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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본 "영남루" ==
== 영남루(嶺南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바로 옛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누각인데, 절은 없어졌다.
지원(至元) 을사년에 김주(金湊)가 군수가 되어 예전대로 고쳐 세우고,
인하여 절의 이름으로써 이름지었다.
뒤에 부사 안질(安質)이 중수하였다.
천순(天順) 경진년(1460)에 부사 강숙경(姜叔卿)이 또 중수하여 옛 규모를 넓히니, 크고 아름답기가 비길 데가 없다.
○ 고려 김주의 기문에,
"밀성군은 경상도에서 이름난 고장으로 그 해우(?宇 관공서의 청사) 동쪽에 누각이 있어 영남(嶺南)이라 하는데,
긴 강을 굽어보며 끼고 있고 넓은 들을 평평히 머금고 있어서 더욱 온 군에서 경치 좋은 곳이다.
을사년 봄에 내가 서울을 나와서 군수가 되어 일을 보는 여가에 이 누각을 보았는데,
규모가 좁아 집이 작고 추녀가 짧아 바람이 비끼면 비가 들어오고 해가 기울면 볕이 들어와서,
누각에 오르는 것을 즐긴다 하여도 메마르고 축축함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낡은 것을 고치려고 모두 다 걷어버리려고 생각하나,
공장(工匠)을 얻기 어려워서 군 사람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군노(郡奴) 한 사람이 평소에 훌륭한 공장이라 일컬어졌는데,
이미 늙고 또 병들어 일을 맡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누워서 지시할 수는 있습니다.' 하기에,
내가 곧 아전을 보내서 불러다가 그 까닭을 말하고,
진양(晉陽 진주(晉州))에 보내서 촉석루(矗石樓)의 제도를 그림으로 그리게 했더니,
돌아옴에 미쳐서는 병이 비로소 조금 나았다.
또 일꾼들을 거느리고 산에 들어가 재목을 거두니 날로 조금씩 힘이 붙어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게 되어 그 척도(尺度)를 헤아리고 승묵(繩墨)을 보고,
그 일을 마치게 되어서는 드디어 아주 병이 나았으니 이 어찌 천행이 아니랴.
집을 네모지게 넓히고 추녀를 겹쳐서 깊게 하니,
마루와 기둥이 넓고 높아서 바람과 비를 물리치게 되었다.
이윽고 단청을 하니,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그런 뒤에 바람과 비가 닥쳐도 근심하지 않고 뙤약볕의 뜨거움을 근심하지 않았다.
손님과 주인이 함께 기뻐하며 술을 서로 권하고 받았는데,
돌아다니고 움직이고 가만이 있기에 오히려 여지가 있고 올라가서 글을 읽으면 가슴속이 후련하니,
대개 좋은 경치의 고상한 멋을 더한 까닭이다.
교대하여 조정으로 돌아가서 8년이 지난 임자년에 외람되게 안부(按部)에 뽑히고,
또 18년이 지난 기사년에 또한 관찰사의 임무를 받고 와서 이 다락에 오르니,
이미 두 번이 된다.
돌아다보니 산천은 옛날과 같으나 누각이 더욱 새로움에 감탄했다.
산은 멀고 들은 넓으며 물은 멀고 하늘은 길며,
바람과 구름이 모습을 바꾸어 봄여름으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참으로 조화(造化)가 무궁한 것이요,
농부가 밭에서 부지런하고 목동이 들에 가축을 놓아 먹이며,
고기잡이가 물에서,
나무꾼들이 산에서 등을 구부리고 가고오는 것이 앞뒤로 잇따르고 사람의 일이 그 사이에서 대사(代謝)하는 것은 또한 조화와 더불어 무궁한 것이다.
예전에 내가 군수가 되었을 때는 나이가 젊고 기개가 날카로웠고,
나와서 안찰하게 되어서는 이미 예전 같지 않았다.
하물며 오늘날에 와서는 또 더욱 쇠약하였다.
24년 남짓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회상하니,
윤택하던 얼굴이 변해서 푸르죽죽해지고 검던 머리가 바뀌어 희끗희끗 해져서 다락 안의 보이는 것은 다 옛날에 보던 것인데 다락 안에서 보는 사람은 이미 옛 모습이 아니다.
어찌 바람을 쏘이면서 몹시 탄식하지 않을 수 있으랴.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소감 중에 작은 것일 뿐이다.
예컨대 군수이던 날에는 지위가 낮아 힘이 작았고,
안부가 되어서는 지위가 이미 높아져 힘이 커져서 당시에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에 와서는 지위가 더 높아져 힘 또한 커졌으므로 더욱 세상에서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
한 도(道)의 권세를 조종하고 12년이란 오랜 세월을 겪었는데도 한 가지 일도 나라를 돕고 백성에게 넉넉하게 하여 뛰어나게 이목(耳目)에 있고 밝고 밝게 금석(金石)에 새겨,
이 다락의 경치와 더불어 함께 무궁한 후세에 드리울 만하게 하지 못한 것으로 말하면 더욱 한탄할 일이다.
때문에 벽에 적어서 내 뜻을 털어놓는다." 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기문에,
"밀양 군수 강숙경(姜叔卿) 군이 영남루를 새롭게 하고 나서,
글을 나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다락이 읍의 좋은 구경거리인데 좁고 기울어져서 이름에 걸맞지 않더니,
지금 새롭게 하여 모두 3채를 더 달아서 두르고 단청을 베푸니,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형님이 일찍이 기문을 지어주기로 허락하고서 이루지 못했는데,
우리 형을 알기로는 당신만한 이가 없으니,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아, 기문이 가보지 않고 멀리서 되겠는가.
강군은 진산(晉山) 문경공(文景公)의 한배 아우이다.
임금께서 공을 정승으로 임명하면서,
공의 어머니가 진주(晉州)에 있는데 늙어서 데려갈 수 없음을 불쌍히 여겨 밀양이 진주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군을 내보내 군수로 삼아 봉양하게 하고,
또 공에게 한 해에 한 번씩 근친하도록 허락하였다.
경진년에 공이 근친갔다 돌아와서 내게 말하기를,
'내 아우가 관리가 되어서 은혜롭게 하지 않는데도 사랑받고 가혹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두려워하며,
일이 닦여져 폐해졌던 것을 일으켰다.
이에 그 낡은 다락을 새롭게 하니 크고 넓기가 비할 데 없고,
큰 공사를 하는데 독촉하지 않아도 모여드니,
그 관리 노릇하는 것이 참으로 내가 미칠 수 없는 바이다.
내가 그 잘하는 것을 기뻐하여 기문 짓기를 허락하고 이미 초고를 지었다.' 하고,
장차 보여주려고 하였는데,
공이 곧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의 아들 윤범(允範)에게 초고에 대해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아, 아깝다. 이제 군의 글을 받고 보니,
먼 것을 어렵게 여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마 기를 짓겠는가.
그러나 또한 기문을 지어서 공의 뜻을 맺지 않고 견딜 수도 없다.
내가 공을 따른 것이 수십 년인데,
남에 대해 헐뜯고 칭찬하기를 가벼이 하는 것을 일찍이 못 보았는데 하물며 친아우임에랴.
군의 잘한다는 것은 역시 믿을 수 있다.
대저 은혜롭게 하지 않았는데도 사랑받는 것은 인자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요,
가혹하게 하지 않아도 두려워하는 것은 중한 위엄이 있기 때문이요,
일을 닦아 폐해졌던 것을 일으키는 것은 정치의 민첩함이니,
인자함과 위엄이 함께 드러나고 민첩함으로써 행하며,
그 미치는 바가 어찌 한 다락에 그치고 말 것이며,
한 고을에 그치고 말 것이겠는가.
이는 참으로 적지 않을 수 없다.
하물려 영남은 예전에 신라의 땅이었다.
고을이 된 것이 크고 작은 것 60여 관청인데,
누(樓)사(?)대(臺)관(觀)이 없는 곳이 없으나,
대체로 다 보이는 것으로 뜻을 취하여 이름지었는데,
홀로 이 다락만이 영남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그 강산의 좋은 경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니,
올라가 볼 것도 없이 멀리서도 알겠다.
특히 그 강산의 형세가 좋고 이제 영남루가 크고 넓은 것으로써 또한 강산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충분하니,
이에 또한 적을 만하다." 하였다.
○ 성원도(成元度)의 시 서문에,
"내가 사방에 유람하면서 누관(樓觀)의 좋은 것을 관람한 것이 많은데,
반 걸음도 못 가서 올라가 멀리 바라보이는 것이 확 트여 끝이 없는 것으로는 이 다락만한 것이 없었다.
남방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복주(福州)의 영호루(暎湖樓),
울주(蔚州)의 대화루(大和樓),
금주(金州)의 연자루(燕子樓),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협주(陜州)의 함벽루(涵碧樓)인데,
모두 이 다락에 비견할 수 없고,
여강(驪江)의 청심루(淸心樓),
평해(平海)의 망사루(望?樓),
단양(丹陽)의 봉소루(鳳韶樓)로 말하면 그 사이에서 우열을 겨룬다고 할 수 있다.
이 다락이 군의 길 곁에 자리잡아 북으로 소나무 언덕에 의지하고 서쪽으로 관도(官道)에 임했는데 큰 강이 그 사이에 비껴 흐르고,
늘어서 있는 봉우리가 삼면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고
넓은 들이 아득하고 평평하기가 바둑판 같은데,
큰 숲이 그 가운데에 무성하여 흐리거나 맑거나 아침이나 저물 녘의 사시의 경치가 무궁해서 시로는 다 기록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다 그려낼 수 없으니,
남방 산수의 신령한 기운이 밀양에 다 모여서 이 다락이 껴안고 있다.
내가 지정(至正) 갑신년(1344) 봄에 찰방(察訪)의 명을 받들어 이 도에 나와서 순행(巡行)하다가 길이 이 군을 지나게 되었는데,
군수 유(兪) 공이 나에게 구경하기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긴 구절로 된 율시(律詩)를 지어 판 위에 쓰니,
뒤에 오는 군자들은 서툴고 나쁘다고 꾸짖지 마십시오.
시에 이르기를,
'붉은 난간이 불쑥 솟아 구름 하늘에 닿았고,
줄지은 산 잇단 봉우리가 눈 앞에 모였구나.
아래에는 긴 강이 끊임없이 흐르고, 남쪽에는 큰 들이 끝없이 넓으이.
마을 다리엔 버들이 천림(千林) 비 속에 어둡고,
관로(管路)엔 꽃이 10리 연기 속에 밝구나.
올라가 풍경을 감상하고 싶지 않으니,
사람들이 환영연을 베풀까 두렵네.' 하였다." 했다.
○ 임춘(林椿)의 시에,
"일찍이 듣기를 원교(圓嶠 신선이 산다는 곳)가 푸른 물결을 임해서,
누각이 영롱(玲瓏)히 큰 자라 위에 세워 있다더니,
자라가 기울어지니 바다가 흔들려서 여러 신선들이 놀래누나.
망망히 다 없어져버리고 한 봉우리만 높이 남았는데,
그것이 날아와서 황홀히 이곳에 옮겨져,
가득히 천고에 옛 구덩이에 맞추었네.
우뚝 솟아 하늘에 닿아서 옥을 겹친 듯하고,
백 길 맑은 연못에는 압록(鴨綠 오리 머리의 진한 녹색 같은 물의 빛깔)을 비꼈구나.
물에 뜬 복숭아꽃은 동중(洞中)에서 나왔고,
사는 이들은 완연히 진(秦) 나라의 풍속이 남았네.
푸른 산 그림자 속에는 두세 집인데,
늘어진 버들 그늘 안에는 천만 집일세.
해 저무는 교외 들에 소말 돌아가고,
봄 깊은 물가에는 오리갈매기가 헤엄치네.
고깃배 아이놈의 노질은 나는 듯하여,
시냇가를 몇 굽이나 돌았는지 모르겠구나.
서울에서 오는 손이 언제 오는지.
다락 위에서 천리까지 다 보았으면,
산인지 구름인지 멀리 같은 빛인데,
기러기가 긴 하늘을 점점이 끊겼다 이어지는구나.
하늘가에 저녁 빛이 사뭇 어스름한데,
어찌 그리 집 생각이 다시 바쁜고.
거듭 이 다락에 오르지 않으리,
안개 물결 좋은 곳이 사람을 근심시키네."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높은 다락에 올라 바라보니 하늘에 오른 듯하고,
경치가 어지러이 앞뒤에 갑작스럽구나.
바람과 달이 모두 맑기는 예나 이제나 한가진데,
강과 산은 10리로 가운데인지 가인지 모르겠구나.
가을이 깊어 관로(管路)에 단풍이 비추는데,
날 저문 어촌에 흰 연기 이네.
손이 오래도록 읊어도 시를 이루지 못하는데,
사군(使君)이 상을 차려 첫 자리를 가다듬네." 하였다.
○ 고려 이인복(李仁復)의 시에,
"더위를 느끼면서 올라오니 가을이 하늘에 가득하고,
눈 안에 장관을 전엔 몰랐네.
산은 서쪽을 따라 꺾여서 구름 겉에 비꼈고,
물은 동에서 흘러와 기슭을 에워쌌네.
가락이 바쁜데 해와 달을 한가히 감상하고,
긴 숲 무성한 풀에 바람 안개를 즐기네.
경치 속에 머물러 거리낄 일 무엇이랴.
곤드레 취해서 끝내 비단 자리를 밟으리."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백 척 높은 다락 긴 하늘을 당기니,
책상 머리에 풍경이 무성히 늘어섰네.
시내가 가까우니 물 소리가 난간 밖에 지나가고,
구름이 개이니 산의 푸름이 처마 끝에 듣네.
1천 휴 밭 이랑에 벼가 비를 겪었고,
10리 거리에는 나무가 연기를 띠었네.
필마(匹馬)로 남으로 와서 경치 좋은 곳을 지나니,
올라와 바라보며 손님 자리에 낄 만하이." 하였다.
○ 하륜(河崙)의 시에,
"뉘라서 높은 다락을 지어 하늘까지 올려 이었나.
벽 사이에 글을 써서 기둥머리 다 채웠네.
흘러 간 세월은 잇고 이어 개울 밑에 임해 있고,
지난 일은 오래도록 기둥 가에 붙어 있네.
10리 상마(桑麻)는 비 이슬에 깊었고,
온 고장 산수는 구름 연기에 늙었네.
늦게 와 이미 저무는 해의 아름다움을 보았으니,
달이 가득한 긴 강에 다시 자리를 베푸네." 하였다.
○ 유관(柳觀)의 시에,
"올라온 것이 바로 9월 가을인데,
끝없이 봉우리들이 앞뒤를 싸안았네.
외로운 따오기는 저녁 노을 밖에 가지런히 날고,
뒤떨어진 기러기는 석양가에 놀라 일어나네.
붉은 난간 푸른 기와는 기운 달빛에 맑고,
큰 들 평평한 숲은 푸른 연기를 비꼈네.
기둥에 기대어 시를 읊다가 잠깐 조니,
꿈 속에서 마침 다시 경연에 입시하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에,
"높은 다락이 영남 하늘에 높이 있어,
10리의 진기한 풍경이 한눈 앞에 보이네.
낮이 고요하여 여울 소리가 베개 위에 잇달았고,
해가 기우니 소나무 그림자가 뜰가에 떨어졌네.
농부가 봄일 하는데 마을마다 비 내리고,
들 주막에서 밥 지으니 곳곳에 연기 이네.
아버님이 일찍이 여기를 지나신 것을 생각하니,
도리어 소자가 다시 자리를 편 것을 부끄러워하네." 하였다.
○ 도원흥(都元興)의 시에,
"금빛 옥빛 다락이 밝아 물과 하늘을 누르니,
예전에 누가 이 봉우리 앞에 지었나.
한 낚싯대 드리운 어부는 빗 소리 밖에 있고,
10리 길 행인(行人)은 산 그림자 가에 있네.
난간에 들어 온 구름은 무협(巫峽) 새벽에 일어나고,
물결 쫓는 꽃잎은 무릉(武陵) 연기에서 나왔네.
갈매기는 양관곡(陽關曲)만 들으니,
어찌 수심(愁心)의 송별연을 알랴." 하였다.
○ 김계창(金季昌)의 시에,
"눈(眼)은 동남 만리 하늘에 트였고,
한 고장의 풍경은 잔 앞에 있네.
시는 편우(片雨 한 곳에만 오는 비)가 무심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흥은 긴 강이 다하지 않는 곳을 쫓네.
갈매기한테 차인 놀란 물결은 맑은 눈[雪]을 뿌리고,
소가 졸고 있는 꽃다운 풀엔 푸른 연기가 이네.
주인이 놀이하는 이의 뜻을 늘 잘 알아서,
웃으며 봄바람을 거느리고 취한 자리에 들어오네." 하였다.
신증
김계창의 시에,
"누대(樓臺)의 그림자는 물속 하늘에 거꾸로 섰고,
만 가닥 늘어진 버들은 기슭 앞을 터네.
강은 저녁 밀물을 받아 바다 어귀에 돌아가고,
구름은 겨울 비를 끌고 시냇가를 지나네.
배 뚝이 멀고 가까운 곳에 청작(靑雀)이 헤매고,
보리 밭 높고 낮은 곳에 푸른 연기를 폈네.
달 밝은데 아전들 흩어지기를 즐겨 기다려,
퉁소소리 속에서 구슬 자리에 눕네." 하였다.
○ 신부(申溥)의 시에,
"객이 남쪽 고을에 오래 머무르니 한 해가 저물었구나.
몇 밤이나 화산(華山) 앞에서 돌아가는 꿈을 꿨던가.
서리는 수국(水國)의 푸른 오리 밖에 날고,
나뭇잎은 강성(江城)의 흰 기러기 가에 떨어지네.
양 기슭은 갈꽃인데 외로운 배에는 비요,
숲 너머 울타리에는 두어 집에 연기로다.
게을리 놀아 올라와 노는 흥을 다하지 못했는데,
난간을 돌다보니 달이 자리 위에 오르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올라가 굽어보니 마침 늦은 봄[慾沂川]이라,
바람은 얼굴을 스치는데 기둥 앞에 기대네.
남국의 산천은 바다에서 다하고,
여덟 창문의 음악은 구름가에 들레누나.
들소는 코를 들고서 관도(官道 국가가 관리하는 나루)를 가로지르고,
깃드는 해오라기는 새끼를 거느리고 밤 안개를 뚫고 가네.
바야흐로 내가 다니는 것이 외롭지 않음을 알겠구나.
늘 어머님을 뵈러 오느라니 손님 자리를 더럽히네." 하였다.
○ 일본인 용장(龍章)의 시에,
"등림하니 음악이 균천(鈞天 상제(上帝)의 궁궐)인가 황홀한데,
춤추는 소매 앞에 이야기 끝을 끊임없이 잇네.
맑은 안개는 멀리 산 마을 밖에 걷히고,
저녁 새는 물가 마을가를 낮게 나네.
갈대는 한밤의 달빛을 넉넉히 차지하고,
상자(桑? 뽕나무와 산뽕나무)는 만호(萬戶)의 연기를 가지런히 나누었네.
가득 찬 술잔을 사양하지 마오,
내일 아침이면 바다 위에서 이별한 자리가 생각나리다." 하였다.
○ 이윤(李胤)의 시에,
"홀로 높은 난간에 기대어 먼 하늘 바라보니,
한 점 나잠(螺岑 소라모양의 산)이 기러기 진(陣) 앞에 있네.
현자(賢者) 달자(達者)가 고금의 묵은 자취 속에 있고,
강산의 그림은 이 다락가에 다하였구나.
겹친 숲의 나뭇잎은 가을비에 밝고,
먼 동리의 인가엔 저녁 연기 일어나네.
마음껏 취해 소리 높여 노래하고 크게 웃으니,
늙은이가 꽃다운 자리로 가지 못하네." 하였다.
○ 유순정(柳順汀)의 시에,
"호산(湖山) 만리 하늘을 배회하니,
신세(身世 내 몸이 있는 이 세상)는 20년 전 그대로구나.
두어 마을의 물가 대나무 곁에는 소가 울고,
한 덩어리 구름 아지랑이 가에는 새가 가네.
꿈은 꽃 지는 강가 집에 내리는 비에 깨고,
시는 해 지는 버들가 다리의 연기에 이루었네.
늙은 사객(詞客 글 짓는 사람.
문사(文士)사인(詞人))이 옛 생각에 쏠리는데,
어찌하여 잔이 기울고 달빛이 자리에 차는고." 하였다.
소루(召樓) : 영남루 서쪽에 있다.
○ 권기(權技)의 기문에,
"누각으로 영남에서 뛰어남을 자랑하는 것이 하나뿐이 아니니,
예컨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금주(金州)의 연자루(燕子樓),
울주(蔚州)의 대화루(大和樓),
그리고 내 고향의 영호루(映湖樓)가 곧 그것인데,
밀주(密州)의 누각에 대해서만 영남으로 이름 부르니 어찌하여 여러 고을을 내려다보고 한 지방의 명승(名勝)을 독차지하는가.
내가 경치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도 구경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신유년 겨울에 예천(醴泉) 권맹손(權孟孫) 정승이 경기관찰사로 있다가 이 도에 절도사로 옮겨 오는데,
막하(幕下)에 붙어서 이듬 해 임술년 봄에 행차가 밀산(密山)에 이르렀다.
공을 따라 누각에 가서 문서를 살피는 여가에 눈을 돌려서 보니,
진기한 경치와 뛰어난 구경이 과연 평소에 듣던 것과 똑같아서 남쪽 지방에서 첫째일 뿐 아니라,
곧 등왕각(?王閣)악양루(岳陽樓)와 서로 겨루고 또한 나은 것이 있다.
다락의 서쪽에 또 한 다락이 있어 더욱 물에 가까운데, 읍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부사 안질(安質) 공이 옛터에다 지었는데,
읍 사람들이 소루(小樓)라고 부르며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ꡐ무릇 작다고 일컫는 것은 큰 것에 대하여 말하는데,
아마도 영남 옛 다락이 있는 까닭으로 이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지은 규모는 비록 옛 다락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추녀와 기둥이 트였으며 들려서 머무르기에 편하고 온화해서 설사 귀빈이 한꺼번에 온다 하더라도 각각 등림하여 편히 쉴 곳이 있으니,
이 다락의 지음새가 참으로 작다고 할 수 없다.
하물며 여기 올라서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 잇단 봉우리와 겹친 산, 온 하늘에 긴 연기와 천리에 밝은 달을 바라보는 것이 영남루와 같음에 있어서랴.
가까이에서 상쾌한 바람소리가 추녀로 들어오고 맑은 여울이 기슭에 부딪치며,
멀리로는 마암(馬巖)에서 짐승에게 풀 뜯기는 자,
우도(牛島)에서 밭가는 자를 숲 곁에서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
또 옛 다락에 더하는 것이 있는데, 어찌 작다고 일컫겠는가.
마땅히 아름다움으로 편액해야 하니,
그 음(音)을 따라 그 글자를 고쳐 소루(召樓)라고 하라.
소(召)로 소(小)를 바꾼 것을 네가 어찌 알겠는가.
이 다락을 지은 사람은 백성들을 사랑하며 기르기에 수고하고 소송을 판결하는데 밝아서 고을 사람들이 소부(召父)에 비기고,
이 다락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다 남쪽 지방을 선화(宣化)하기에 소백(召伯의 옛 정치를 숭상할 것이니,
소(召)로 이름짓는 것이 그럴 듯하지 않은가.' 했다." 하였다.
신증
부사 이충걸(李忠傑)이 옛것에다가 증축하고 이름을 임경당(臨鏡堂)으로 고쳤다.
덕민정(德民亭) : 수산현(守山縣)에 있다.
○ 권람(權擥)의 기문에,
"정통(正統) 13년 무진(1448) 겨울에 양성(陽城) 이후(李侯)가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있다가 이 부(府)로 옮겨 임명되어 와서,
정치는 통달하고 사람은 화목하며 해로운 것은 물리치고 이로운 것은 일으켰다.
수산이라는 속현(屬縣)이 부의 남쪽 30리쯤에 있는데,
부로부터 남으로 가서 서쪽에 다다르는 요충이고,
현의 남쪽에 큰 강이 있어 상산(商山 지금의 상주)으로부터 낙동강으로 가서 바다에 이르니,
참으로 조운(漕運)이 경우하는 곳이다.
무릇 사명(使命)이 이 현을 지나갈 때에는 부에서 실상 영접한다.
현에는 공해(公?)가 없고 또 아전과 노비들이 모두 부에 들어가 일하는 까닭에,
말린 양식, 평상과 휘장 등 제반 수요 물자를 짐승에게 싣고 허리를 꾸부리고 잇달아 가고 오기에 쉴 새가 없었으므로 부사가 개탄스럽게 생각했다.
3년을 지난 경오년 가을에 현의 서쪽 언덕에 자리를 잡아 가운데에 3칸을 지어 청(廳)의 일을 보게 하고 좌우에 각각 3칸을 붙여 따뜻한 방으로 만드니 따뜻하고 서늘함이 장소를 달리하였다.
단청이 끝나자 무릇 현에서 와서 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딸려서,
무논 몇 이랑을 개간하여 때때로 농사를 권장하니,
해마다 벼 몇백 섬을 얻었다.
부엌과 곳간이 이미 세워지자 일용 도구가 또한 저장되어 부엌일 하는 사람과 정원 일 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일에 종사하는데,
도구를 갖추지 못한 것이 없었다.
이로부터 무릇 전송이나 영접할 일이 있으면 부사가 혼자 말을 타고 가 쌀은 곳간에서 꺼내고 술은 통에서 떠내어 능히 갖추어 접대에 공급할 수 있으므로,
문득 부에서는 손님을 모셔 가는 수고가 끊어지고 현에서는 들어가 일하는 괴로움이 없어져서 피차가 함께 편안하여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내가 미침 객으로 갔더니,
부의 사람 강(姜)박(朴) 두 사람이 나에게 고하기를,
'부사께서 이 정자를 짓고 민폐를 혁파하였으니,
덕은 비록 백성에게 있어서 길이 잊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문이 없을 수 없으니,
장차 당신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보건대, 온 부의 경치가 다 이 정자에 들어 있어서,
그 남쪽은 먼 봉우리가 하늘에 떠 있고 새파란 빛이 하늘에 비껴 있어 먼 곳은 옅고 가까운 곳은 짙은 것이 함께 정자에 모이고,
긴 강은 피륙을 펴놓은 듯하고 평형한 모래 밭은 눈을 깔은 듯하며,
연기는 먼 물가에 가라앉고 달은 긴 섬에 찼으며,
장삿배의 돛은 바람을 가득히 안고 고깃배는 그물을 걷으며,
그 동쪽은 넓은 들이 갈아놓은 듯 평평하여 멀리 바라보아도 끝이 없고,
밭두둑에서는 농부가 노래하고 뚝에서는 목동이 피리 불며,
외로운 마을에는 늙은 나무가 있고, 땅거미가 질 때에는 연기가 비끼며,
그 북쪽은 백 이랑이나 되는 못이 있는데,
물결 위에는 연꽃이 피어서 우뚝한 푸른 일산이요,
윤기 있는 붉은 옷엔 바람이 비껴 불고 비가 윤기 있게 내려 적시고,
물가의 난초와 기슭의 향풀은 이슬을 띠고 연기를 머금었으며,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날아 모이고 물고기와 자라가 떠서 헤엄치며,
못 가운데에 섬이 있어 푸른 대나무가 길쭉길쭉 아름답게 무성하여,
바람을 맞으면 구슬을 비비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달빛을 띠면 금가루를 키질하는 것 같으니,
이것이 또한 이 정자의 가장 좋은 경치이다.
아, 부사가 정자를 지은 뜻이 어찌 이에 있으랴.
이 강과 이 산이 있은 이래로 일찍이 얼마 동안이나 풀이 우거져 논밭이 묵고 쓸모 없는 언덕이었던가.
그러더니 오늘에 와서 이 정자가 빨리 이루어지자 묵은 폐단이 갑자기 새로워지니,
또한 하늘이 아끼고 귀신이 감추었다가 우리 부사를 기다려서 이 백성들에게 복을 주는 것이 참으로 이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어찌 다만 승지를 유람하는데 그치랴.
우리 부사의 덕은 부가 부담을 벗고 현도 편히 자게 하였다.
부사가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백성이 덕에 감복한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강의 연변에 멱례리(覓禮里), 감물지리(甘勿池里) 등이 있어
무려 수백 호가 장마로 물이 부는 때를 당할 때마다 늘 집이 물에 잠기는 것을 걱정하나
백성이 모두 일정한 곳에 옮겨 편히 살지 못하므로,
부사가 그 산 언덕에 자리를 잡아서 모두 옮겨 지어 산의 터에 의지하게 하니,
샘이 달고 땅이 기름져서 갈고 파서 먹으며 그 직업을 길이 세웠으니,
그 백성에게 덕을 베풂이 또한 크도다.
그러므로 특별히 덕(德)과 민(民) 두 자를 들어 정자에 이름붙였다고 한다.
부사의 이름은 백상(伯常)인데,
일찍이 몇 군을 맡아서 다 어진 정치를 하였다.
강(姜)은 본관이 진주로 이름이 극창(克昌)이고,
박은 본부 사람으로 이름이 학문(學問)이다." 하였다.
○ 서거정이 읊은 사시시(四時詩)에,
"들 넓고 하늘 얕아 손바닥인 양 평평하고,
봄 강물은 오리 머리인 양 밝구나.
연기는 비단 같은 꽃 천 그루를 얽고,
비는 낭간(琅?) 같은 대 몇 줄기를 씻네.
제비가 영접하니 버들개지가 날아 내리고, 갈매기가 전송하여 가는 배에 비끼네.
예나 지금이나 방초(芳草)와 청천(晴川)의 한은 같은데,
황학루(黃鶴樓)가 이름을 독차지 하다니." 하였다.
○ "겹친 산마루는 큰 뚝을 누르고,
발을 걷으니 청산(靑山)의 살아 있는 그림이 밝구나.
연꽃은 살살 부는 바람에 묵은 잎새를 추켜들고,
줄과 부들은 물이 넉넉하여 새 줄기가 자라네.
섬은 늘어 선 나무를 두르고 하늘과 함께 지나가는데,
골짜기는 맑은 강을 묶어 땅을 깎고 비껴 있네.
술통의 술이 흥을 다하지 않았으니,
내 몸 밖에 다시 무슨 공명을 알랴." 하였다.
○ "소슬한 강 언덕에 초목이 평온하고,
누대 홍벽(紅碧)은 구분이 선명하구나.
빗소리는 댓잎[三湘葉]에 먼저 곁들고,
가을 빛은 난초 줄기[九?莖]에 길이 머무네.
물이 줄어 여울에 물고기 내려가고,
구름이 깊어 고개에 기러기 비끼네.
예로부터 송옥(宋玉)이 요락(搖落)을 슬퍼하였으나,
비추부(悲秋賦)를 지었으니 벼슬 재미인지 나그네 근심인지 이름짓기 어렵구나." 하였다.
○ "긴 하늘이 흐려 언 구름이 낮게 흐르고, 1
0리 강산에 개인 눈이 밝구나.
이 생도 옥계(玉界)를 헤맬 수 있으니,
신선은 금경(金莖)이 필요하지 않으리.
솔에 바람 불어 만 골짜기에 추운 소리 크고,
매화에 달 비추어 천 수풀에 여윈 그림자 비끼네.
이런 강산에 돌아가야겠는데,
하찮은 벼슬이 공명에 부끄럽구나." 하였다.
[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의 "누정(樓亭)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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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 보물 제147호 | |
명 칭 |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 | |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 |
수량/면적 | 1동 | |
지 정 일 | 1963.01.21 | |
소 재 지 | 경남 밀양시 내일동 39외 | |
시 대 | 조선시대 | |
소 유 자 | 국유 | |
관 리 자 | 밀양시 | |
일반설명 | 전문설명 | ||
http://www.cha.go.kr/newinfo/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14700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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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레나> "영남루 중수기 현판, 고문헌 등"을 보시면, 한문으로 기록되어 범인들은 그 내용을 거의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위 글은 그러한 한문의 문장을 번역하여 적은 글입니다
영남루 대청마루에 그냥 현판만 바라 보시는 것보다 이 해석문을 한 장 출력(복사)하셔서 영남루 대청에 올라
내가 그 당시 밀양도호부 부사(府使)라 가정하시고 영남루 사방을 한번 둘러 보시며 이 글을 한번 보시면 영남루와 밀양의 정취를 새롭게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 글에 보시면 "일본인 용장(龍章)"이라는 사람의 글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그 당시 조선과 일본간의 외교적 교류 상태를 어렴풋이 짐작을 해 보며 위와 같은 자들이 겉으로는 선린외교를 표방하면서 약 100년 뒤의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정보수집 및 정탐역할을 한 것으로도 짐작이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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