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비단을 짊어지고 창작의 실크로드로
송현민(국립극장 발행 미르지, 2018년 11월 12월)
전인평(1945~)은 ‘동양음악’(1989), ‘실크로드 음악과 한국음악’(2000), ‘동북아시아 음악사’(2012) 등의 책을 지었다. 그런 그의 이름은 ‘음악 찾아 여행하기’와 ‘기록 남기기’의 주어이다. 목적어는 아시아음악. 여행하지 않을 때에는 곡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여행의 흔적이다. 적어 내려가던 선율과 음이 막히면 그는 또 다시 떠난다. 한국음악에 숨 쉬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음악적 맥을 역사적으로 탐구하거나, 한국음악이 아시아와 교감한 느낌의 흔적을 찾는다.
신국악의 요충지에서
전인평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1963년 대전사범학교(1963년 폐교) 졸업 후 그는 서산 원북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무료하던 시간을 때우기 위해 쓴 곡이 동요 ‘연못’(1964)이었고, 당시 월간으로 발행되던 ‘새교실’에 투고하니 노래가 잡지에 실렸다. 게재되는 노래에 대해 촌평하는 의례가 있었는데 “음악이론을 공부하 더 좋은 곡을 쓸 수 있겠다”는 평이 실렸다. 그 길로 전인평은 두 권의 책을 사서 독학했다. 나운영(1922~1993)이 지은 ‘화성법’과 ‘작곡법’이었다.
독학으로 공부하다시피 한 그는 서울대학 국악과에 입학했다. 1959년에 신설되어 교육 체계가 명확히 잡혀 있지 않은 국악과에는 특별한 교육 시스템이 없었다. 곡을 짓는 데에는 독학과 스승들의 격려가 전부였다. 국악학도였지만 1968년 동아콩쿠르에 나가 서양음악부문에서 피아노 삼중주로 입상했다. 가야금산조의 선율을 바이올린이 피치카토로 연주하게 하게 한 것이 특징인 곡이었다. 이듬해에 같은 콩쿠르의 작곡부에서 국악작곡 부문이 신설되었다. 전인평은 삼중주로 입상했다. 대학교 3학년, 25살 때였다. 1970년에 졸업한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호구지책으로 상명사대부속중학교의 음악교사로 취직했고, 같은 해에 소년조선일보 동요작곡상을 수상했다.
당시 서울대학 국악과는 ‘신국악’의 요충지나 다름없었다. 지금이야 창작국악의 행위와 작품, 연주가 일반화되었지만 당시 서울대학 음대 정기연주회에서 선보이는 신곡의 초연과 그 파장은 국악사회를 변화시키는 작지만 중요한 동력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창설 이래 해마다 정기연주회를 가져 불모의 국악계에 단 하나의 창작곡의 숨통을 터온 음대 연주회’(동아일보 1971 11월 2일)였던 것이다. 전인평은 당시 국악계의 변화를 이끌던 한만영(전 서울대학 국악과 교수)으로부터 관현악곡을 위촉 받는다. 작곡에 관한 방법론이 있어서 곡이 나오는 때가 아니라, 곡의 탄생과 함께 국악작곡의 뼈대가 잡혀가던 때였다. 당시 관현악곡을 쓰던 이들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전인평이 쓴 가야금 협주곡은 1970년 정기연주회에서 한만영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1971년 제12회 정기연주회에서는 합주곡 ‘운(韻)’을 발표했다. 이 공연에는 이해식, 전인평, 이성천, 김용진 등의 작품이 함께 연주됐다. 이들이 앞서 말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이들이다. 1973년 정기연주회에서는 가야금 5중주를 초연했는데, 이 곡을 들은 권오성(전 한양대 교수)는 “가야고의 전통적 주법을 확대시켜 구축한 아담한 곡”이라 평했다(경향신문 1973년 6월 9일).
작곡과 공부, 가르치기와 배우기 속에서 전인평은 1972년 ‘대여음(大餘音)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써둔 가곡들을 모아 가곡집 ‘산거(山居)’를 냈고, 그해 10월 20일에 이정록과 함께 서울음대 리사이틀홀에서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방황과 모색, 소재찾기
1970년대에 들어 전인평은 ‘운(韻)’(1971), 가야금 협주곡 2번(1974), ‘달 아래서’(1978) 등의 관현악곡과 가야고·피리·대금·장구를 위한 4중주(1970), 가야금 독주 ‘사슴풀’(1972)와 ‘어린이 나라’(1979), 피리를 위한 산조(1979), 거문고 독주곡 ‘소나무가 보이는 마을’(1979) 등을 작곡했다. 피아노·플루트·오보에를 위한 3중주(1970), 트럼펫 중주 ‘채운’(1972) 등의 서양식 작품을 쓰기도 했고, ‘국화 옆에서’ ‘동짓달’ ‘화분’ ‘산골 애기’(1972),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1974) 등의 가곡을 짓기도 했다. 이중 관현악 ‘달 아래서’는 오늘날까지도 자주 연주되곤 한다. 이 시기는 방황과 모색의 시기로 국악 외 서양음악, 동요, 가곡 등이 혼재된 시기다. 모색의 여정은 관현악 ‘두레’와 거문고독주 ‘소나무가 보이는 마을’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관현악 ‘두레’는 1978년 작품이다. 이 곡이 발표될 당시는 1960년대에 시작되었던 신국악 운동이 그 뿌리(국악)와 줄기(작곡)를 타고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을 때였다. 1978년에 이상규의 ‘대바람소리’, 1979년 이해식의 ‘해동신곡’, 1981년 김영동의 ‘매굿’이 대한민국작곡상을 수상하며 당대의 대표작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그간 희미했던 국악작곡의 개념도 작곡가-작품-초연 문화를 타며 본격적인 창작예술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전인평은 ‘두레’로 1980년 제4회 대한민국작곡상을 수상했다. 음악적 시야를 농악으로 돌린 후에 만든 작품이었다. 소재 찾기에 갈급해하던 그는 장구연주자 김병섭에게 직접 배운 설장구와 농악장단을 바탕으로 3악장 구성의 관현악곡을 만들었고, 체득한 장단은 논문 ‘굿거리장단의 변주방법’(‘민족음악학’, 1979)에 정리해놓기도 했다.
1979년 발표작 ‘소나무가 보이는 마을’은 1980년대에 활발히 진행 될 거문고 창작을 예견하는 작품이다. KBS가 FM 시리즈로 펴낸 음반 ‘거문고 앙상블’(2002)은 20세기를 빛낸 거문고 창작곡을 모은 음반으로, ‘소나무가 보이는 마을’은 정대석·이강덕 등이 남긴 1970년대의 거문고 작품들과 함께 이 음반에 수록되었다.
장단과 거문고
전인평에게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창작을 위한 ‘모색’의 시간이었다면, 1980년대는 ‘빠져듦’의 시간이었다. 예술가에게 ‘빠져듦’이란 특정 소재에 대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정체성을 더욱 단단히 하는 시간이다.
첫 번째는 장단이었다. 전작 ‘두레’를 통해 장단의 묘미를 안 그는 가야금·거문고와 같은 현악기들을 통해 장단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가야금독주곡 ‘노피곰’(1981)에는 전남 장산도 씻김굿 현장에서 접한 장단을 녹여 넣었고 장구가 아닌 북을 사용하게 했다. 거문고 독주곡 ‘장산도’(1980)와 ‘정읍후사’(1982)에서도 장단과 박자의 힘줄이 선율의 핏줄과 잘 맞물린다.
두 번째는 거문고였다. 1979년 전작 거문고 독주곡 ‘소나무가 보이는 마을’(1979)가 스스로 세운 이정표였다면, 1980년대는 그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고 홍난파 주제에 의한 거문고 독주곡(1988), 거문고 독주곡 3번 (1988) 등을 발표했다. 거문고에 집중한 에너지는 ‘자장가 주제에 의한 거문고 변주곡’(1990)에서 거문고연주자가 연주와 동시에 느린 도드리장단에 맞춰 노래하는 병창의 실험으로 이어졌는가 하면, 훗날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는 거문고 협주곡 ‘왕산악’(1996)에서 대거 표출되기도 했다. 그의 장녀 전진아(KBS 국악관현악단 단원)이 아버지의 곡을 여러 곡 초연하였고 그 결과물이 거문고 판타지(2013)란 거문고 작품집으로 탄생하였다.
음악의 새로운 뿌리를 찾아
1983년에 중앙대 국악과 교수로 부임한 전인평은 1985년에 인도로 향했다. 불교곡이던 영산회상을 연구하던 중 불교의 본국으로 발걸음을 옮겨본 것이었다. 그는 인도 뉴델리의 간다르마 마하 비디알라야에서 인도와 아시아음악을 공부했다.
그에게 작곡이란 근대 시기에 한국음악에 영향을 준 서양음악과의 ‘줄 당기기’였다면, 아시아음악연구는 고대와 중세에 영향을 준 중앙아시아 음악과의 ‘줄 잇기’ 작업이었다. 그가 빠져들었던 거문고도 서역과 교류를 활발히 진행한 고구려의 악기라는 사실을 통해 중앙아시아도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한국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아시아의 ‘공통성’ 속에서 한국음악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직접 발로 띈 현장의 자료와 주관적 느낌은 객관화되어 ‘새로운 한국음악사’(2000)를 저술하는 연료가 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실크로드 음악과 한국음악’(2000) ‘아시아음악연구’(2001) ‘실크로드, 길 위의 노래’(2003) ‘인도음악의 멋과 신비’(2003) ‘아시아음악의 이해’(2005) ‘동북아시아 음악사’(2012) 등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산조와 인도의 라가를 비교했고, 인도 고대연극에서 음악을 사용했던 내용의 ‘나티야 사스트라’와 인도 전통리듬인 탈라에서 영산회상의 장단과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기도 했다. 느리게 시작하여 빠르게 진행되는 ‘만·중·삭’의 세틀 형식은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캄보디아 음악에도 녹아 있는 특징이었다. 그래서 ‘세종대왕 봉래의 장단과 속도’(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논문, 1999)를 연구할 적에 조선음악의 만·중·삭 개념은 그가 기존에 알고 있던 만·중·삭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시아의 음악적 공통분모였던 것이다.
아시아음악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전인평은 현장답사를 통해 얻은 지식을 작곡에도 불어 넣었다. 현을 미세하게 움직이는 인도의 부빨리 주법은 거문고독주곡 ‘왕산악’(1984)의 모티프가 되었고, 북인도의 현대적인 음악기법인 캬햘을 도입하여 가야금독주곡 ‘서경별곡’(1986)을 작곡하기도 했다. 관현악 ‘별주부와 토끼’(1989)에는 인도음악의 지속음기법이 녹아 있다.
음악의 비단을 짊어지고 실크로드로
1980년대부터 한국음악은 일본음악과 더욱 적극적으로 교류를 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한 여행 자유화와 1992년 한·중 수교는 한·중·일의 전통음악이 만나는 장의 가속화를 앞당겼다. 한 예로 동아시아 3개국의 전통음악가들이 모여 1993년 창단한 오케스트라 아시아가 있다.
전인평은 이와 달리 음악의 비단을 짊어지고 실크로드로 나아갔다. 1991년과 1998년에 중앙아시아로 대대적인 현지 조사를 나갔다. 답삿길에서 음악을 만나면 그 기원을 물었다. 뿌리의 한 끝은 반드시 한국음악과 닿아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1991년 실크로드 탐사하던 중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장단의 표정은 굿거리, 자진모리, 동살풀이와 닮아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금곡 ‘알타이 춤곡’(1993)을 작곡했다. ‘거문고 환상곡’(2011)에는 인도 벵골의 민요를 사용했다. 인도음악에 담긴 한의 정서가 한국민요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라 환상곡’(2006)에선 몽골의 노랫소리가, ‘사매은곡’(2011)에선 인도의 향내가 풍겨 나온다.
그는 2002년부터 영문학술지 ‘Asian Musicology’를 내고 있다. 정년퇴직 후에 펴낸 ‘한국음악의 멋 열 가지’(2010), ‘동북아시아 음악사’(2012), ‘국악작곡 길잡이’(2013), ‘한국창작음악사’(2017)에는 그가 정진해온 한국음악-아시아음악-작곡-역사라는 줄기로 이어진다. 이 순간에도 진행되는 그의 작업들은 고대부터 한국음악에 영향을 준 역사적 반경을 살펴보는 망원경과 같고, 음악에 내재된 DNA를 살펴보는 현미경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음반|KBS-FM 시리즈 35 ‘KBS국악관현악단 창작음악집’
1996년에 발표한 거문고 협주곡 ‘왕산악’이 수록된 1999년 음반이다. 박일훈·박범훈의 외에 정대석의 거문고 협주곡 ‘수리재’도 동봉되어 있어, 거문고창작에서 일가를 이룬 두 작곡가의 특장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여러 문화가 녹아 있는 실크로드 작곡가답게 ‘왕산악’은 4악장의 자유로운 형식 속에서 여러 음악이 꿈틀거린다. 거문고의 타악기적 습성이 잘 나타나는 가운데 ‘상주모심기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영산회상과 산조가 겹쳐진 듯한 묘한 레이어가 전체적인 구조를 감싸기도 한다. 20년 전 오경자(국립국악관현악단 수석)의 협연은 작품과 악기의 매력을 부가시키는 결정적인 힘이다. 하여 전인평의 작품이면서 오경자의 작품이기도 하다.
(끝, 200자 원고지 기준 29매)
* 작품에 개재된 작곡 연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의 ‘한국 작고가 사전’과 전인평의 ‘한국창작음악사’를 따릅니다.
참고문헌
전인평 ‘한국창작음악사’, 아시아문화, 2017.
전인평, ‘새로운 한국음악사’, 현대음악출판사, 2000.
정수일, ‘실크로드학’, 창작과비평사, 2001.
안현정, ‘이성천, 이해식, 전인평 작품에 나타난 작곡기법연구’, 동양음악 40권, 2016.