀)을 치며 진시황 六국먹자 한태조(漢太祖)가 새터닦네.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났으니 자손들을 위한다고 말 소노릇 그만하소 수천 년 역사 위에 많고 적은 영웅들아 푸른 산 저문 날에 한줌 흙이 되단 말가 올적엔 기쁘다고 갈 적엔 슬프다고 속없이 인간에 와 한바퀴를 돌단 말가 애당초 오잖으면 갈 길조차 없으리니 기쁨이 없었는데 슬픔인들 있을 손가 나날이 한가로움 내 스스로 알 것이라 이 풍진 세상 속에 온갖 고통 여일세라 입으로 맛들임은 시원한 선열미(禪悅味)요, 몸위에 입은 것은 누더기 한 벌 원이로다 오호(五湖)와 사해(四海)에서 자유로운 손님 되어 부처님 도량 안에 마음대로 노닐세라. 세속을 떠나는 일, 하기 쉽다 말을 마소 숙세(宿世)에 쌓아놓은 선근(善根)없이 아니되네. 十八년 지내간 일, 자유라곤 없었노라. 강산을 뺏으려고 몇 번이나 싸웠더냐 내 이제 손을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만 가지 근심 걱정, 내 아랑곳 할 것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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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출가재일을 맞이하여 출가수행의 의미와 대자유인이 되는 것에 대하여 순치황제 출가시를 보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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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