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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氏(백씨)의 始祖(시조) 松溪公(송계공) 白氏(백씨) 始祖(시조) 松溪公(송계공)은 諱(휘)는 宇經(우경)이고 字(자)는 擎天(경천)이며 諡(시)는 文景公(문경공)이시고 松溪(송계)는 號(호) 이시다 公(공)은 원래 唐(당) 蘇州人(소주인)으로 인품이 고결하고 학문이 뛰어나서 唐朝(당조)에 僉議使 (첨의사).吏部尙書(이부상서)에 이르렀으나 간신 杜以奇(두이기) 裵玄墨(배현묵)등의 謀陷(모함)을 당하자 스스로 당을 떠나 東渡(동도)入新羅(입신라) 하셨으니 때는 新羅 宣德王(신라선덕왕) 원년 唐(당)의 德宗(덕종)원년, 西紀 七百八十年(서기 칠백팔십년) 庚申年(경신년) 이었다. 永樂譜 序文(영락보 서문)에 의하면. 始祖(시조) 松溪公(송계공)의 新羅朝 (신라조)에 있어서의 官職(관직)에 관하여는 李朝 世宗朝 (이조 세종조)의 名臣(명신) 黃公喜(황공희)가 지은 영락보 서문에 位至大相(위지대상)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己亥 大同譜(기해대동보) 의 遠系篇(원계편)과 始祖 松溪公(시조 송계공)의 望壇碑(망단비)에 신라의 벼슬이 左僕射司空大司徒(좌복사사공대사도)에 이르럿다고 기록 되어있다. 公(공) 께서는 鷄林 紫玉山下(계림 자옥산하)에 迎月堂 萬歲菴 (영월당 만세암)을 지으시고 거처로 삼으시니 선덕왕께서 친히 왕림하시어 암자의 名을 淨惠寺(정혜사)라 개명하시고 御筆(어필)로 영월당의 현판에 景春(경춘)이라 쓰시고 四韻詩(사운시)를 지으심에 이를 각자하여 걸었다고 한다. 唐(당)의 황제가 누차 불렀으나 公께서는 끝내 이에 應(응)하지 않으시고 영월당 에서 後學(후학)들의 敎學(교학)에 전념 하시다가 享年七十三歲(향년칠십삼세)에 逝去(서거)하시니 公의 墓(묘)는 경주시 안강읍 玉山南麓(옥산남록)에 있으며 時享(시향)일은 매년 五月(오월) 첫째주 일요일에 墓下(묘하) 迎月堂 齋室(영월당재실)에서 모신다,...
제 2장! 白氏의 貫鄕 (백씨의 관향) 한 姓族(성족)을 象徵(상징)하는 地名(지명)을 貫鄕(관향) 이라고 하며 本(본)또는 本貫(본관)이라고 도 한다. 始祖(시조) 또는 中始祖(중시조)의 고향이나 그 성족과의 깊은 연고지를 관향으로삼는 것이 通例(통례)이므로 관향은 姓(성)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甲子(갑자) 대동보 발간당시 各派(각파)의 代表(대표)들이 회합하여 白氏(백씨)의貫鄕(관향)을 水原(수원)으로 단일화하기로 合議(합의)를 함으로써 오늘날 吾宗(오종)의 대부분은 수원을 관향으로 하고있다. 그러나 保寧(보령)의 彛齋公派(이제공파)후손들은 藍浦(남포)로 貫鄕(관향)하고있으며 大興(대흥), 淸道(청도), 扶餘(부여), 林川(임천), 泰仁(태인)등을 관향으로 삼고있는 종파가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己亥 大同譜 序文「貫鄕」(기해 대동보 서문「관향」) 에서 인용) 吾宗(오종)이 언제부터 수원을 관향으로 삼았는지는 문헌상 명확하지 않으나 永樂譜 序文(영락보 서문)에 의하면 朝鮮王朝(조선왕조)의 世宗代(세종대)에 이미 隋城白氏(수성백씨)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世宗朝(세종조)에 현재의 水原(수원)을 隋城(수성) 이라 하였다. 역사적으로 수원은 白氏(백씨)의 관향으로 삼기에 충분할 정도로 吾白(오백)과 깊은 연고가 있는 지방이다. 中始祖(중시조) 中郞將公(중랑장공) 昌稷(창직)의 曾孫(증손) 進士公(진사공) 揮(휘)께서 高麗(고려)의 穆宗朝(목종조) (서기 987年~1009年)에 大司馬大將軍(대사마대장군)으로 水原君(수원군)에 봉해져 수원 지방을 封地(봉지)로 받으셨다 하며 또 中郞將公 (중랑장공)의 八世孫(팔세손)인 政堂文學公 天藏(정당문학공 천장)께서 원 나라에서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吏部尙書(이부상서)의 벼슬을 지내시고 高麗朝(고려조) 忠宣王(충선왕)(서기 1309年~1314年)의 부르심을 받고 歸國(귀국) 하시니 忠宣王(충선왕)은 公(공)을 水原伯(수원백)으로 封(봉) 하였다한다. 이와같이 水原(수원)은 進士公(진사공)(諱. 揮)(휘. 휘), 政堂文學公(정당문학공)(天 藏) (천 장) 과의 깊은 연고지 이므로 水原(수원)을 白氏(백씨)의 貫鄕(관향)으로 삼았다고 봄이 가장 무리없는 역사적 추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水原(수원)은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와 화성군일대를 말한다. (지명에 얽힌유래 중략)
우리 白氏(백씨)는 모두 松溪公(송계공) 의 후손들이다 白氏(백씨)의 大同團結(대동단결)을 圖謀(도모)하려면 白氏(백씨)의 관향을 水原(수원)으로 통일 하는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전국의 대다수 일가들의 지배적인 의견 이기도하다. 그러나 관향을 달리해도 우리白氏(백씨)는 한 할아버지의 자손 이므로 관향을 불문에 붙이고 몇 차례 白氏 大同譜(백씨 대동보)로 발간했다가 丁丑 大同譜(정축 대동보)를 편찬하면서 먼 훗날 자손들을 위해 이번만은 관향을 통일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대동보 편찬위원회는 이 열화 같은 주장을 외면 할수 없어 전후 십여 차례에 걸쳐 各 系派(각 계파) 대표자 회의를 소집했다. 일가들은 회의 때마다 열 띈 토론을 거듭하여 관향 통일에 대한 當爲性 (당위성)을 추구했다. 이 토론에서 원계에 속하는 尙(상)선조가 이미 漢州太守(한주태수)(한주는 예전에 수원 지방을 일컫는 지명) 를 지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같은 원계의 文元公 永(문원공 영)이 漢南 慰禮城(한남 위례성)에 살았으며 牛岑太守(우잠태수) 벼슬을 지내면서 浿江(패강)삼백리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고증자료로 제시됐다. 이밖의 여러가지 고증자료를 종합한 결과 우리 白氏(백씨) 는 中始祖(중시조)이전부터 水原(수원)과 인연을 맺어왔다는 것이 확증됐다. 그래서 1996년 12월 23일 제12차 회의는 드디어 관향을 水原(수원)으로 통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1997년 발간된 대동보 丁丑譜(정축보) 부터는 水原白氏 大同譜(수원백씨 대동보)로 발간하게 되었다. 자료출처: 丁丑譜, 任戌譜, 己亥譜, 永樂譜, 제3장
○ 岐陽祠(기양사) 현재 도지정 문화재 :(1999년2월26일 도지정 유형문화재 207호) ? 소재지 : 전남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66번지 ? 창 건 : 순조 8년 戊辰(1808) ? 향사일 : 음 9월 上丁日(상정일) 이 원사는 南溪 金胤(남계 김윤), 書谷 林분(서곡 임분), 竹谷 林회 (죽곡 임회), 岐峯 白光弘(기봉 백광홍), 東溪 白光城(동계 백광성), 風岑 白光顔(풍잠 백광안), 玉峯 白光勳(옥봉 백광훈), 芷川 金公喜 (지천 김공희) 8분의 八文章(팔문장)의 학덕을 기리고자 1808년 창사하여 8문장을 향사해오다 고종 5년(1868)에 대원군 이하응의 사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매안되었다가 그 후 광무 5년(1901)에 복설하면서 靜愼齋 白莊 (정신재 백장)을 비롯하여 貞海君 白壽長(정해군 백수장) 思周堂 白文麟 (사주당 백문린) 石潭 白翰南(석담 백한남) 述古堂 白民秀(술고당 백민수) 등 5位(5위)를 追配(추배)하고 靜愼齋(정신재)를 주벽으로 향사해 오고 있다. ※ 配享人物(배향인물) □ 主壁 白 莊(주벽 백 장)(1340~1411) 水原人(수원인), 字(자)는 明允(명윤), 號(호)는 靜愼齋(정신재), 圃隱 鄭夢周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수업하여 16세때 進士試(진사시)에 급제하고 25세때 元(원)나라 製述科(제술과)에 장원으로 등제하여 翰林院 侍讀士 (한림원 시독사)가 되었다.
고려 공민왕때 匡靖大夫吏曹典書 寶文閣 大提學 太子少保(광정대부 이조전서 보문각 대제학 태자소보)에 이르렀다. 원주 치악산에 은거 중 李成桂(이성계)가 등극, 공을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자 海美(해미)에 유배당하였고 태종이 다시 불렀으나 불응하여 長水(장수)로 謫居 (적거. 재유배)를 옮겨 淸心亭(청심정)을 세우고 유배당한 黃喜(황희)와 어울려 시를 지으며 유배생활을 하였다. 유배지에서 졸하니 태종이 동방의 백이(伯夷)라며 의정부 영의정 겸 領中樞府事(영중추부사)등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원주 竹林書院(죽림서원)에 제향되고 尙德詞(상덕사)라 사액하였으며. 장수 월강사. 장흥 기양사에서 제향을 모시고있다. 靜愼齋公(정신재공)의 時享(시향)일은 매년 4월 첫째주 일요일이며 전북 장수군 장계면 황곡리 에 있는 墓(묘)와 崇義齋(숭의재)齋室(재실)에서 時享(시향)을 모신다.
□ 白壽長(백수장)(1481~1543) 字(자)는 彭祖(팽조), 연산군 4년(1498)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 군수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원 都正(도정)에 이르렀다. 연산군의 실정에 반기를 들어 中宗(중종)을 옹립하니 反正(반정)공신으로 3등훈에 책록되고 秉忠奮義靖國功臣(병충분의정국공신) 칭호를 받았다. 공이 親養(친양)을 위하여 귀향하자 資憲大夫工曹判書(자헌대부공조판서)에 올리고 貞海君(정해군)으로 봉하여 食邑(식읍)까지 내렸다. 장재도에 정자를 세우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안양면 수양리에 神道碑(신도비)가 있다. □ 白文麟(백문린)(1482~1545 字(자)는 子禎(자정), 號(호)는 思周堂(사주당), 學圃(학포) 梁彭孫 (양팽손)의 門下(문하)에서 수업. 靜庵 趙光祖(정암 조광조)와 道義交(도의교)를 맺고 修己治心 理學究明 (수기치심 이학구명)에 힘써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중종이 寢郞(침랑)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경전에만 전념하였다. 다시 奉慈殿參奉(봉자전참봉)에 除受(제수)되었다가 仁宗元年(인종원년)에 卒(졸)하였다. □ 金 胤(김 윤)(1506~1571) 光山人(광산인)으로 字(자)는 纘中(찬중)이요 號(호)는 南溪(남계)다. 靈川 申潛(영천 신잠)의 문하에서 수업, 宣祖(선조) 3년(1570사) 司馬試 (사마시)에 급제하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林 분(임 분)(1501~1556) 扶安人(부안인)으로 字(자)는 成甫(성보)요 號(호)는 書谷(서곡)이다. 靈川 申潛(영천 신잠)의 문인. 중종 35년(1540)에 司馬試(사마시)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1540년 敎授 (교수)가 되었다. 평생을 經傳(경전)과 易傳(역전)을 講究(강구)하고 현량지사와 교분을 나누었다. □ 林 회(임 회)(1508~1556) 扶安人(부안인)으로 字(자)는 獻可(헌가), 號(호)는 竹谷(죽곡)이며 初諱 (초휘)는 誨(회)다. 書谷?의 弟(서곡분의 제), 五峯 李好閔(오봉 이호민) 문하에서 수업, 중종 29년(1534) 司馬試(사마시)에 급제하고 1540년에 文科(문과)에 등재하여 湖堂(호당)에 뽑히고 工曹正郞(공조정랑)을 거쳐 남원부사, 상주,순창,나주,광주,능주 등 8주목사를 지내고 檢祥(검상)에 올랐다. 赴京(부경)사신의 書狀官(서장관)으로 천거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그 곳 이름있는 여러 학사들과 교유한 바가 있다. □ 白光弘(백광홍)(1522~1556) 字(자)는 大裕(대유)요 號(호)는 岐峯(기봉), 一齋 李恒(일재 이항) 문하에서 수업. 명종 4년(1549) 사마시에 급제하고 1552년 문과에 등제하여 홍문관 正字(정자)에 임용되고 時賦會(시부회)에서 장원하여 選詩十卷 (선시십권)을 특사받고 湖堂(호당)에 뽑혔다. 명종 10년(1555)에 평안도 평사가 되어 재임하던 중 관서지방의 절경을 歌辭(가사)로 나타낸 관서별곡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고 있다. 35세로 졸하니 그의 詩文(시문)이 뻗지 못함을 아쉬워 하면서 1987. 11. 전국 가비동호인회에서 공의 묘가 있는 부산면 호계리 雲峙(운치)에 歌碑(가비)를 세웠다. □ 白光城(백광성)(1527~1567) 字(자)는 大한(대한)이요 號(호)는 東溪(동계)다. 岐峯 白光弘 (기봉 백광홍)의 종제, 명종 16년(1561)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科業 (과업)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오로지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 □ 白光顔(백광안)(1527~1567) 字(자)는 而粹(이수), 號(호)는 風岑(풍잠)이다. 岐峯 白光弘 (기봉 백광홍)의 제. 科業(과업)에 나아가지 않고 在家(재가)하여 학문에 전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 白光勳(백광훈)(1537~1582) 字(자)는 彰卿(창경), 號(호)는 玉峯(옥봉)이다. 岐峯의 弟(기봉의 제). 靑蓮 李後白(청연 이후백)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3세에 상경하여 양응남. 노수신 등에게서 사사. 명종 19년(1564)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詩書 (시서)에 열중하였다. 선조 5년(1572) 명나라 사신이 오매 노수신을 따라 白衣製述官(백의제술관)이 되니 명나라 사신이 감탄하여 白先生 (백선생)이라 했다. 선조 10년(1577) 宣陵參奉(선능참봉)을 시작으로 靖陵 禮賓寺 昭格署 (정능 예빈사 소격서) 참봉을 지냈으나 벼슬보다는 詩(시)로 이름을 날려 三唐詩人(삼당시인)이라 하였다. 공의 遺墨(유묵)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유물관이 1981년에 세워졌다. □ 金公喜(김공희)(1540~1604) 光山人(광산인)으로 字(자)는 之鳴(지명), 號(호)는 芷川(지천)이다. 명종 19년(1564) 사마시에 급제하고 宣祖(선조) 13년(1580) 문과에 등제하여 임진왜란에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郡守(군수)를 제수받아 6郡(군)을 돌며 선정을 베풀었다. □ 白翰南(백한남)(1567~1639) 字(자)는 子羽(자우), 號(호)는 石潭(석담)이다.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태어나서 白沙 李恒福(백사 이항복) 문하에서 수업하고 선조 22년 (1589)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府使(부사)에 이르렀다. 임진란에 의주까지 호종하여 原從功臣(원종공신)에 錄(록) 되었으며 1598년 正節使(정절사) 이항복을 수행하여 명나라에 갔었다. 용모가 수려하여 중국인들이 공의 화상을 그려 팔 정도였다 한다. □ 白民秀(백민수)(1577~1615) 字(자)는 起元(기원)이요 號(호)는 述古堂(술고당), 임진란 때 楓菴 文緯世 (풍암 문위세)를 따라 의병을 모집하고 정사제와 더불어 장수,성주, 개령,금산,이현,무주, 등을 돌며 적과 싸워 대승함에 濟用監直長 (제용감직장)을 제수하였다. 정유재란에도 문위세와 함께 용담에서 전투를 하여 적을 대파하므로 선무원 종훈에 책록되었다. ※ 享祀 祝文(향사축문) 首陽全節, 圃翁同揆, 克扶天經, 用樹風聲 靜愼齋 位 (수양전절, 포옹동규, 극부천경, 용수풍성 정신재 위) 身全忠孝, 義重宗社, 進退得中, 崇報彌彰 貞海君 位 (신전충효, 의중종사, 진퇴득중, 숭보미창 정해군 위) 學識高明, 行義絶倫, 衿懷灑落, 誦慕尤著 思周堂 位 (학식고명, 행의절륜, 금회쇄락, 송모우저 사주당 위) 行與度合, 規矩己正, 炳然遺慕, 百代可尙 南溪 位 (행여도합, 규구기정, 병연유모, 백대가상 남계 위) 存心養性, 全吾所得, ?然其衷, 餘敎永式 書谷 位 (존심양성, 전오소득, 애연기충, 여교영식 서곡 위) 沂水高鳳, 洛波臥龍, 觀心止水, 希音洪種 竹谷 位 (기수고봉, 낙파와룡, 관심지수, 희음홍종 죽곡 위) 體用正學, 諸賢推?, 立朝正笏, 士類有仰 岐峯 位 (체용정학, 제현추장, 입조정홀, 사류유앙 기봉 위) 一以聽天, 浩然養靜, 任重斯道, 開來繼往 東溪 位 (일이청천, 호연양정, 임중사도, 개래계왕 동계 위) 篤信不疑, 勇於克復, 不出戶外, 敎成于國 風岑 位 (독신불의, 용어극복, 불출호외, 교성우국 풍잠 위) 雅度壺月, 淸修苦節, 潛心主敬, 內直外方 玉峯 位 (아도호월, 청수고절, 잠심주경, 내직외방 옥봉 위) 材器卓?, 文行夙成, 存養修省, 動遵禮方 芷川 位 (재기탁락, 문행숙성, 존양수성, 동준예방 지천 위) 進以敵愾, 爲國藎臣, 退而藏修, 爲世逸民 石潭 位 (진이적개, 위국신신, 퇴이장수, 위세일민 석담 위) 勵志戡亂, 忘身報國, 克壯厥猷, 永鎭南服 述古堂 位 (여지감란, 망신보국, 극장궐유, 영진남복 술고당 위) ※ 건 물 사우(사우) 3칸, 강당 5칸, 내삼문(동광문) 외삼문 3칸, 직사 1동 4칸, 기타부속건물 2동 ※ 참 고 기봉 백광홍님의 선시십권이 문화재로 자료확보가 됨으로 해서 기양사를 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유지 되고있다. ※ 참고자료 문화관광부의 2004년 6월의 인물로 선정되신 기봉 백광홍님의 자료. 문화관광부는 조선 8대 문장가 중 한사람으로 가사문학의 효시인 “관서별곡(關西別曲)”을 남기는 등 가사문학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기봉 백광홍(白光弘, 1522~1556) 선생을 2004년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기념사업을 전개한다. 그가 스스로 찾아가서 스승으로 삼은 사람은 시산(詩山, 지금의 태인)의 일재 이항(一齋 李恒, 1499~1576)이었다. 또한 이 무렵 영천 신잠 (靈川 申潛, 1491~1554)을 만나 자주 학문과 철학을 논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1510~1560),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1),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 등의 제현과 깊이 있게 사귀며 덕업을 쌓았다. 기봉은 천품이 빼어나 뜻이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행동 규범에 빈틈이 없었다. 그는 벼슬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와 시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1549년 28세의 나이로 과장에 나아가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552년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명종 임금은 영·호남 문신들로 하여금 성균관에서 시문으로 글재주를 겨루게 하였다. 여기에서 기봉은 “동지(冬至)” 부(賦)에 시부(詩賦) 장원을 했다. 이 때 명종 임금으로부터 상으로 하사받은 “선시십권(選詩十卷, 1999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7호로 지정)”은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이 때 평안도의 외직에 부임한 기봉은 그 곳에서의 삶과 정취, 자연풍광을 시문으로 음영한바 많거니와 그 중 가사 “관서별곡(關西別曲)”은 널리 회자되었다. 이 작품은 작자가 왕명을 받아 관서 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에서부터 부임지를 순시하는 것까지의 기행 노정과 서경을 시적 운치로 그려낸 가사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보면 가사는 시조율을 가졌으면서 시조에 비해 길이가 긴 장편의 노래라는 점에서 운문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이행하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기행가사는 다소 서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관서별곡이라는 기행서경가사를 최초로 창작할 수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은 관서별곡은 우리나라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로서 정철, 조우인, 위세직, 이상계, 위백규, 이중전, 문계태 등의 가사 창작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25년 뒤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에는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저서로는 1899년에 결집된 “기봉집(岐峯集)”이 있다. 기봉의 한시 130수와 가사 ‘관서별곡’이 이 문집의 핵심적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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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安良面誌,丁丑譜,任戌譜,己亥譜,永樂譜, 文化觀光部
글쓴이 : 白 光哲
출처 :장흥백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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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백광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