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遊 1-5 큰 앎(大知)은
생각의 한계를 벗어난 무한한 세계이다.
湯之問棘也是已 湯問棘曰 上下四方有極乎
棘曰 無極之外 復無極也 窮髮之北有冥海者
天池也
有魚焉 其廣數千里 未有知其修者 其名爲鯤
有鳥焉 其名爲鵬 背若太山 翼若垂天之雲
搏扶搖羊角而上者九萬里 絶雲氣 負靑天
然後圖南 且適南冥也 斥鴳笑之曰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翶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而彼且奚適也
此小大之辯也.
飜譯
탕임금이 현자인 극에게 물어서
들은 것도 이와 같다. 탕임금이 현자인 극에게 물었다. “위아래
사방 온 세상에 그 끝이 있는가?”
현자 극이 대답했다. “끝이 없는 곳의 바깥에는 다시 끝이 없을 뿐입니다. 초목이 나지
않는 불모지 북쪽에 어두운 바다가 있는데 그 이름이 하늘의 연못(天池)라고
합니다.
그곳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크기가 수천 리나 되지만 그 크기를 아는 자는 없습니다. 그 물고기의 이름은 곤(鯤)이라 합니다.
그곳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이
붕(鵬)입니다. 鵬의
등은 태산과 같고, 날개를 펼치면 하늘의 구름을 가릴 정도입니다.
鵬은 회오리바람을 타고 양의
뿔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구만 리 높이까지 날아올라가 구름의 기운을 끊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그런
다음에 남쪽으로 가려는데 그것은 남쪽 바다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가의 메추라기가 그것을
보고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 鵬새는 저렇게 하여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힘껏 날아올라야 몇 길 지나지 않아 곧 아래로 내려와서,
쑥대밭 사이를 빙빙 돌 뿐이다. 이것이 내가 날 수 있는 한계인데, 저 鵬새는 저렇게 하여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紬繹
세 번째 반복되는 鵬이라는
새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鵬이라는 새의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이 모두 다르다. 첫 번째는 莊子가 직접 말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제해(齊諧)라는 이야기꾼이 말한 것이고,
여기 세 번째는 극(棘)이라는 현인(賢人)을 통하여 말한 이야기이다. 같은
이야기를 각기 다른 사람을 통하여 반복하는 것은 이 鵬이라는 새의 이야기가 실제성과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말하는 사람의 생각의 깊이에 따라 이야기의 스케일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점이다.
莊子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 무한히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莊子가 허구(虛構)의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를 허무맹랑한 허구(虛構)의
이야기로 단정짓지 않는 이유는 실제로 인간에게는 생각으로 지어낸 空想과 妄想이 아니라 인간의 네 번째 신체인 멘탈체(mental body)에서 얻어지는 환력(幻力)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때 꾸는 꿈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 꿈은 바로 멘탈체(mental body)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꿈에 불과한 것이지만, 만약에 우리가 꾸는 꿈을 생생하게 의식한다면 그것은 바로 환력(幻力)이 된다. 꿈과 환력(幻力)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자각몽(自覺夢)이다. 자각몽은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고, 꿈의 내용을 생생히 의식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그 꿈은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머리 속에 그려지는 꿈이라는 이미지를 내가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 자각몽은 우리 자신이 자각몽을 꾼다고 해서 꾸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환력(幻力)은 우리 자신을
언제든지 환상(幻想)의 상태에 있게 할 수 있는 멘탈체(mental body)에서의 인간의 능력이다. 이러한 인간의 멘탈체(mental body)에서의 능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한 아라비아인이 7백년 묵은 세계 지도를 갖고 있는데 이 지도는 세계 전체를 공중에서 내려다 본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땅 위에서 이런 지도를 그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 지도에 대해서는 오직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할 뿐이다. 7백년 전에 이미 비행기가 있었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네 번째 신체를 이용해 그런 고도까지 올라가서 지도를 그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다는 것. 그런데
이 지도는 7백년 전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다른 예는 들어보자. 고대의 명의인 차라크(Charak)와 수쉬루트(Sushrut)를 연구해 보면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과학자들이 인체를 해부해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을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런 것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두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하나는
수술이 행해진 증거도 남지 않을 만큼 교묘한 수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수술 기구나 책이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체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해 놓았다. 이 고대의 의사들은 너무나 미세해서 과학이 오랜 후에야 발견한 부분들, 25년
전만 해도 과학자들이 그 실재를 부인했던 부분들까지 설명해 놓고 있다. 고대의 의사들이 이것을 알게
된 두 번째 가능성은 어떤 사람이 사이킥(psychic) 상태에서 인간의 육체 안으로 들어가 이런 부분들을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엑스레이(X-ray)가
인체를 뚫고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백 년 전에 인체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네 번째 신체에 도달한 사람의 눈은 X선보다 더 깊은 곳을 볼 수 있고 해부를 해보고 만든 것보다 더 완벽한 인체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멘탈체(mental body)에서 보여주는 능력은 이같이
놀라운 것이다.
莊子가 그러한 능력을 가졌다고
보는 이유는 그의 글 전반에 걸쳐 인간의 다섯 번째 신체인 靈體(spiritual body)에 도달하지
못하면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 아주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다섯 번째 신체인 靈體(spiritual body)에 도달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데, 莊子보다 앞선 老子와 列子가 그런 경지에
이르렀고, 같은 시대의 인도에는 붓다가 바로 그런 경지에 이르렀고, 그보다 600년후에는 이스라엘의 예수가 바로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세계인구 1억명 중에 한 명 정도 꼴이라고 한다. 라즈니쉬 오쇼, 에크하르트 톨레, 크리슈나 무르티,
스리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라마나 마하라쉬 등이 그런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의 책은 지금 서점에 가면 아주 많이 있다.
莊子는 鵬이라는 새를 통하여
표현한 무한의 세계를 비교하기 위하여 앞에서는 매미와 산까치와 비교를 했고, 이 이야기에서는 메추라기와
비교를 하고 있다. 鵬이라는 새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한한 세계이고,
매미와 산까치 그리고 메추라기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한한 세계이다. 莊子가 말하는 ‘이것이 바로 큰 앎(大知)과
작은 앎(小知)의 차이이다.’에서
앎(知)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배워서 익히면 얻을 수 있는
지식(知識)이 아니다. 작은
앎(小知)은 생각의 한계에 갇혀있는 유한한 세계이고, 큰 앎(大知)은 생각의
한계를 벗어난 무한한 세계이다. 우리는 지금 작은 앎(小知)이라는 생각의 한계에 갇혀있는 유한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생각의
한계를 깨부수면 우리는 바로 큰 앎(大知)의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마음이라는 관념이 없는 생각의 한계가 없는 무한한 세계! 그 세계에는 평온(平穩)과
어울림(和合, 平和) 그리고
사랑과 지복(至福)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러한 삶을 완전한 自由 또는 완전한 삶이라고 부른다.
우리를 그러한 삶으로 이끌어주고
있는 莊子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이니 莊子를
따라 그런 유토피아에서 마음껏 놀아보자(逍遙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